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혐오증? 망상도 병이란다

김형민 2015. 6. 8.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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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라는 이름을 들어봤을 거다. 개화사상가·교육자·종교운동가·계몽운동가 등등 여러 명함으로 남아 있는 인물이지만 일제에 협력한 탓에 친일파로 낙인찍혀 있기도 하지. 그는 '언젠가는' 조선이 독립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당시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고 있었어. 조선인이 그렇게 살아야 하는 이유 중의 하나로 그가 들었던 것이 극심한 지역 갈등이었다.

'안창호가 이끄는 서북파가 기호파를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한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조선인이 살고 있는 모든 곳에서 이 두 파벌은 도저히 용해할 수 없는 적대감을 지니고 있다.' 서북파와 기호파. 서북은 우리나라의 서북쪽, 즉 평안도 지역을 일컫는 소리고, 기호란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를 에둘러 표현하는 말이란다. 윤치호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 그런 증오심을 고취하고 있다고 비난하는데 그 또한 기호파(?)이기 때문에 그랬겠지. 어쨌든 서울 중심의 기호파와 평안도 사람 간에 극심한 지역 갈등이 있었던 건 사실이야.

갈등의 배경에는 수백 년 지속돼온 조선 왕조의 평안도 차별이 도사리고 있어. '하늘이 한 시대의 인재를 내는 것은 한 세상의 쓰임에 넉넉하게 하기 위함인데, 어진 인재의 출생이 어찌 남방과 북방의 다름이 있겠으며, 참마음을 지닌 하늘이 어찌 지역을 가릴 리 있겠는가. 우리나라에서 인재를 등용하는 길은 그 범위가 넓지 않아서 서북 지방의 인재는 수용하지 않고 있다(인조 3년 10월)'라고 국왕이 한탄할 정도면 말 다한 거지. 캘리포니아의 절반도 안 되는 땅덩이에서 사람이 다르면 얼마나 다르며 경상도에서 무더기로 나는 인재(?)가 평안도라고 없을 리 있겠어.

국왕이 이렇게 얘기한 뒤로도 별로 바뀐 건 없었어. 1811년 평안도에서 반란을 일으킨 홍경래의 격문을 보면 평안도 차별에 대한 한(恨)의 불덩이가 뚝뚝 떨어진다. '조정에서 서토(평안도)를 버림이 분토(糞土:똥덩어리 땅)와 다름없다. 심지어 권문의 노비들도 서토 사람을 보면 반드시 평안도 놈(平漢)이라 일컫는다.' 그런 사연이 있었기에 평안도 사람들은 개항 이후 세상의 변화를 빠르게 받아들였고 마침내 서울에 맞먹는 세력(?)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아빠가 하고 싶은 얘기는 서북파와 기호파가 왜 생겼나 하는 문제가 아니야. 아빠가 네게 들려주고 싶은 건 같은 나라 사람이면서도 말투가 좀 다르고 특정한 도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그 지역 출신들을 갈라치기하고 몰아댔던 참담한 역사야. 친일파 윤치호가 '그것 하나로도 조선은 독립할 자격이 없다'라고 비웃었던 역사 말이야. 남북이 분단되면서 조선 왕조 내내 일종의 왕따였던 '평안도 놈들(平漢)'은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대한민국에는 또 하나의 희생양이 등장했지. 전라도.

역시 무슨 이유에서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전라도 차별은 꽤 유구한 세월 자행돼 왔어. 일제강점기 이래 가장 수탈을 많이 받은 지역이고, 산업화 이후 먹고살 일을 찾아 적잖은 인구가 타향살이를 했던 호남 사람은 터무니없지만 강력한 편견에 시달려야 했지. 이를테면 이런 거. '거짓말 잘하고 음험하고 앞에서는 간이라도 빼줄 것 같다가 결국에는 뒤통수를 친다.' 부산에서 자란 아빠는 골백번 들은 이야기야.

일본인 수법 그대로 전라도를 깔아뭉개다

그런데 이 말은 일제강점기 내내 일본인이 '조센징'을 두고 하던 얘기와 그린 듯이 똑같아. 깍쟁이 서울내기건 화끈한 경상도 남자건 일본인 보기에는 '잘해봐야 조센징에 언제 뒤통수칠지 모르는' 놈들일 뿐이었다는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은 일본인에게 당한 그 수법 그대로, 그리고 조선 시대의 악습처럼 우리 안에 홍경래가 말한 '서토(평안도)'를 하나 더 만들었고, 노비들까지도 평안도 사람들을 '평한'이라 불렀다는 꼭 그대로 전라도 사람들을 깔아뭉갰지.

