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지도 위에서 싸우는 21세기 동북아

남문희 대기자 2015. 5. 1. 12:0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역사 전쟁'의 시대다. 격전의 무대로 동북아시아 고대사가 선택되었다.

일본 아베 정권은 독도에 대한 공세를 강화해온 데 이어 최근에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설'을 다시 꺼내들었다. 4월 말 아베가 미국을 방문해서 마무리할 새로운 미·일 방위협력지침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 유사시 지금까지 후방 지원에 그쳤던 일본 자위대가 직접 무력행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조치가 골자라고 한다. 임나일본부는 일본이 4~6세기 한반도 남부 지역을 점령·지배하기 위해 설치했다는 기구다. 일본 사학계의 일방적 주장으로 학문적으로는 이미 수명을 마친, 문자 그대로의 설(說)이다. 그러나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의 한반도 침략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 수단으로 활용되어왔다. 한반도의 무력 충돌에 개입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를 일본이 정부 차원에서 새삼스레 임나일본부설을 제기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런가 하면, 지난 3월20일 국회에서 열린 '동북아 역사왜곡 대책특별위원회' 회의록을 보면 주목할 대목이 나온다. '동북아 역사지도' 편찬 책임자인 서강대 윤병남 교수에 따르면, 2012년 미국 의회조사국이 동북아역사재단에 다음과 같이 질의했다. '북한 돌발 사태 발생 시 중국은 한국에 어떤 '역사적 권리'를 제기할 것인가? 이에 한국은 어떻게 대응할 계획인가?' 미국은 중국의 동북공정을 '역사적 권리 주장'의 포석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처럼 동북아 고대사는 '고대의 문제'를 넘어 21세기 국제정치의 현안으로 떠오르는 중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고대사와 관련된 갈등만 증폭되고 있다. 최근에는 동북아역사재단의 주요 사업인 '초기 한국사 프로젝트'와 '동북아 역사지도' 등이 도마 위에 올랐다. 동북아역사재단은 2006년 중국과 일본의 역사 왜곡에 체계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교육부 산하기관이다.

'초기 한국사 프로젝트'는 동북아역사재단이 미국 하버드 대학 한국학연구소와 함께 추진한 '한국 고대사 관련 영문서적 출판 사업'이다. 해외에 한국 고대사를 알린다는 목적으로 책 6권을 영문으로 발간했다. 그런데 이 책의 내용이 알려지면서 반발이 나타났다. 고조선에서 삼국(고구려·백제·신라)으로 이어지는 한국 고대사의 체계 대신 한사군(漢四郡:낙랑·임둔·진번·현도) 및 삼한(三韓:마한·변한·진한)과 가야가 강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반발하는 이들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우선 한국사의 출발이 고조선이 아니라 중국의 식민지인 한사군이라는 인상을 준다. 또한 동북아역사재단이 고구려·백제·신라 등 강력한 왕권(통치체제)으로 비교적 넓은 지역을 체계적으로 통치한 고대왕국 대신 수십 개의 허약한 소국으로 구성되었다는 삼한을 중시한 이유는 무엇인가. 혹시 일제강점기의 식민사학자인 쓰다 소우키치의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을 반영한 것 아닌가?'

쓰다 소우키치 등 일본 제국주의의 한반도 강점을 역사학 차원에서 옹호한 일본 사학자들은 삼국시대의 초기(기원전 1세기~기원후 4세기)에 대한 <삼국사기> 기록을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해 왔다. 이 일본 학자들에 따르면, 고대 한반도의 한강 이남과 이북은 각각 외세의 통치를 받았다. 한강 이북은 한(漢) 무제가 고조선을 복속시켜 한사군을 설치한 기원전 108년부터 고구려의 낙랑군 정복(기원후 313년)까지 400년 동안 중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일본 야마토 정권의 전설적 군주인 진구황후는 기원후 4세기에 신라를 정벌한 뒤 임나일본부를 두고 200년간 한강 이남을 식민 통치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같은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는 매우 미약하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 <일본서기>에 몇 줄 언급되었을 뿐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한국의 <삼국사기>에는 200년이나 한강 이남을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가 단 한 줄도 언급되지 않는다. 더욱이 <삼국사기>에 따르면, 기원후 4세기의 한강 이남에는 이미 고대왕국의 면모를 갖춘 백제와 신라가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같은 시기, 긴키(지금의 나라 현)의 지방 권력에 불과했던 야마토 정권이 함부로 넘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쓰다 소우키치 같은 식민사학자들이 이 같은 논리적 모순을 뛰어넘을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기원후 4세기 이전 시기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이 엉터리('초기 기록 불신')라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지도 제작에 드는 50억원만이 문제는 아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해명자료를 통해 '해당 영문서적에 실린 논문들은 이미 동북공정, 식민사관, 임나일본부설,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 등에 대한 비판적 논의를 담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이 같은 논란은 결국 정치권으로 확대된다. 지난해 9월부터 국회 동북아 역사왜곡 대책특별위원회(이하 동북아특위)가 동북아역사재단의 다른 주요 사업인 '동북아 역사지도'에 개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동북아 역사지도를 만드는 데 10년에 걸쳐 50억원씩이나 들여야 하느냐에 방점이 찍혔다. 그러나 막상 뚜껑이 열린 뒤에는 지도 내용이 논점으로 떠올랐다. '동북아 역사지도'의 당초 취지는, 국제사회에서 중국과 일본의 역사지도만 일방적으로 통용되는 현실에서 한국 시각의 역사지도를 만들어 보급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나온 동북아역사재단의 지도를 보니 중국의 '동북공정 지도'와 크게 다르지 않은 데다 일본 사학자들의 '식민사관'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비판이 불거진 것이다.

