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 걸었는데.. 보상 푸대접.. 목소리 컸어야 했나 후회된다"

엄보운 기자 입력 2015. 6. 11. 03:00 수정 2015. 6. 11.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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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세월호 義人'.. 癌 투병 중인 김홍경씨] "가라앉은 車·장비 보상금, 내겐 생계 달린 일이었지만 유가족 먼저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끝에 몰리고 보니.. 내가 구한 애들 잘 지내는지 죽기 전에 얼굴이나 봤으면"

3일 경기 고양시 국립암센터에서 만난 김홍경씨는 1년 2개월 전 전남 진도 팽목항에서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선원들도 버리고 떠난 세월호에서 단원고 학생들을 로프로 끌어올려 구해낸 김씨는 지금 팔조차 들어 올릴 기력이 없다고 했다. 작년 12월 위암 4기 판정을 받고 화학치료를 받느라 머리카락은 다 빠졌고, 호남형이란 소릴 듣던 얼굴은 뼈와 가죽이 붙어버렸다.

김씨는 기자를 보자 "세월호 사고 때 뭘 바라고 아이들을 구한 건 아니었다"고 했다. 그는 "나는 의인감은 아니다"고 했지만, 생의 끝자락에 선 순간에도 한때 세상이 의인이라 불렀던 자신이 구차해지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김씨는 지금 후회스럽다고 했다. 일거리를 찾아 스타렉스 차량에 배관 설비 장비를 싣고 제주도로 가기 위해 세월호에 올랐다가 사고를 만났을 때조차 해보지 않았던 후회다.

그는 전남 진도 맹골수도에서 배가 갑자기 균형을 잃고 왼쪽으로 걷잡을 수 없이 기울었을 때 다행히 탈출에 유리한 오른쪽 꼭대기 층(5층)에 있었다. 하지만 왼쪽 아래층에 있는 바람에 오도 가도 못하게 된 단원고 학생 수십 명을 끌어올리기 위해 배 안에 끝까지 남았다. 아이들을 구했다는 안도감에 그걸로 만족했다. 김씨는 사고 직후 세월호를 버리고 먼저 달아난 선원들과 대비돼 언론에서 의인으로 찬사를 받았다.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승합차와 설비 장비를 바닷속에 잃어버렸지만, 김씨는 "단원고 학생들이 먼저이고 그 가족들이 먼저라고 생각해 정부를 믿고 기다렸다"고 했다. 작년 말 위암 4기 판정을 받아 투병생활까지 하게 돼 쪼들렸지만 "그래도 정부를 믿었다"고 했다.

그렇지만 그 와중에도 김씨는 세월호 참사 후 정신적으로 힘들었다고 했다. 더 구하지 못한 아이들이 머릿속에 떠올라서라는 것이다. "아직 아래에 남아 있는 아이들이 나를 바라보며 구해달라고 하는데 시간이 없어 더 끌어올리지 못하던 그 순간이 영상처럼 떠올랐어요." 자연적으로 치유되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아 병원에도 다녔다고 했다.

김씨는 "정부는 처음에 '피해 본 건 무엇이든 다 보상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말뿐이었다"고 했다. 중고차 값에 블랙박스, 내비게이션 값만 더해 배상금으로 530만원만 주겠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김씨는 "'차 안에 갖가지 공구며 근로자들에게 줄 임금까지 있었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따졌지만, 해양수산부는 '그걸 보상받으려면 구입 영수증과 함께 차 안에 그 물건이 있었다는 사진이나 동영상을 제출하라'고 하더라"고 했다. 김씨는 "어떻게든 영수증을 찾아 제출해봤지만 '증거 불충분'이란 말과 함께 모두 인정받지 못했다"고 했다.

배상 금액에 동의하지 않으면 '재심을 신청하라'는 안내를 받긴 했다. 하지만 그 사이 병원비로 쌓인 빚이 1500만원이었다. 게다가 해수부는 "530만원에 합의하지 않을 경우 다른 보상금도 줄 수 없다"고 나왔다. 형편이 어려운 김씨가 인적피해보상금의 일부라도 먼저 받으려 하니, 그러려면 차량 피해 금액 등이 먼저 확정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김씨는 해수부가 제시한 530만원안(案)에 "도리 없이 서명하고 말았다"고 했다. 하지만 이 돈도 아직 김씨 수중에 들어오진 않았다.

김씨에 따르면 세월호 사고 이후 1년 2개월간 김씨를 담당한 공무원은 7명이다. 어떨 땐 이름도 밝히지 않고 "오늘부터 제가 맡게 됐다"고 전화하고 아무 연락이 없었다고 했다. 김씨가 먼저 해수부 등에 연락해도 "잠깐만 기다리라"며 전화를 5~6번 돌리다가 "여야가 세월호 특별법을 타결짓지 않으면 정부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답만 되풀이했다고 한다.

그는 "금전 보상이 적다고 해서 서운해하는 건 아니다"라고 몇 번이나 말했다. 김씨는 세월호 참사 직후 의인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땐 건설인협회에서 주겠다는 상도 마다했다. "아이들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간 참사 때 한 일로 상을 받는 게 무슨 소용이냐"고 했다. 그런 그도 이젠 "세상의 끝에 내몰리니 한국에선 목소리가 커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후회가 된다"고 했다. 그의 아내는 "못 들은 걸로 해달라"면서도 "남편이 죽기 전에 아이들을 꼭 보고 싶다고 하는데 사고 뒤 단원고나 학생가족회 등으로부터 연락 한번 받아보지 못한 건 못내 서운하다"고 했다. 대한민국은 의인을 이대로 내버려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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