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권분립 훼손하는 시행령]박근혜 정부 '행정입법' 만능주의

구혜영 기자 2015. 6. 5.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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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지난달 11일 세월호특별법 시행령을 공포했다. 시행령은 그동안 4·16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가 제기했던 문제점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특조위 기획조정실장과 조사1과장 등 핵심 직책을 공무원이 맡도록 했다. 조사 대상인 정부가 거꾸로 조사 주체를 맡겠다는 뜻이다. 특조위 인력도 당초 120명에서 90명으로 축소했다. 유기준 해양수산부 장관이 특별법 공포일(올해 1월)이 특조위 활동 개시일이라고 한 것도 논란이다. 특조위 활동 기간은 최대 1년6개월이다. 특조위 활동개시 시점을 특별법 공포일로 해도 내년 10월 예정된 세월호 선체인양 작업 결과가 반영될지 불투명하다. 하물며 시점이 앞당겨지면 진상이 제대로 밝혀질 리 없다. 시행령 폐지 요구가 거세지자 결국 여야는 농해수위에 시행령 점검소위를 두고 독소조항을 재논의하기로 했다. 세월호특별법 시행령은 법 제정 의미를 퇴색시키고 심지어 모법을 농락해온 시행령의 민낯을 드러냈다. 개정 국회법, 입법부와 행정부 관계, 민주주의 문제 등 권력분립에 대한 근본 질문까지 던지고 있다.

▲ 부대사업 확대 의료법 시행규칙 ‘학교 옆 호텔 허용’ 장관 훈령 등 “민영화·규제 완화의 선발대” ‘경제살리기’ 명목에 복지 후퇴

▲ 대선 공약 파기한 시행령도 많아 박 대통령 거부권 시사 발언에 “국회와 싸우라고 준 권한 아니다” 전문가들 비판 목소리

세월호특별법 시행령은 현재 개정 국회법 논란의 단초가 됐다. 박근혜 대통령은 개정 국회법이 ‘정부 무력화 시도’라며 수용 불가 입장을 밝혔다. 거부권까지 예고한 것이다. 이에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는 ‘(청와대의) 입법권 딴지 걸기’라고 되받았다. 정의화 국회의장이 법안 제출 시기를 예정(6월5일)보다 늦추는 등 양측은 잠시 휴전에 돌입했지만 물밑 기싸움은 지속되고 있다.

과연 개정 국회법이 대통령 최후의 헌법적 권한인 거부권을 행사할 만한 사안일까. 19대 국회가 ‘유난히’ 삼권분립 정신을 훼손한 것일까. 박근혜 정부가 추진한 시행령과 혼란 정국을 바라보는 박 대통령 인식에 모든 결론이 담겨 있다.

■ 법 무력화시키는 박근혜 정부의 시행령

시행령 논란은 사실 새로운 쟁점이 아니다. 입법부가 행정입법을 견제하기 위해 국회법을 개정한 것은 민주화 이후 이번까지 모두 네 차례다. 정도 차이는 있지만 최소한 권력 간 힘의 균형추가 무너졌다는 것에 일찌감치 공감한 것이다. 그런데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원칙을 무시한 행정입법(시행령)이 남발됐다. 다수 시행령이 법률의 위임 범위를 이탈했고 시민의 기본권을 악화시켰다.

박근혜 정부에서 더 심각해졌다는 우려가 있다. 민영화와 규제 완화는 박 대통령이 취임 이후 줄곧 강조한 국가개조론의 두 축이다. 야당과 시민사회는 박근혜 정부가 만든 시행령을 ‘민영화와 규제 완화의 선발대’로 보고 있다. 새정치연합은 지난 1일 ‘상위법 위반 시행령·시행규칙 14개’를 공개했다. 이 중 지난해 정부가 공포한 의료기관의 부대사업 범위를 확대하는 의료법 시행규칙 개정안은 의료민영화의 시발점이라는 의혹을 받았다.

정부는 개정안을 통해 의료기관이 외국인 환자 유치와 여행업, 목욕장업, 수영장업, 체력단련장업 등 다양한 영리사업을 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야당과 시민사회는 “의료법인이 의료행위에 집중하고 제한된 범위에서만 부대사업을 할 수 있도록 정한 의료법을 무력화시키는 것”이라고 반발했다. 곧바로 의료민영화 공방이 시작됐다. 보건복지부와 여당은 “보건의료의 세계화와 산업화는 공공의료 발전과 상충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폈다. 반면 야당은 “이 규칙은 의료법상 위임 입법 일탈에 해당되고, 적용하더라도 의료기관 이용자와 종사자들의 편의를 위한 목적으로만 운용돼야 한다”고 반박했다. 이 문제로 야당이 법안 심사를 거부하는 등 국회는 ‘개점휴업’ 상태가 지속됐다.

지난 4월 입법예고 후 현재 법제처가 검토 중인 경제자유구역법 시행령 개정안도 규제 완화 시비를 불렀다. 정부가 기존 시행령에 규정된 카지노 사전심사제를 재개정해 공모제로 바꾸려 한다는 것이다. 야당은 “심사제를 뼈대로 한 기존 시행령도 법률 근거가 미약하다”며 “이를 완화해 공모제 도입을 시도하는 것은 위법”이라고 공세를 폈다.