ⓒ도종환 의원실 제공 <중국 역사지도집>(위)은 만리장성이 평양까지 이어졌던 것으로 그렸다. 중국은 만리장성이 이어진 지역을 자국의 역사적 강역이라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

지난해 11월부터 자료를 입수해 분석해오던 국회 동북아특위는 2월27일과 3월20일 동북아역사재단과 역사지도 편찬위로부터 업무보고를 받았다. 2월27일 업무보고에서 도종환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동북아 역사지도가 고대사의 핵심 이슈인 한사군의 강역 및 만리장성의 동단 문제와 관련해, 중국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제작된 <중국 역사지도집> 내용과 똑같은 이유가 뭐냐고 따져 물었다.

만리장성은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인 진(秦) 시대에 건설되었지만, 이후 왕조인 명(明)에서도 대규모 증축되었다는 주장이 나온다. 중국 측은 만리장성이 이어진 지역을 자국의 역사적 강역이라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서 <중국 역사지도집>은 만리장성의 동단(동쪽 끝)을 평양까지 이어진 것으로 표시했다. 동북아 역사지도는 <중국 역사지도집>의 만리장성 자리를 국경선으로 표시해놓았다.

또한 동북아 역사지도에 따르면, 한사군이 평양 중심으로 포진해 있다. 도종환 의원은 이를 매우 심각한 사태라고 지적했다. 한사군의 위치는 역사학계에서도 아직 확정하지 못한 문제다. 여러 가지 다른 설들이 격하게 부딪친다. 1990년 이후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서도 구체적으로 표시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하필 동북아 역사재단이 내놓은 역사지도가 <중국 역사지도집>과 마찬가지로 한사군을 평양 주변에 위치시켜버린 것이다. 도종환 의원은 이 같은 주장의 근거로 사용했을 '1차 사료'를 제시하라고 동북아역사재단 측에 요구했다.

3월20일 열린 두 번째 업무보고에서 1차 사료와 관련된 궁금증이 풀렸다. 동북아 역사지도와 동일하게 한사군의 위치를 비정(어떤 미상의 물체에 대하여 그와 유사한 다른 물체와 비교하여 그 성질을 정함)한 지도가 나온 것이다. '친일 사학자'로 비판받아온 이병도 전 서울대 교수의 저서 <신수한국사대관(新修韓國史大觀)> 38쪽에 실린 '한사군 변천도'였다(아래 오른쪽 그림). 즉 동북아 역사지도의 한사군 위치 비정은 이병도 전 교수의 주장을 그대로 반영한 셈이었다.

ⓒ도종환 의원실 제공 제작 중인 동북아 역사지도(가운데)는 <중국 역사지도집>(왼쪽)과 이병도 전 교수의 <신수한국사대관>(오른쪽)의 내용과 비슷해 논란이 제기됐다.

