깔딱고개 넘는 직장인의 친구.. 비오는 수요일엔 뼈다귀해장국

강종희·작가·커뮤니케이션 강사 2015. 7. 9.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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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종희의 밥그릇이다]

학창 시절, '비 오는 수요일'에 대한 자동 연상은 '빨간 장미'였다. '다섯손가락'이라는 이름의 밴드가 부른, 줄담배를 피운 듯 탁하지만 매력적인 목소리로 '수요일에는 빨간 장미를~'이라고 읊조리는 그 노래가 어찌나 중독성 있던지. 이후 나와 내 또래 친구들 사이에 비 오는 수요일은 꽃을 사다 바칠 연인이 있든 없든 '빨간 장미의 날'로 각인되었다. 그러나 학교를 졸업하고 밥벌이의 세계에 입문하면서, 비 오는 수요일의 주인공은 빨간 장미에서 '뼈다귀 해장국'으로 전격 교체되고 말았다.

이유는 딴거 없다. 직장인에게 수요일은 깔딱 고개다. 무얼 해도 어리바리, 마냥 신기한 신입 딱지를 떼고 나면 직장 생활이란 일주일을 주기로 돌아가는 '신체 혹사와 그에 따른 심리 변화의 무한 반복 루프'임을 깨닫게 된다. 지금도 SNS에 떠다니는 '요일별 직장인의 표정 변화' 같은 '웃픈' 에피소드에서 보듯 수요일은 육체+정신적 피로의 합이 최고조에 달하는 날이다. 특히나 일이 몰려 하루를 일주일처럼 일하는 와중에 문득 오늘이 수요일이라는 사실, 즉 일주일의 절반밖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면 몰려오는 그 무시무시한 허탈감이라니….

실제로 훨씬 피로도가 더할 목요일은 '하루만 더 버티면 금요일'이라는 기대 덕에 어떻게든 넘어가고, 대망의 금요일은 일분 일초라도 주말을 연장하고 싶은 마음에 퇴근 시간을 앞당기고자 초인적 힘이 솟아나기도 한다. 그러나 이놈의 수요일, 이 잔혹한 요일은 자비가 없다. 그런데 이 괴로운 수요일에 비마저 내려 버리면… 아아… 이런 날은 그저 대낮부터 술을 부르는 뼈다귀 해장국집이 북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침부터 내린 비로 이미 곳곳에 웅덩이가 생긴 골목을 지나 감색, 회색, 검정 일색인 우중충한 양복쟁이들로 가득한 식당에 들어선다. 환기가 잘 안 되는 실내는 돼지 등뼈를 끓여내는 비릿한 훈기와 젖은 사람들이 내뿜는 열기로 후덥지근하다. 쉴 새 없이 돌아가는 벽걸이 선풍기 밑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이왕이면 일행과 널찍한 전골냄비에 감자탕을 끓여가며 한잔 기울이고 싶지만, 점심 시간의 자체 연장이 불가능한 말단 직원들은 눈치껏 인당 하나씩 뚝배기에 미리 끓여 나오는 뼈다귀 해장국을 주문한다.

어차피 감자탕이나 뼈다귀 해장국이나 구성은 동일하다. 반으로 가른 감자가 한두덩이, 시래기와 함께 끓여낸 돼지 등뼈가 뚝배기 위로 삐죽 고개를 내밀고 있다. 여기에 잡냄새를 잡는 깻잎을 넣고 들깻가루를 잔뜩 뿌린 탕국 한 그릇과 밥 한 공기가 각자 앞에 놓인다. 이 지점에서 일행은 '소주를 딱 한 잔만 마셔볼까…' 눈치를 살피기 마련. '그래, 딱 한 잔만.' 결국 한 병을 시켜 각 일 잔으로 구성을 맞춘 후 돼지 등뼈와의 전투에 돌입한다.

먹을 수 있는 살점보다 발라내는 뼈의 양이 압도적으로 많은 이 돼지 등뼈탕은 언뜻 보기에도 체면 따지는 양반 '나으리'들이 즐겼을 만한, 유서 깊은 음식은 아니다. 과거 감자탕 골목이 형성됐던 영등포나 그 원조로 알려진 식당이 자리했던 돈암동 일대 역시 24시간 돌아가는 공장 노동자들의 동네이자 하루살이 참 빡빡한 서민들의 동네였으니.

소든 돼지든 살코기는 귀한 것이었다. 내장이나 등뼈 따위의 다루기 고약한 부위들을 알뜰살뜰 우려먹고 발라먹는 음식은 서민들의 보양식일 수밖에 없다. 등짝이 무너져라 짐을 나르고 어깨가 빠지도록 기계와 씨름하거나 종일 서서 사람들을 상대하느라 진이 빠지는, 매일매일 전투와 같은 삶을 사는 이들. 그런 이들이 일하는 고된 일터에서는 가끔이나마 스태미너를 장전시켜줄 동물성 단백질의 섭취가 절실해진다. 넥타이 매고 다니는 직장인들도 별수 없다. 며칠째 새벽별과 친구 하는 야근이 계속되거나 아무리 쳐내도 일이 쌓이는 마감 기간에는 채소가 가득한 건강 밥상보다는 뭐든 씹고 뜯는 고기를 먹으며 버텨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뼈다귀 해장국이라는 음식은 아마도 그렇게 생겨났을 것이다. 먹음직한 살코기를 발라내고 비계에 껍질에 오장육부를 다 내주고 간신히 남은 돼지 등뼈조차 아쉬워서, 그 뼈대 사이 숨은 살점과 등골마저 놓칠 수 없어서 만만한 시래기와 함께 푹푹 끓여낸, 서민들의 육식 본능을 충족시키기 위한 고안이었지 않을까. 그러니까 말 그대로 등골이 빠지도록 일한 사람들을 위한 음식이 이놈이다.

그러므로 뼈다귀 해장국을 먹을 땐 뼈 속 깊이 숨은 살점 한 점까지 남김없이 발라먹는 게 예의다. 뼈와 뼈가 굳건히 맞물린 등뼈를 양손으로 우걱 해체하고 뼈 속 골짜기마다 숨은 살점과 연두부처럼 부드러운 등골을 섭취하여 혹사당한 나의 몸을 보할 일이다. 포슬포슬 잘 익은 감자를 수저로 으깨 걸쭉해진 국물과 함께 밥 한 공기를 마저 비우면, 등골까지 뽑아 먹힌 것이 돼지인지 나인지 헛갈리는 비 오는 수요일의 의식이 완성된다. 이제 우리는, 빨간 장미의 낭만보다는 제대로 끓여낸 뼈다귀 해장국의 국물이 훨씬 고마운 성인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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