[책과 삶]결국 제 자리로 돌아오는 '요요' 같은 사랑

한윤정 선임기자 입력 2015. 7. 31.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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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짜 팔로 하는 포옹…김중혁 지음 | 문학동네 | 304쪽 | 1만3000원

“인간의 감정에 대한 소설을 쓰고 싶었습니다. 다른 작가들은 대개 해온 일이지만, 저는 처음 도전해 보네요.”

김중혁씨(45)의 네 번째 소설집 <가짜 팔로 하는 포옹>은 ‘첫 연애소설집’이란 수식어를 달고 있다. 가장 밀도 높은 감정 교류가 연애이기 때문이라고 넘겨짚기 쉬우나, “내가 생각하는 연애는 둘이 만나 하나가 되는 게 아니라 혼자인 사람들이 서로 알아보려고 노력하다가 실패하는 일”이라며 “연애를 남녀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두 사람이 만나는 쓸쓸한 광경으로 보고 썼다”고 설명했다.

작가의 말처럼 소설에 등장하는 남녀 관계는 늘 엇박자이고 마음의 거리는 좀체 좁혀지지 않는다. 표제작 ‘가짜 팔로 하는 포옹’은 규호와 정윤, 두 남녀의 대화로 구성된 소설이다. “자기 아직도 술 많이 마셔?” “똑같지, 뭐.” 규호의 알코올중독 때문에 헤어진 두 사람은 맥줏집에서 만나 자신들의 과거를 더듬는다. “야, 이규호, 너 그때 정말 지긋지긋하게 지긋지긋했던 거 알지?” “알지. 내가 다 죄인이지. 전부 내 잘못이지. 그런데 그거 알아? 아무런 애정 없이 그냥 한번 안아주기만 해도, 그냥 체온만 나눠줘도 그게 한 사람을 살릴 수도 있대. 나는 그때 네가 날 안아주길 바랐는데, 네 등만 봤다고. 등에는 가시가 잔뜩 돋아 있었고.” 규호의 술 마시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자 정윤은 급히 일어나고, 그녀가 떠난 의자 등받이의 눌렸던 천이 천천히 되살아난다.

‘뱀들이 있어’ 역시 실패한 사랑 이야기다. 텔레비전에서 고향인 지방 소도시의 지진 소식을 지켜보는 정민철의 심정은 착잡하다. 무너진 건물에는 친구 김우재와 그의 아내 류영선이 운영하던 옷가게가 있다. 정민철은 류영선을 짝사랑했지만, 이 사실을 모르는 류영선은 김우재를 택했다. 혼자 서울로 온 정민철은 컴퓨터가게를 운영하며 게임을 개발하는데, 그를 지배하는 질투의 감정은 다른 여자와의 교제를 방해했다. ‘여자가 적극적이면 자신을 귀찮게 하는 게 싫었고, 소극적이면 자신의 마음대로 여자를 움직일 수 없는 게 싫었다. 데이트를 하고 돌아왔는데도 양말을 신고 잠드는 기분이었다.’ 사고 직후 고향으로 간 정민철은 김우재가 실종됐고, 류영선의 정신이 이상해진 걸 보며 망연자실한다. 그리고 옛날 할머니와의 대화를 떠올린다. “땅속에 있는 뱀들이 몸을 뒤틀면 온 세상이 흔들리는 거야.” “뱀들이 왜 몸을 뒤틀어?” “화나는 일이 있으니까 그러지.” 그렇다면 자신의 질투가 지진을 일으킨 것일까.

‘상황과 비율’은 포르노 영화의 상황감독과 여배우라는 특별한 직업을 가진 남녀를 등장시킨다. 춘하프로덕션의 상황감독 차양준은 포르노의 상황을 만들어내는 귀재다. 사무실, 길거리, 옥상, 야외, 술 취한 상황, 장례식 상황, 갇힌 상황 등 어떤 상황에서든 가장 자극적인 순간을 만들어내는 게 그의 일이다. 차양준은 감독과의 불화로 촬영을 중단한 여배우 송미를 설득하기 위해 그녀를 찾아가 이야기를 듣는다. “(촬영을 위해) 섹스할 때 무슨 생각 하는 줄 알아요? 탁구공 생각을 해요.” 가파른 언덕 아래로 가속이 붙으며 떨어지는 탁구공을 떠올려야 흥분된다는 것이다. 차양준은 감독을 교체해달라는 송미의 요구를 수용해 촬영장으로 복귀시키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그녀의 촬영 장면을 지켜보면서 그 탁구공이 자신의 심장으로 떨어졌음을 느낀다.

이처럼 희미한 사랑의 가능성은 2012년 이효석문학상 수상작인 ‘요요’에서도 확인된다. 지방대 시계제조공학과 남학생 차선재는 장수영에게 애틋한 감정을 느끼지만, 수영이 편지 한 장을 남긴 채 떠나면서 헤어진다. 시계회사 근무를 거쳐 독립시계제작자가 된 30대 후반의 선재는 ‘시간은 그저 흘러갈 뿐이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진실’을 담아 시침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가는 시계를 만들어 주목받는다. 그의 기사를 보고 수영에게 연락이 와 베를린에서 만나기로 하는데, 선재 아버지의 병이 그의 발길을 잡는다. 다시 시간은 흘러 50대 중반이 된 선재는 30개의 작품시계를 모아 전시회를 열고, 전시장에서 수영과 재회한다. 그런 다음 ‘영원을 향해 직선으로 흐르지만 결국 다시 돌아오는, 요요의 시간’을 떠올리며 원판의 시계를 완성한다.

8편 중 마지막에 실린 ‘요요’가 소설집의 결론일 수는 없다. 그러나 인생은 사랑의 불가능을 알면서도 그 가능성을 기대하며 자신만의 시간을 묵묵히 만들어가는 과정임을 확인하게 된다.

<한윤정 선임기자 yjh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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