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역기피자 신상공개 '구멍' 있다

2015. 6. 10.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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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질병이나 수감 등 이유 ‘실익’ 없는 경우 제외… 고위층 빠져나갈 가능성

오는 7월부터 병역기피자들의 신상을 인터넷에 공개하는 제도가 실시된다. 지난해 말 국회는 병역법 개정안을 통과시켰고, 병무청도 올 5월 19일에 병역법 시행령 개정안을 확정했다.

시행령 개정안에 따르면 병역의무기피공개심의위원회는 심사를 거쳐 징병검사나 입영을 피한 사람들의 이름, 나이, 주소, 기피일자, 기피요지 및 병역법 위반 내용을 병무청 홈페이지 등에 공개한다.

병무청은 “개정된 병역법의 적용을 받는 사람은 올해 7월 1일부터 발생하는 병역기피자들이고, 기존 기피자들은 대상이 아니다. 6개월간 심의기간이 있기 때문에 일러도 내년 1월이나 돼야 실제 신상공개가 이뤄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병역기피자의 신상공개가 논의된 배경은 때만 되면 나오는 고위 공직자와 재벌가 등 소위 ‘사회 지도층’ 인사들, 인기 예·체능인의 병역기피 의혹 때문이다. 하지만 징병제도 연구자이자 양심적 병역거부자인 백승덕씨는 “이승만 정부 때부터 병역기피 단속은 특권층보다 사회 취약계층에 집중돼 있었다. 10여년 전 대규모 병역비리 사건에서도 결국 예·체능인 이외에 진짜 특권층들의 병역비리에 대해서는 거의 잡아낸 것이 없었다”고 말했다.

고위공직자 등 면제 사유 76%가 질병

현재 시행령 개정안에도 허점이 있다는 지적이 있다. 개정안에 따르면 병역을 기피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상공개 대상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있다. 질병이나 수감 등의 이유가 있거나, 신상을 공개해도 ‘실익’이 없는 경우다. 고위층들이 빠져나갈 구멍이 생긴 셈이다.

지난해 1월 병무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박근혜 정부의 장·차관급 공직자나 국회의원 중 병역을 면제받은 사유의 75.9%가 질병이었다. 논란이 진행 중인 황교안 국무총리 후보자도 만성 다마진이라는 질병을 이유로 군대 면제를 받았다.

심사과정에서 신상공개 대상자들이 병역의무 이행을 시작하거나, 가수 유승준처럼 국적을 포기하는 경우 신상공개의 ‘실익’이 없는 것으로 판단받을 가능성이 있다. 국적 포기 역시 고위층의 병역면제 수단이었다. 2013년에는 유민봉 당시 청와대 국정기획수석 등 박근혜 정부의 고위 공직자 자녀 16명이 미국 또는 캐나다 국적을 취득해 병역을 면제받은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평화운동가들 사이에서는 자진해서 신상을 공개하는 종교적·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이 조항의 대상이 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러나 병무청은 “소위 양심적 병역거부자, 집총거부자로 불리는 사람들도 일단은 신상공개 대상에 오른다. 심사과정에서 제외되거나 군 면제 사유가 발생하면 그때 빠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병역기피자 신상공개제도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바로 ‘기피 요지’다. 병무청은 “기피 요지의 경우 어떤 병역을 기피했는지, 징병검사인지 입영인지 여부를 간단히 적는 것이다. 집총거부 등 병역기피자들의 기피 사유까지 적을 것인지 하는 세부적인 내용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질병에 걸리지도 않았고, 국적을 세탁하기도 어려운 병역기피자들이 신상공개를 피하려면 심의위원회에 “병역의무를 이행하기 어려운 부득이한 사유”를 설명해 “공개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인정을 받아내야” 한다. 생계가 곤란하지만 병역면제를 받지 못한 사람이나, 성소수자여서 군대에 가기를 꺼리는 사람들 등이 이에 해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백승덕씨는 “불가피한 병역기피자들이 심의위원회에 자신의 처지를 소명하는 것과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수사과정에서 겪는 일이 비슷할 것으로 보인다. 나 역시 수사과정에서 왜 내가 병역거부를 할 수밖에 없는지 반복해서 설명해야 했고, 공식 수사시간이 아닐 때에는 경찰이나 검찰의 설교를 들어야만 했다. 또한 남에게 밝히고 싶지 않은 자신의 현 상황을 설명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에 인권침해적인 요소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병역기피자의 신상공개가 제도화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하지만 신상공개 행위 자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난해 11월 국회 국방위에 출석한 백승주 국방부 차관은 “(병역기피자의) 신상이 공개되면 자기뿐만 아니라 자식과 가족이 망신을 당할 것이다. 병역의무를 다하도록 하는 경각심을 주고 그런 분위기를 만드는 이유”라고 설명한 바 있다. 이런 ‘망신주기’가 과거 유신시절에도 있었다.

