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프로 학생 20명 끌어올린 '세월호 義人' 외로운 癌투병

엄보운 기자 2015. 6. 11.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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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상 등 정부말만 믿었는데.." 특별법 政爭에 병만 깊어져

작년 4월 16일 오전 9시 30분쯤 전남 진도 맹골수도에서 세월호가 중심을 잃고 급격히 왼쪽으로 기울었을 때 김홍경(59)씨는 꼭대기 층(5층) 오른쪽 끝방에 있었다. 승객 가운데 가장 빨리 탈출할 수 있는 위치였다. 하지만 김씨는 바로 탈출하지 않았다. 아래층(3·4층) 왼쪽 객실에서 "살려 달라" 소리치는 단원고 학생들의 아우성이 그의 발을 잡았다.

김씨는 객실에서 구명조끼 수십 벌을 찾아 아이들에게 던져줬다. 이어 커튼을 찢어 묶고 소방 호스를 풀어 만든 '로프'로 학생 20여명을 끌어올렸다. 이 일로 그는 세월호 참사에서 보기 드문 '의인(義人)' 중 한 명으로 꼽혔다.

1년2개월이 지난 지금 김씨는 세상에서 잊혔다. 작년 12월 위암 4기 판정을 받고 항암 치료를 받고 있는 김씨를 지난 3일 경기 고양시 국립암센터에서 만났다. 세월호 참사 후 몇 달간 불면증에 시달리다 작년 말 위암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

김씨는 뭘 바라고 아이들을 구한 건 아니었다고 했다. 하지만 김씨는 "세월호 참사 이후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아이들이 불쌍해서 유족들이 충분히 자기주장을 펼 수 있도록 기다렸는데, 모든 게 나의 잘못된 생각이었다"며 "나중에 산 사람들도 생각해 주겠거니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고 했다. 세월호 참사가 정쟁에 휘말리면서 생존자들 삶은 뒷전으로 밀렸다는 것이다.

김씨는 배관 설비 기술자다. 참사 당일 일을 찾아 스타렉스 차량에 장비를 잔뜩 싣고 제주도로 가기 위해 세월호에 올랐다. 목숨은 건졌지만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승합차와 장비들을 잃었다. 정부는 치료비로 1500만원의 빚까지 진 그에게 물적 배상금 530만원을 제시했다. 그마저도 아직 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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