언젠가 아빠는 수십 년 된 홍어집을 촬영한 적이 있어. 홍어 요리는 전라도 특산 요리이고 당연히 주인 할머니는 토종 남도 사투리를 쓰는 전라도 분이었지. '옛날에 나가 어렸을 때 이 홍어를 잡아와가꼬 장독대에 넣어놨단 말이시. 근디 할아부지가 잡숴야 나가 묵을 거 아닝가. 너무 묵고 싶어서 혀로 핥아묵었당께. 요건 칠레산이여. 주둥이가 뾰쪽하고 살이 물러. 이거는 국산인디 연평도산이여. 흑산도 아니여.' 청산유수로 설명하시는 통에 넋을 잃고 촬영만 하고 있는데 할머니의 다음 말씀이 쨍하고 아빠 머리를 울렸단다. '나는 거짓말 안 한당께로. 나가 전라도 사람이지만.'

아빠는 그만 카메라를 내리고 말았어. 당연히 방송에선 쓰지 못할 얘기이기도 하지만 이 순박하고 후덕하게 생긴 할머니의 말씀에서 빌어먹도록 몹쓸 우리들 속의 악마가 긁어놓은 상처를 봤기 때문이야. 그런데 아빠의 표정을 보더니 할머니가 처음으로 말을 더듬었어. '나… 저… 전라도 사람이지만 거짓말은 안 하는디. 나는 칠레 껀 칠레 꺼라고 허는디.' 그때 아빠는 볼멘소리로 물었어. '할머니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벌써 15년쯤 전의 일이지만 아빠는 그 질문을 후회해. 저 말이 자연스럽게 입에 배기까지 할머니는 얼마나 지독하고도 잔인한 말을 귀에 꽂아야 했을지 짐작하면서 왜 할머니를 추궁하듯이 물어야 했을까. '이 홍어가 국산이라고? 아 역시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구먼'이라거나 '역시 전라도 사람이구먼. 됐어요' 같은 소리를 수백, 수천 번 듣지 않았으면 나올 수 있는 말이었을까. 조정이 평안도를 버림이 '똥덩어리 땅'과 같았다는 홍경래의 분노처럼 한국 사람은 입으로 똥을 내뱉어 한 지역 사람들을 똥 무더기에 빠뜨리고는 지레 자신들의 코를 싸쥐고 일본인들처럼 내뱉었던 거란다. '에이 라도 사람들.'

아빠가 단언하는데 이건 일종의 정신 질환이야. 정신의학 용어로 '망상(妄想)'이란 '병적으로 생긴 잘못된 판단이나 확신'을 뜻하지. 비합리적·비현실적인 내용을 계속 주장하며 외부의 자극이나 제지를 거부한다면 망상증 환자로 의심할 수 있는데, 한국에 만연한 '호남 혐오증'이 비슷한 증상을 보이거든. 아빠는 '정신병도 옮는다'는 말을 듣고 놀란 적이 있어. 이건 무슨 세균을 통해 옮는다는 게 아니라 통제된 공간에서 일방적인 지식만을 주입받거나 공유할 때 망상 체계까지 수용하게 된다는 것이지. 지금도 어느 집안의 밥상머리에서는 '반드시 그 사람들은 뒤통수를 치니까 명심해라'며 '망상'이 무슨 '삶의 지혜'처럼 네 또래에게 옮겨지고 있을 거야.

친일파 윤치호는 주위의 놀람을 무릅쓰고 평안도 출신 사위를 얻어. 그 역시 '서북 사람들이 독립 전에 기호파의 씨를 말리려고 한다더라'는 '카더라 방송', 즉 망상의 속삭임에 휩쓸렸지만 그래도 편견을 무릅쓰고 평안도 사위를 수용했지. '이 결혼이 서울 명문가에서 평양 출신을 사위로 맞는 첫 번째 사례이므로, 난 조롱과 비난의 표적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현명했다는 것을 시간이 증명해줄 것이다.' 비록 친일파로 비난할망정 아빠는 이 지점에서만은 윤치호에게 박수를 보낸다. 그가 지역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는 조선은 독립의 자격이 없다고 혹평했던 것처럼, 독립한 지 70년 된 대한민국이 특정 지역을 폄하하고 멸시하는 버릇을 버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야만을 벗어나지 못할 거라고 감히 얘기하면서.

김형민 (SBS CNBC 프로듀서) /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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