1974년 7월, 유신정권의 공무원들은 충남 홍성군에 사는 병역기피자의 집 담벼락에 붉은 페인트로 ‘기피자의 집’이라고 적었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병역기피자의 가족들은 수치심에 한동안 외출도 자유롭게 하지 못했다.

동아일보,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헌법 정신에 어긋난다’ 일부 의견도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당시의 신상공개 행위는 유신정권이 군대식 사회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한 교수의 저서 <유신: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시대>에 따르면, 유신정권은 병역기피자를 “유신 과업과 국민 총화를 저해하는 비국민적 행위자”로 규정하고, 법을 고쳐 병역기피자에게 3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게 했다. 1974년에는 한 달 반에 걸쳐 1만2584개 업소를 뒤져 병역기피자 539명을 적발하기도 했다. 유신정권은 지방병무청과 지방행정단위까지 병역기피자 색출 대상자를 지정하고, 과업을 제대로 하지 못한 직원을 엄중 문책했다. ‘기피자의 집’ 사건은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발생한 것이다.

신상공개 자체가 헌법 정신에 어긋난다는 의견도 있다. 병역법 사건을 많이 처리해온 ㄱ변호사는 “모든 국민은 원칙적으로 사생활의 비밀을 침해받지 않아야 한다는 게 헌법 정신이다. 청소년 성매수자에서 시작된 신상공개가 아청법(아동 및 청소년의 성 보호에 관한 법률)을 넘어 병역법까지 확장되고 있다. 이런 식이라면 병역법 위반과 다른 형법을 위반한 게 뭐가 다르냐, 병역기피자는 신상이 공개되는데 도둑이나 강도의 신상은 왜 공개해선 안 되느냐는 식의 논리가 나올 것이 우려된다”고 말했다.

신상공개 제도는 2001년 국무총리 산하기관에서 청소년 성매수자의 이름, 나이, 주소 등 신상을 관보에 게재하면서 시작됐다. 당사자 중 한 명이 이에 대해 위헌 심판을 제청했지만 헌재는 합헌 결정을 내렸다. 2013년에도 신상공개 제도가 포함된 아청법에 대한 위헌 소송이 제기됐지만, 합헌 7, 위헌 2로 합헌 결정이 났다.

아청법 합헌 직후인 2013년 11월에는 성범죄자의 자녀가 신상공개 제도로 인한 고통으로 자살하는 일이 있었다. 청소년 성범죄자의 아들인 고등학교 2학년생 박씨는 아버지에 대해 “잠깐 무너지시고서 매일 새벽부터 열심히 일하시는 거 존경스럽다”는 유서를 남긴 뒤 원룸에서 홀로 번개탄을 피우고 잠이 들었다. 아청법이 강화되면서 주택뿐만 아니라 학원, 주민자치센터에도 박씨 부친의 신상정보가 포함된 우편물이 배달됐다. 이사를 가도 건물 주인이 “우리 건물에 성범죄자가 산다고 들었다”며 나갈 것을 종용하기도 했다.

ㄱ변호사는 “나도 우리 집 인근에 성범죄자가 산다는 편지를 받은 적이 있다. 누구처럼 능력이 있어서 한국을 떠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한국을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은 신상공개가 시작되면 죽기 전까지 계속 고통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백승덕씨는 “최근 인터넷 극우파가 현실에 자주 나타나고 있다. 병역기피자들의 주소까지 밝히는 지금 제도는 집단적인 위협이나 폭력을 부추길 수 있다”고 우려했다.

한 평화운동가는 “고위층의 병역비리를 정말 근절하고 싶다면, 병역 미필자들이 해외에 장기체류하면서 국적을 세탁하지 못하게 막아야 하는데 이는 불가능하다. 군 전역자들이 겪는 박탈감을 병역기피자 망신주기와 같은 병역 포퓰리즘으로 풀 게 아니라, 전역자를 위한 저리대출 등 경제적 지원이나 병영생활 개선 등으로 풀어주는 게 더 적절하다”고 말했다.

<백철 기자 pudmak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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