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지역구 유리하게”… 뉴타운 재정비 법안만 19건 난립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5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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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질의 전당’ 입법권력]
입법권 남용 브레이크가 없다

“법안 심사를 둘러싸고 정치권이 3년째 ‘무한 도돌이표’ 공방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 환멸을 느낀다.”

3년 넘게 국회에 계류 중인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도시정비법) 개정안 심사 과정을 지켜본 한 국회 관계자는 11일 이같이 토로했다. 국토의 균형발전이나 주거환경의 개선이라는 대계(大計)는 안중에도 없고 지역구 이익만을 지상 목표로 ‘갑(甲)질’을 하고 있는 의원들에 대한 기대를 이젠 접고 싶다는 것.

재개발·재건축 사업 시 필요한 절차나 의무를 규정한 도시정비법은 부동산 경기 침체로 뉴타운 사업에 출구전략이 필요하다는 사회적 합의에 따라 2012년 초에 수정됐다. 2012년 2월 정비사업이 시작된 곳 가운데 일정 기간 사업이 지지부진한 곳에 대해 정비구역 지정을 자동 해제하는 ‘일몰제’를 도입하는 등의 내용이 핵심이다. 이후 국회의원들은 법의 미비점을 보완한다며 줄줄이 개정안을 발의해 19건이 국회 국토교통위원회에 계류돼 있다.

○ “머리 아픈 사안, 나중에 심사하자”

개정안 19건에 대한 논의가 지지부진한 이유는 지역구마다 이해관계가 다르기 때문. 이익의 충돌을 조율해야 할 국토위는 올해 단 한 차례도 법안 심의를 하지 못했다. 국회 관계자는 “2월 국회에서는 4월에 논의하자고 했고 4월 국회가 되자 다음 국회에서 논의하자고 한다”며 “의원들이 ‘머리 아픈 사안’이라며 심사를 계속 미루고 있다”고 전했다. 폭탄 돌리기에 가까운 입법 횡포다.

참다못한 정부가 절충안을 냈다. 법안의 장기 계류로 다른 도시정비법안의 처리가 미뤄지자 대안을 들고 나선 것. 국토부 관계자는 “차라리 여야 간에 통일된 의견이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호소했다. 국토위 소속 한 의원은 “자신의 지역을 대표하는지는 몰라도 다른 지역 주민들의 재산권을 침해하고 있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털어놓았다.

○ “의원 압박에 법안 통과시켰다”

이른바 ‘아이유법’이라고 불리는 국민건강증진법 개정안도 기형적인 법안이다. 이 법안은 당초 청소년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연예인과 운동선수, 그리고 만 24세 이하인 사람은 술 광고모델로 쓸 수 없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지만 보건복지위원회 심사 과정에서 “특정 직군을 제외하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지적이 나왔다.

하지만 복지위는 24세 이하 주류광고 모델 금지 조항을 그대로 둔 채 이 법안을 통과시켰다. 복지위 소속 한 의원은 “법안소위 멤버도 아닌 새누리당 L 의원이 법안소위 회의에 덜컥 찾아와 ‘반드시 통과시켜야 한다’고 주장해 어쩔 수 없이 처리했다”고 털어놨다.

L 의원은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청소년의 대상을 9세에서 24세 이하의 자로 규정한 청소년기본법을 원용한 것”이라며 “위헌 논란을 예상했지만 ‘아이들에게 술 광고까지 시켜야 하느냐’는 공익적 문제 제기 차원에서 추진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현행법상 청소년의 기준은 제각각이다. 청소년보호법은 만 19세 미만으로 정하고 있다.

○ 전문가 “입법권력 부작용 심각한 수준”

법안 심사 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인 탓에 국회 상임위원회 중에서도 ‘갑 중의 갑’으로 불리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폐해에 대한 지적도 많다. 애초 법률안의 위헌성과 다른 법률과의 충돌 여부를 심사해 법률의 합헌성, 체계 정당성 등을 확보하자는 취지였지만 이제는 법률안의 주요 내용까지 손보는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된 것.

법사위 관계자에 따르면 “관례상 법사위원 한 명이라도 이의를 제기하면 해당 법안이 추가 논의를 위해 법사위 2소위원회로 회부된다”며 “사실상 법사위원 개개인에게 거부권이 주어진 셈”이라고 했다. 담뱃갑에 경고 그림을 넣도록 의무화하는 내용의 법안 처리가 지연된 것도 법사위 소속 새누리당 김진태 의원의 반대 탓이었다.

과거 제왕적 대통령제나 막강한 당 총재가 있었던 시절과 비교하면 국회 권력의 크기는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은 ‘대통령 긴급재정경제명령’을 발동해 이른바 ‘금융실명제법’ 전면 시행을 밀어붙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지도부의 ‘오더(지시)’가 힘을 발휘할 수 없는 구조다. 의원 개개인이 사사로운 입맛에 맞춰 입법권을 휘두를 수 있는 토양이 만들어졌다는 얘기다.

전문가들은 입법권력의 남용이 심각한 수준이라고 보고 있다. 박명호 동국대 교수는 “민주화 과정에서 선출직의 권력이 확대됐고 법에 의해 모든 것을 결정하다 보니 입법권력이 커진 것”이라고 분석했다.

배혜림 beh@donga.com·홍정수 기자
#입법권력#법안#재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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