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슴없이 "김치녀".. 여성혐오 전염병 번지듯

양승준 입력 2015. 5. 28. 04:45 수정 2015. 5. 28.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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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통로쪽 앉았다고 페북서 망신

군 가산점제 폐지도 "여대 탓" 몰아

"페미니즘이 IS보다 더 위험하다"

도 넘은 모욕ㆍ멸시ㆍ조롱 비일비재

유희열

김태훈

한 여성이 버스의 2인석 의자의 통로 쪽에 앉아 스마트폰을 보고 있다. 그녀 앞에 남성이 서 있다. 이 사진은 지난 24일 '김치녀'(여성을 비하해 가리키는 단어) 페이스북에 올라와 일대 사건으로 비화했다. 김치녀란 아이디를 쓰는 한 네티즌이 '안으로 처들어가라 X년아, 폰 그만 보고. 개노답'이란 글과 사진을 올려 이 여성을 공격했다. 다른 사람이 앉을 수 있게 창가쪽 자리로 들어가야 하는데도 그대로 앉아있는 걸 비난한 것이다.

'김치녀'에는 "직접 찍은 제보자에 의하면 버스에 사람 많은 데 옆에 있는 사람 내리니까 서 있는 사람들 못 앉게 (통로쪽으로) 자리를 옮겼다"고 쓰여있다. '김치녀'들이 좋아하는 상황이라는 설명도 보탰다. '장애우 욕하지 말라고 도덕책에서 배웠음'이란 댓글이 달리고 약 900명이 '좋아요'를 눌렀다. 9만여명이 가입한 '김치녀' 페이스북 페이지 사진 속 여성은 졸지에'개념상실녀'로 '공개 처형'을 당했다. '김치녀' 사이트를 처음 접한 직장인 박민희(33)씨는 "언제 사진 찍혀 김치녀가 될지 모르는 데 어디 무서워 밖에 돌아다니겠느냐"며 황당해했다.

인터넷의 바다에서 여성혐오가 처음 불거졌을 땐 일부의 악성 댓글로 치부했다. 여성을 겨냥한 멸시와 공격이 잦아지자 약자를 겨냥한 루저들의 분출구로 여겼다. 그러나 빈도는 더 잦아지고 목소리는 커졌다. 성차별의 사회적 구조는 유사 이래 오랜 것이지만 이처럼 적대적으로 여성을 공격하고 혐오하는 분위기는 유례가 없다. 어느 사회에나 있을 수 있는 불만과 잘못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정당한 혐오로 포장된다.

여성혐오라는 집단폭력에 이화여대도 멍들었다. '김치녀' 페이스북에는 지난달 '일부 이대생 때문에 이화여대가 남성들로부터 개XX 먹는 이유'라는 제목의 글과 사진이 올라와 파장이 일었다. 군 관련 불만을 이화여대생 탓으로 돌리는 내용이었다. '이화여대와 여성단체들로 인해 군가산점 제도가 폐지됐다'는 글을 캡처한 것과 이화여대생들의 반전?반군 퍼포먼스 사진이 게시됐다. 댓글에는 '군인들 무시하는 X들'이라는 비아냥이 달렸다. 이화여대 총학생회는 "김치녀에 올라온 글이 이화여대 구성원 전체를 모욕했다"며 서울 서대문경찰서에 지난달 30일 수사를 요청하는 진정서를 냈다. 이화여대는 이달 26일 "김치녀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며 "이번 일을 강경하게 대처할 것"이라는 입장을 냈다.

익명성의 뒤에 숨은 극소수의 문제일까. 여성비하의 시선은 대중문화에서 심각한 수준이다. 최근 여성비하 발언 논란으로 '무한도전' 식스맨에서 자진하차하고 사과 기자회견을 한 장동민을 비롯해, 여성을 비하하는 개그, 토크, 노래가 아무렇지도 않게 소비되고 있다. 가수 브로(bro)는 지난해 '그런 남자'란 노래에서 '키가 크고 재벌 2세는 아니지만 연봉 6,000인 남자 / 네가 아무리 우스갯소리를 해도 환하게 웃으며 쿨하게 넘기는 남자 / 약을 먹었니 미쳤다고 너를 만나냐'는 가사로 허영심 많은 '김치녀'를 비꼬았다. 여성비하 논란에도 무명이었던 이 가수의 노래는 지난해 가온차트(공인)에서 1위를 차지했다.

22일 오후 페미니스트 액션 그룹 '페페페'(FeFeFe) 회원들이 서울 상암동 JTBC와 CJ E&M 사옥앞에서 3인조 개그팀 옹달샘(유세윤, 장동민, 유상무) 멤버들의 방송 하차를 요구하는 1인 시위를 진행하고 있다. 서재훈기자 spring@hk.co.kr

최근 몇 달 새 구설수에 오른 연예인들의 성차별적 발언은 헤아릴 수도 없다. 가수 유희열은 지난달 자신의 콘서트에서 "공연을 할 때 힘을 받을 수 있게 앞에 앉은 여자 분들은 다리를 벌려 달라"고 농담을 했다가 공식 홈페이지에 사과의 글을 올렸다. 팝음악칼럼니스트이자 방송인인 김태훈은 한 잡지에 기고한 칼럼에서 여성주의(페미니즘)가 이슬람 과격주의 테러집단(IS)보다 위험하다는 제목의 글을 써 물의를 빚었었다.

균형감각을 갖추어야 마땅한 공인들마저 이 같은 여성비하와 혐오의 발언을 내비친다. 손석희 JTBC 사장은 지난 20일 '뉴스룸'에서 피아니스트 손열음과 인터뷰를 하며 그가 '논어'를 읽는다고 하자 "30대 여성이 논어를 읽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여성분들은 서른 하면 잔치가 끝난다면서" 등의 말을 했다. 황교안 국무총리 내정자는 부산 검사 재직 시절 부산에서 가정폭력이 많은 이유에 대해 "부산 여자들이 드세서"라고 말한 것이 뒤늦게 알려졌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일베와 같은 인터넷 사이트에서 과격하게 여성혐오를 배설하고 있는데 이게 과연 극소수만의 문화인지 대중문화를 비롯해 현 사회 전반에 퍼진 것인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공론화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양승준기자 come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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