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병주의 '왕으로 산다는 것'] (6) 폐비 윤씨와 어우동의 공통점..성리학 이념 확립 본보기로 여성 처형

2015. 5. 11.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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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폭군의 대명사로 인식되는 연산군(1475~1506년). 연산군이 폭군으로 바뀐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평가받는 것이 생모 윤씨의 비극적인 죽음이다. 성종의 후궁으로 들어와 한때는 시어머니 인수대비와 성종의 총애를 받은 여인. 성종은 왜 그녀에게 사약(賜藥)을 내릴 수밖에 없었을까.

1479년 6월 13일 성종은 윤씨를 왕비 자리에서 퇴출시키는 파격적인 결정을 하고 이를 종묘에 고했다. 세종 시절, 세자빈이 연이어 폐출된 사례는 있었지만 현직 왕비가 폐출된 것은 초유의 사건이었다. 성종이 내린 교서(敎書)에는 윤씨가 폐출된 이유가 구체적으로 명시돼 있다.

“왕비 윤씨는 후궁으로부터 중전의 자리에 올랐으나 내조하는 공은 없고, 도리어 투기하는 마음만 가져 지난 정유년(1473년)에는 몰래 독약을 품고 궁인(宮人)을 해치고자 하다 음모가 분명히 드러났으므로 내가 이를 폐하고자 했다. 그러나 조정 대신들이 함께 청해 개과천선하기를 바랐으며, 나도 폐출하는 것은 큰일이고 허물은 또한 고칠 수 있으리라고 여겨, 감히 결단하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뉘우쳐 고칠 마음은 갖지 아니하고, 덕을 잃음이 더욱 심해 일일이 열거하기가 어렵다. 그러니 결단코 위로는 종묘를 이어 받들고 아래로는 국가에 모범이 될 수가 없으므로, 성화 15년(1479년) 6월 2일 윤씨를 폐해 서인(庶人)으로 삼는다.”

성종의 교서에서는 투기죄와 궁인을 해치려 한 죄, 실덕(失德) 등이 언급됐지만 사실 오래도록 성종과 시어머니인 인수대비 한씨와 갈등을 빚어온 것이 크게 작용했다. 차기 대권을 이어갈 아들(연산군)을 낳은 왕비에게 이토록 극단적인 결정을 내린 것을 보면 왕실의 윤씨에 대한 혐오가 얼마나 컸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폐출된 왕비 윤씨는 성종의 계비였다. 성종의 첫 번째 왕비는 한명회의 딸인 공혜왕후 한씨로, 성종은 장인의 후광으로 형님인 월산대군을 제치고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공혜왕후는 1467년 12세의 나이에 세자빈으로 책봉되고, 1469년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됐지만 1474년(성종 5년)에 사망했다. 이때 빈자리를 메운 사람이 후궁으로 들어왔던 제헌왕후 윤씨(~1482년)였다. 1474년 8월 9일 왕비의 자리에 오른 윤씨는 11월에 원자 연산군을 낳음으로써 가치가 절정에 이른다.

윤씨의 출생연도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성종보다는 연상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실록 기록을 보면 그녀는 성격이 매우 강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여러 측면에서 윤씨는 왕인 성종에게도 만만치 않은 존재였다.

더구나 어린 성종은 누나뻘인 왕비보다는 후궁들을 좋아했다. 소용 정씨와 엄씨를 찾는 발길이 잦았고, 윤씨는 이를 그대로 두지 않았다. 후궁을 제거하기 위해 민간요법을 쓰기도 했고, 후궁들이 자신과 세자를 죽이려 한다는 투서를 돌리기도 했다. 그러나 투서의 실질적인 작성자가 윤씨로 밝혀지고, 윤씨 처소에서 비상(砒霜)이 발견되자 성종은 왕비의 폐출을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거듭되는 며느리의 파행에 시어머니인 인수대비도 분노했다. 인수대비는 언문 교지를 내리면서 “지금 주상의 사랑을 받고 있는데도 행동이 저 모양인데, 혹시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이보다 더한 행동도 할 수 있다”며 자신이 애초에 사람을 잘못 봤다고 후회했다.

윤씨의 투기에 대해 인수대비까지 나서자, 성종은 윤씨의 출궁을 결심했다. 이때마다 윤씨를 변호한 것은 ‘원자의 생모’, 즉 차기 왕위 계승자인 연산군의 어머니라는 무기였다. 신하들의 거듭된 요청에 성종 역시 어쩔 수 없이 일정 기간 그녀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후에도 성종과 윤씨의 갈등은 계속됐고, 대비가 나무라면 성난 눈으로 노려볼 정도로 윤씨는 며느리의 도리마저 포기했다. 그러다 어느 날 성종이 후궁을 찾은 것에 반발해 윤씨가 성종 얼굴에 손톱자국을 낸 사태까지 벌어지면서 두 사람의 파국은 시간문제처럼 보였다. 며느리의 과격한 행동을 참다못한 인수대비는 마침내 성종에게 윤씨를 폐위할 것을 요구했고,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왕비가 쫓겨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가로 쫓겨난 윤씨는 폐출에 그치지 않고, 3년 뒤인 1482년 성종이 내려준 사약을 마시고 죽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 ‘연려실기술’에는 그 과정이 이렇게 표현돼 있다.