지난해 8월 제정된 학교 인근에 유흥시설 없는 호텔 설립을 허용하는 교육부 장관 훈령도 규제 완화 성격의 행정입법이다. 기존 학교보건법은 호텔을 청소년 유해시설로 분류해 학교 출입문으로부터 직선거리 50m까지인 ‘절대정화구역’에 신축을 금지했다. 직선거리 50~200m인 ‘상대정화구역’에 호텔을 지을 때도 교육청 산하 학교환경위생정화위원회의 승인을 받도록 했다. 교육부는 급기야 장관 훈령을 제정, 학교정화위원회 심의에 앞서 민원인에게 설명 기회를 주고, 심의 후 결정사유를 통보하는 등 사업자에게 특혜를 제공했다. 안전행정부(현 행정자치부)는 ‘지방규제개선위원회’를 통해 부당하게 사업계획 승인을 지연하는 지자체에 시정을 권고하고, 문화체육관광부는 관광호텔의 학교정화구역 내 설치가 가능하도록 관광진흥법 개정을 추진했다. 국회 교육위원회 관계자는 “교육부는 상위법인 학교보건법 시행령에도 위임사항이 없는 내용을 장관 훈령으로 제정했다”며 위법을 문제삼았다.

경제살리기라는 명목하에 복지 후퇴, 공약 파기를 초래한 시행령이 많다는 점도 특징이다. 누리과정(3~5세 무상보육) 관련법은 박근혜 정부의 대표적인 ‘위법적’ 행정입법이다. 박 대통령은 지난 대선 당시 ‘0~5세 보육 및 유아교육 국가완전책임제 실현’을 공약했다. 하지만 정부는 누리과정 예산 책임을 지역교육청에 떠넘기고, 관련 예산을 우선 편성하지 않으면 다음해 예산을 삭감하겠다는 취지의 시행령 개정을 추진 중이다. 국회 교육위 소속 야당 의원들은 “정부 방침은 상위법인 지방재정법에도 없는 규정”이라고 반발했다. 여야는 지난해 말부터 누리과정 예산 책임주체를 놓고 해를 넘기면서까지 공방을 벌였다. 지난달 여야가 예산 해결에 필요한 지방채 발행을 규정한 지방재정법 개정안에 가까스로 합의했지만 일부 지역교육청은 지방채 발행을 거부하는 등 누리과정 대란은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 대통령의 ‘이상한’ 거부권

박 대통령이 시행령과 국회법의 충돌을 바라보는 인식(거부권 예고)도 상황 악화를 부추기고 있다. 국회 관계자는 “거부권 시사 발언은 대통령이 헌법을 모르거나, 알고도 (자신의) 이해관계에 더 충실하다는 것을 방증한다”고 비판했다. 박 대통령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수단을 쓰지 않고 곧바로 ‘최후의’ 카드(거부권)를 꺼내들었다.

개정 국회법에는 행정부가 입법부의 시행령 수정 요구를 지키지 않았을 경우 별도 벌칙 조항이 없다. 강제성이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개정 국회법에 위헌적 요소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하면 될 일이다.

이 때문에 대통령의 압박을 정치적 맥락에서 봐야 한다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다. 새정치연합 추미애 최고위원은 “대통령들은 임기 후반 증후군을 앓는다. 레임덕을 차단하기 위해 국회 무력화를 시도하거나 국회 불신을 과장하기도 한다. 박 대통령은 좀 더 심각해 보인다”고 했다. 박 대통령은 지난 1일 개정 국회법에 대한 거부권을 예고하면서 ‘국회 정쟁으로 민생법안이 발목 잡혔다’며 무능 국회 프레임을 부각했다.

심지어 “국회가 행정부의 집행권을 무력화시켰다”는 발언에선 국회를 ‘통법부’로 간주했던 유신의 잔영이 어른거린다는 평가도 들린다.

정치권 일각에서 나오는 “온갖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행정부가 견제나 통제를 받지 않는 초헌법적 기관으로 남아도 좋다는 것이냐”는 목소리가 단적인 예다. 서울대 박원호 교수는 “거부권은 대통령의 독립성을 침해하거나 의회 반대로 공약 집행이 불가능할 경우에 부여되는 등 상당히 제한적이다. 입법부와 싸우라고 준 권한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 행정입법이란

행정부가 법률을 시행하기 위해 필요한 상세 세부규정을 담은 것이다. 위임입법, 종속입법, 준입법이라고도 한다. 구속력 여부에 따라 국민의 권리와 의무에 관계되는 법규명령, 행정조직 내부만을 규율하는 행정명령(행정규칙)으로 구분된다. 법규명령은 권한 주체에 따라 대통령령, 총리령, 부령 등으로 구분된다. 보통 대통령령은 시행령, 총리령과 부령은 시행규칙으로 불린다.

현행 헌법은 제75조와 제95조에 행정입법의 근거 규정을 두었다. 주무부서 발의로 차관회의를 거쳐 국무회의 심의 후 총리, 관계 국무위원 검토를 받아 대통령이 공포한다.

<구혜영 기자 kooh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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