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식증 권하는 세계' 이제 그만..설 땅 잃는 '해골 모델'

정유진 기자 2015. 4. 17.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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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된 미의 기준

"내 이름은 애너렉시아 네보사(anorexia nervosa). 그냥 편하게 '애나'라고 불러줘. 부모님이나 친구들은 너를 이해하지 못하지. 그들은 항상 지금의 네가 딱 보기 좋다고 말할 거야. 하지만 그건 모두 거짓말이야. 오직 나만이 너에게 진실을 말해줄 수 있어. 너는 완벽하지 않아. 너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어. 앞으로 내가 도와줄게. 우리는 좋은 파트너가 될 거야."

'영원히 애나처럼 살기'라는 웹사이트에 적힌 자기소개 글이다. 애나의 이름 '애너렉시아 네보사'는 '거식증'을 뜻하는 영어 단어다. '거식증'이란 단어를 구글에서 검색하니 대번에 이 사이트가 튀어나왔다. 날씬해지는 것이 소원인 세계 각국 여성들은 이 사이트에서 다이어트 비법을 공유하며 '애나'에게 조언을 구하고 있었다. "3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 1g도 살이 빠지지 않았어. 도와줘, 애나." "지금 52㎏인데 27㎏까지 더 빼고 싶어."

애나는 이들에게 구체적인 살빼기 요령을 알려준다. 음식은 무조건 컵 크기보다 작은 양만 먹는다. 그조차도 그냥 먹어선 안된다. 음식을 먹기 전 가득 따른 물 한 컵을 마신 다음, 이후에도 음식을 한 입씩 베어물 때마다 물을 한 컵씩 들이켠다. 위가 금방 포만감을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다. 손목에는 고무줄을 끼운다. 허기를 느낄 때마다 고무줄을 손목이 아프도록 세게 튕긴다. '음식=고통'이란 인식을 각인시키기 위함이다.

힘들어서 다이어트를 포기하려는 여성들에게 애나는 다음 10계명을 숙지시킨다. 첫째, 날씬하지 않은 자는 매력적이지 않다. 둘째, 건강한 것보다 날씬한 것이 중요하다. 셋째, 먹을 때는 항상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 넷째, 날씬해지기 위해 굶는 것은 권력과 성공의 시작이다…. 인터넷에서는 이곳을 포함해 수많은 거식증 사이트들이 날씬해지고 싶은 여성들을 유혹하고 있다.

런웨이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델들. 지나친 다이어트로 갈비뼈가 드러나고, 팔과 다리는 수수깡처럼 말라 있다. | 인터넷 캡처

■ 거식증 원하는 소녀들의 영웅

거식증에 걸려서라도 날씬해지고 싶은 여성들에게 최고의 영웅은 '해골 모델'이다. 쇄골이 앙상한 화보 사진 아래에는 "이렇게 하루라도 살 수 있으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어"라는 댓글들이 달려 있다. 그러나 무대에 서기 위해 모델들이 살을 빼는 과정은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이 따른다.

패션잡지 '보그' 호주판의 편집장이었던 크리스티 클레멘츠는 자신의 책 <보그 팩터>에서 "모델들은 파리 패션위크 무대에 서고 싶다는 열망 하나로 음식 대신 휴지로 위를 채운다"고 폭로했다. 그는 미국에서 온 모델과 작업을 하던 도중 그녀의 무릎에서 엄청나게 많은 흉터와 상처를 발견했다. 이유를 물으니 그 모델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제가 너무 배가 고파서 자주 기절을 하거든요." 하루에 몇 번씩 기절하는 것이 모델들에게는 마치 지극히 평범한 일상인 것처럼 말이다. 반짝이는 조명 아래에서는 화려하고 아름다워 보일지 몰라도, 더 이상 체온을 유지할 수 없을 만큼 얇아진 살가죽 때문에 온몸에 검은 솜털이 자라나는 모델들도 있다. 클레멘츠는 "(화보 촬영을 위해) 모피 외투를 입히고 사막 한가운데 세워놓아도 덥다고 불평하는 모델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도대체 왜 모델들은 이렇게까지 가혹한 다이어트를 하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해골처럼 말라야만 유명 디자이너의 옷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유리구두를 신기 위해 발가락을 자른 신데렐라의 의붓언니처럼, 모델들은 디자이너의 옷을 입기 위해 몸을 깎는다. 클레멘츠는 "디자이너들은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 해골 모형을 앞에 두고 옷을 만드는 것 같다"면서 "그들의 옷은 조금만 살이 있어도 입을 수가 없다. 이 때문에 모델 에이전트들이 다이어트를 강요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디자이너들은 비쩍 마른 몸매여야 옷맵시가 살아난다고 항변한다. '패션의 황제'로 불리는 샤넬의 수석디자이너 칼 라거펠트는 "모델들이 너무 말랐다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고 말해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그는 2009년 독일의 유명 여성잡지 '브리기트'가 앞으로 너무 마른 모델은 쓰지 않겠다는 방침을 밝히자 "정말 이상한 결정"이라며 "뚱뚱한 여자들이 날씬한 여성과 비교되기 싫으니까 그러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이어 "사람들은 패션쇼에서 꿈과 환상을 보길 원한다. 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뚱뚱한) 여성들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디자이너가 스케치한 모델과 거의 유사한 몸매를 가진 실제 모델.