“윤씨는 폐위되자 밤낮으로 울어 끝내는 피눈물을 흘렸는데 궁중에서는 훼방하고 중상함이 날로 더했다. 임금이 내시를 보내 염탐하게 했더니 인수대비가 그 내시를 시켜, ‘윤씨가 예쁘게 단장하고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는 뜻이 없다’고 대답하게 했다. 왕은 드디어 그 참소를 믿고 죄를 더 줬던 것이다.”

폐출된 후에도 반성의 빛이 없었던 것이 윤씨가 사약을 받게 된 결정적 원인이었던 셈이다. 조선 전기 왕실 여성으로서 학문적 식견이 높았던 인수대비는 여성들이 지켜야 할 성리학 윤리서인 ‘내훈(內訓)’을 직접 저술하면서, 조선 사회가 성리학을 이념화해야 한다고 믿었던 이다. 이런 인수대비에게 왕인 남편의 행동을 투기하고 손찌검까지 하는 며느리는 결코 용납될 수 없었다. ‘고부 갈등’은 왕비의 폐출과 사사(賜死)라는 극단적인 선례를 남기게 됐다.

폐비 윤씨가 사약을 받을 무렵인 1482년, 당시 연산군은 7세밖에 되지 않은 왕자였다. 게다가 연산군은 생모 윤씨의 죽음 직후 성종의 두 번째 계비인 정현왕후 아들로 입적됐기 때문에 어릴 때는 정현왕후를 어머니로 알고 지냈다. 1494년 성종은 죽으면서까지 100년 동안 폐비의 일을 거론하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길 정도로 사건의 후폭풍을 대비했지만, 성종의 불길한 예감은 그대로 적중한다.

‘연산군일기’에는 연산군이 성종의 묘지문(墓誌文)에 왕비 아버지가 윤기견(폐비 윤씨의 아버지)이라 쓰인 것을 본 후, 비로소 생모 윤씨가 폐위돼 죽은 것을 알고 수라(水剌)를 들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왕이 된 후 생모의 죽음을 알게 됐고, 연산군이 이에 대해 깊이 갈등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1504년 마침내 이 뇌관을 터뜨리는 자가 등장하니, 바로 임사홍이다. 자신의 정치적 입지 강화를 위해 온갖 정치적 술수를 기획하고 있던 임사홍. 그는 성종 때 폐비 논의를 주도한 폐비정청(廢妃庭請)에 참여한 인사들을 구체적으로 거론하면서 연산군이 이들에 대한 복수를 하도록 유도한다. 이것이 바로 연산군이 생모를 위한 복수극을 시작한 갑자사화(甲子士禍)의 서막이다. 폐비 윤씨의 죽음은 연산군대에 다시 발화돼 조선시대 선비들을 유배와 죽음으로 몰아갔다.

폐비 윤씨가 폐출되기 직전인 1480년, 조선에는 한창 시끄러운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어우동(於于同) 스캔들’이다. 어우동은 영화나 드라마의 이미지 때문에 기생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 어우동의 아버지는 승문원 지사를 지낸 박윤창으로 양반가 규수였다. 어우동은 왕실 후손인 이동(李仝)과 혼인했다. 그런 양갓집 규수가 양반은 물론, 천한 신분의 사람들과 정을 통하다가 물의를 일으키면서 사회문제가 됐다. 성리학 이념에 입각해 남성 중심의 사회를 지향하는 성종은 어우동 사건을 용납하지 않았다.

“지금 풍속이 아름답지 못해 여자들이 음행을 많이 자행한다. 만약에 법으로써 엄하게 다스리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징계되는 바가 없을 텐데, 풍속이 어떻게 바로 되겠는가? 옛사람이 이르기를 ‘끝내 나쁜 짓을 하면 사형에 처한다’고 했다. 어우동이 음행을 자행한 것이 이와 같은데, 중한 형벌에 처하지 않고서 어찌하겠는가?”

성종은 이같이 명하며 어우동을 극형에 처했다. 남성과 간통을 한 죄에 대해 극형을 가하는 것은 무리라는 반대 의견이 많았지만 성종은 그대로 형을 집행했다. 성종의 처형 명분은 조선의 사회 풍속과 기강을 바로잡는 데 있었다.

조선의 건국이념으로 수용된 성리학은 성종이 이끌던 15세기 후반까지도 사회에 완전히 정착하지 않았다.

성종은 누구보다 성리학 이념을 수용하고 전파하려 노력했던 왕이다. 이런 상황에서 터진 폐비 윤씨의 투기와 어우동 스캔들은 성리학의 이념 전파에 걸림돌이 되는 사건이었고, 결국 성종은 어우동과 폐비 윤씨를 극형으로 처벌하는 강수를 뒀다. 조선의 여성들에게 두 사건을 반면교사로 삼게 해 성리학 이념으로 나아가는 국가의 취지에 적극 부응하라는 왕의 의지를 담았던 것이다.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 일러스트 : 정윤정]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806호(2015.05.06~05.12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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