그런데 동북아 역사지도가 중국 측의 <중국 역사지도집>을 빼닮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중국 역사지도집>이 '이병도의 한사군 위치 비정'을 먼저 베꼈기 때문이다. <중국 역사지도집>을 처음 만든 사람은 1970년대 초 중국 푸단 대학 교수였던 담기양이다. <중국 역사지도집>은 1980년대 초에 업그레이드되는데, 이 과정에서 한사군에 대한 이병도 전 교수의 주장을 반영해 만리장성의 동단을 평양까지 작위적으로 이어 붙였다는 것이다( 역사 갈등 해결할 '키'는 남북 역사교류 참조). 결국 한사군의 위치에 대해서는 이병도 전 교수의 학설이 한국의 동북아 역사지도와 <중국 역사지도집>을 통일시켰고, 결과적으로 교육부 산하기관인 동북아역사재단이 중국 동북공정 논리를 수용한 꼴이 되어버렸다는 것이 역사학계 일부의 비판이다.

섣불리 단정할 수 없는 한사군의 위치

물론 동북아역사재단 측은 학문적 연구를 정치적으로만 재단하면 곤란하다고 주장한다. 이병도 전 교수의 주장 이외에도 다양한 문헌이나 고고학적 유적 등을 종합적으로 연구한 결과가 동북아 역사지도라는 주장이다. 동북아 역사지도에서 고대사 부문을 담당한 임기환 서울교대 교수는 '이병도 선생(의 학설)만큼 한사군 강역이나 낙랑군 25개 현을 구체적으로 비정한 연구가 없어서 참고했다. 그러나 (이병도 교수의 주장 이외에도) 평양의 낙랑 유적, 고조선 왕검성과 고구려 평양성 위치에 대한 문헌 사료 등을 참조했다'라고 제작 경위를 밝혔다.

사실 한사군의 위치에 대한 연구는 현재진행형이다. 북한 사학계는 한사군이 요동 지역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국내의 일부 학자들은 요서 지역으로 비정한다. 아직 섣불리 어느 쪽으로 단정할 수 없는 상태인 것은 분명하다.

한사군의 위치는 고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다. '한사군이 어디 있었느냐'에 따라 고조선과 고구려는 물론 신라, 백제 등 고대국가의 강역이 연동되어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한사군 평양설'을 채택한 동북아 역사지도는 전반적으로 축소 지향적인 한반도의 고대국가상을 제시한다고 할 수 있다. 한반도 계열 고대국가들의 강역을 넓게 잡을 수 있는 기록은 비교적 뚜렷한 근거에도 불구하고 무시한 반면 중국·일본의 영역을 확대할 수 있는 문헌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도종환 의원이 지난 3월20일 업무보고 자리에서 지적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백제와 신라는 기원후 120~300년쯤 고대왕국으로 발전한 단계다. 그러나 이 시기를 그린 동북아 역사지도에 나타난 한반도 남쪽에는 백제와 신라가 보이지도 않는다. △<삼국사기>는 물론 중국의 <후한서>에도 등장하는 고구려의 중국 요서 지방(북평·상곡·어양·태원) 공격이 빠졌다. △광개토대왕비의 영토 확장 관련 기록도 반영되지 않았다. △고려시대 윤관의 북방 진출이 표시되지 않았다. 반면 중국의 한(漢)은 요서와 요동을 거쳐 한반도 북부까지 지배한 것으로 확대되었다. 일본 야마토 정권이 실제로는 긴키의 지방 정권에 불과했던 시기에 이미 전국을 통일하고 대마도까지 지배한 것처럼 부풀려져 있다.'

이처럼 정치권과 여론의 비판이 거세지자, 동북아역사재단 측은 올해 11월까지 작업을 마무리한 뒤 그때까지 제작되는 지도 300여 장의 데이터에 대한 검수작업에 들어가기로 했다. 앞으로 3년간 검수 기간을 둔 뒤 2017년에 동북아 역사지도를 출판하기로 했던 당초 계획과 비교하면 사실상 사업 중단이라 할 수 있다.

지도 사업에 참여한 기존 학계 인사들은 억울하다는 생각이다. 고조선사 전공인 교원대 송호정 교수는 '지난 몇 년간 학자들이 애를 써서 만든 작업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됐다. 학계의 역량을 결집해서 하는 일인데 정치권과 언론이 개입하는 것은 맞지 않다'라며 울분을 토했다.

반면 국회 동북아특위 관계자 입장은 단호했다. 그는 '국회 특위가 비주류 학계를 편들려는 게 아니라 최대한 균형적으로 사안을 보려고 한다'라면서도, '식민사관이야말로 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가 정치적 의도로 만든 것인데, 학계가 이를 극복하지 못하면 정치권이라도 나서서 바로잡아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남문희 대기자 / bulgot@sisain.co.kr

싱싱한 뉴스 생생한 분석 시사IN Live - [ 시사IN 구독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