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1년 - '기억']벚꽃 보면 애들이 사진 찍자고 찾아올 것만 같아..

조형국 기자 2015. 4. 9.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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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학년이 된 아이들

▲ 그때처럼 벚꽃이 분분… 평범한 고3으로 지내지만곳곳이 추억이자 상처… 세월호 얘기 아직 힘들어

단원고 3학년 오연주양(가명·18)은 공연 준비로 바쁘다. 그가 속한 학교 댄스 동아리 'TREN.D(트렌디)'는 다음달 1일부터 열리는 안산 거리극축제 무대에 오른다. 연주는 주말마다 안산 예술의전당에서 공연을 기획하거나 후배들과 안무 연습을 한다. 고3이라는 중압감에다 부모님 걱정도 신경 쓰이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하기로 했다.

연주는 트렌디의 유일한 3학년이다. 함께 동아리 활동을 하던 친구 4명(이경주·강수정·이연화·정예진)은 지난해 수학여행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후배들은 하나뿐인 선배 연주를 많이 따르고 의지한다.

박민혁군(가명·18)은 컴퓨터 게임 '리그오브레전드(롤)'에 빠져 있다. 지난해 4월16일 이전 PC방에 자주 가던 친구는 김기수군과 임경빈군이다. 4월16일 배가 기울기 직전까지 민혁인 선내 오락실에서 경빈이와 게임을 했다. 대전격투 게임 '철권 태그 토너먼트'를 5차례 치르면서 경빈이가 3번, 민혁이가 2번 이겼다. "야, 진짜 아깝게 진 거야." "별로 아깝게 진 게 아닌 거 같은데?" 장난기 가득한 미소가 친구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단원고 생존학생들은 각자 희생된 친구들을 기억하는 물건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오연주양은 'Hope'가 적힌 배지, 김승연군은 '20140416' 팔찌, 박민혁군은 'Remember 0416' 반지를 차고 다닌다. 이들은 인터뷰를 마친 뒤 "우리 얼굴 대신 친구를 추억하는 모습을 담아달라"고 부탁했다. 사진은 이들이 직접 찍어 보내왔다.
<여기를 누르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생존학생'으로 불리는 아이들은 꾸역꾸역 일상을 살아간다. '대한민국 고3'이 된 아이들은 수업이 끝나면 보충·야간자율학습에 참여하거나 학원에 간다. 주말엔 친구를 만나고, 틈만 나면 카카오톡·페이스북으로 수다를 떤다.

지난 5일 오후 5시30분 안산고 주변 카페에서 민혁이와 연주, 김승연군(가명·18)을 만났다. 졸리는 수업을 얘기할 땐 깔깔댔고, 이성친구를 말할 땐 부끄러움을 탔다. 밝고 명랑했다.

'4·16'은 빼낼 수 없는 파편처럼 박혀 있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부모만 그런 게 아니다. 아이들도 죽은 아이들을 가슴에 묻고 산다. 일상과 주변 곳곳이 아픔이고 상처다. 지금 단원고엔 1년 전 그때처럼 벚꽃이 만개했다. 학교 가는 길에 꽃잎이 흩날리면 아이들은 먼저 떠난 친구를 떠올린다.

"(희생자) 재강, 승태랑 벚나무를 발로 차 꽃잎이 머리에 수북이 쌓일 때까지 서 있곤 했어요."

승연인 벚꽃에서 친구를 본다. 연주는 매년 희생자인 강한솔·김해화양과 벚나무 앞에서 사진을 찍기로 했다. 1·2학년 때 같은 장소에서 세 명이 함께 찍은 사진 두 장이 남았다. 연주가 완성하지 못한 벚꽃 연작 사진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벚꽃을 보면 얘들이 사진 찍으러 올 것 같아요."

인터뷰 도중 세월호 이슈가 나오면 아이들 얼굴이 어두워졌다. 침몰 당시의 트라우마에다 기울어져가는 배에서 학교로 돌아갈 때까지 어른들의 말과 행동에서 받은 상처 때문인 듯했다. 승연이는 '전원 구조' 충격에서 지금도 벗어나지 못한다. "제가 맨 처음 나온 팀인데 해경은 '너희가 마지막이니 빨리 타'라고 했어요." 연주는 "75명이 도착한 뒤 170명이 더 온다고 해서 진도체육관에서 기다렸다. 다 거짓말이었다"고 했다. 홀에 갇혀 있던 민혁인 가슴까지 물이 차올라 잠수해서 통로를 찾았다. "머리 위 배 창문으로 경찰이 걸어다녔어요. 창문을 깼다면 수백명을 구했을 거예요."

뭍에 올라와서도 어른들의 거짓말, 괴롭힘은 이어졌다. 연주는 "물에 젖은 제게 '돈을 줄 테니 인터뷰를 하자'던 공중파 방송사도 있었다"고 했다. "걱정하듯 '괜찮으냐'고 묻고 계속 질문을 하는 사람은 100% 기자예요. 카메라를 다 부숴버리고 싶었어요." 승연이 목소리가 떨렸다. "누군가가 다가오면 의심하게 돼요. 뭘 노리는 걸까, 원하는 게 뭘까 생각하고…."

죽은 친구의 아버지, 어머니가 삭발한 채 거리로 나서는 것을 보는 아이들의 마음은 힘들다. 아이들이 원하는 건 단순하다. 연주는 "원래 배 사고가 나면 인양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안 하기 위해' 이유가 만들어지는 것 같아서 이상해요"라고 했다. 승연이는 실종된 남현철·박영인군과 같은 반이었다.

"어떤 방법이든 친구들을 찾는 것, 그것 말곤 바라는 게 없어요."

아이들은 '그만하라'는 댓글로 인터넷이 도배되는 것을 안다. 1주기 추모제에 관한 자세한 시간, 장소는 말하지 않았다. "일베 같은 사람들이 올까 두려워요. 그냥 저희끼리만…." 연주가 말을 잇지 못했다.

아이들 손가락엔 '잊지 않겠다'는 반지가, 팔목엔 '기억하자'는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인터뷰 동안 아이들은 한 번도 '세월호'를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아이들은 치킨집에서 서로의 동아리 얘기를 웃으며 주고받다 오후 8시30분쯤 커피가게로 자리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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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국 기자 situati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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