■ 해골 모델 규제 법안 속속 도입

지나치게 마른 몸매를 강요하는 패션업계의 관행은 종종 끔찍한 비극으로 이어졌다. 2006년 우루과이 출신의 패션모델 자매인 루이셀 라모스(22)와 엘리아나 라모스(18)가 숨졌다. 언니인 루이셀은 거식증에 따른 심장마비였고, 몇 달 뒤 동생 엘리아나마저 영양실조로 목숨을 잃었다. 제레미 길리처라는 미국의 남성 모델은 섭식장애로 폭식증과 거식증 사이를 오가다 2010년 38세에 숨졌다. 사망 당시 그의 몸무게는 30㎏에 불과했다.

이 같은 비극이 되풀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지나치게 깡마른 모델은 런웨이에 서지 못하도록 하는 법안이 속속 도입되기 시작했다. 프랑스 하원은 지난 3일 체질량지수(BMI=체중÷키의 제곱)가 일정 수준 이하인 모델을 고용할 수 없게 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법을 어기고 지나치게 마른 모델을 고용한 모델 에이전시나 패션디자이너들에게는 최고 7만5000유로(약 9000만원)의 벌금이 부과되거나 6개월 이상 징역형이 선고될 수 있다. 스페인, 이스라엘 등에서는 이미 BMI가 18.5 이하인 모델은 무대에 설 수 없다.

각국이 패션업계의 관행을 규제하는 것은 모델들의 건강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지나치게 마른 몸매가 이상적인 아름다움의 기준으로 굳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네덜란드 정부는 '영원히 애나처럼 살기'와 같이 마른 몸매를 찬양하면서 거식증을 유발하는 웹사이트를 금지하는 법안을 추진 중이다. 현재 프랑스에서는 4만명, 네덜란드에서는 약 6000명이 거식증으로 고통받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과연 패션업계를 규제하고 사이트를 차단하는 것으로 다이어트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여성들을 구해낼 수 있을까. "다이어트가 페미니즘적 문제라고요? 그런 식의 논쟁은 별로예요. 전 마른 몸일 때 제 스스로가 잽싸고 가볍고 기운차다고 느껴요. 다이어트는 제 자신을 위한 거죠"라고 말하는 여성들을 반박하긴 힘들다. 선택과 강요를 구분하는 선은 흐릿하고, 주입된 의식과 온전한 자아를 가르는 경계선 또한 희미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왜 날씬한 여자를 원하는가>의 저자 캐럴라인 냅은 한때 거식증에 걸려 생리까지 멈추고 열두 살짜리 아이의 청바지를 입어야 했다. 그는 "여성해방 운동으로 여성들에겐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모든 욕망을 공공연하게 말할 자유가 주어졌지만, 여전히 여성들은 아무것도 욕망할 수 없다"면서 "무한한 선택의 자유, 그러나 아무것도 충족할 수 없는 이 부조리함 속에 나타난 것이 거식증"이라고 말한다. 50㎏을 넘는 여성의 몸무게는 게으름과 탐욕의 결과가 되고, 끊임없이 주입된 전광판 모델들의 물건에 손을 뻗는 순간 '된장녀'로 매도된다. '욕망해도 좋다. 그러나 욕망을 실현하는 순간 당신은 추해질 것이다'란 사회적 암묵이 형성돼 있다는 것이다.

세계는 남성의 식욕에 이바지하는 데는 신속한 기동력을 발휘하지만, 여성에게도 그런 것은 아니다. 빅맥을 좋아하는 빌 클린턴의 취향은 귀엽게 여겨지지만, 힐러리의 외모는 가차없는 평가의 대상이다. 냅은 "결국 다이어트와 거식증은 허락된 욕망을 참기 위해, 허벅지를 찌르며 고행을 거듭하는 여성들의 '자기처벌'과도 같다"고 말했다.

<정유진 기자 sogun7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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