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 말에 소름 쫙.." 어느 직장녀의 성희롱 수난기

권영은 2015. 4. 3.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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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 Cover Story]

김 부장은 "술 마시자" 한밤 전화

이 부장은 "지금 집에 갈까" 카톡

"만진 것도 아닌데"에 항의 못 하고

친구들은 "그냥 참아라" 이직 말려

"어디 만진 것도 아니잖아. 그렇게 까칠해서 직장생활 하겠어." 성희롱에 항의하는 여성에게 쉽게 돌아오는 말이다. 성희롱이라고 하면 어감상 경미한 성적 언어유희가 떠오른다. 그래서 일상적이지만 문제를 제기하기가 쉽지 않다. 수많은 직장여성들이 여전히 성희롱에 힘겨워하고 있다. 능력을 인정받는 여성조차 그렇다. 친구 사이인 두 사람이 겪은 암울한 직장 현실과 깊은 좌절감을 그들의 눈으로 재구성했다.

나는 6년차 직장인. 30대 초반의 알파걸이다. 대학 졸업 때쯤 알파걸이라는 말이 회자되기 시작했다. 각종 고시에서 여성 합격자 비율이 높아지고, 공군사관학교나 경찰대 수석에 여성이 나오면서부터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번듯한 직장에 다니고, 어디서도 누구한테 꿇리지 않을 스펙. 나 같은 여자를 알파걸이라고 부르는 모양인데, 얼토당토않은 소리다. 막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딜 때만 해도 능력 있는 커리어우먼을 꿈꿨던 나. 지금은 그냥 성희롱 당하는 여사원일 뿐이다. 업무로, 동료로 인정받고 싶었지만 나는 계속 '여자'였다. TV 드라마 '미생'의 안영이처럼.

성적이 곧 능력이던 학창 시절 여자라서 받는 차별 같은 건 딱히 몰랐다. 능력 없는 여성들의 투정 같기만 했다. 입사 초 햇병아리 시절 만났던 김 부장님 덕에 태어나 처음, 나도 여자구나 알았다. 시작은 늦은 밤 혀 꼬부라진 김 부장님의 전화 한 통부터였다. 그는 같은 사무실을 쓰는 옆 부서 부장이었다. "술 마시러 나와라." 최대한 친절하게 "다음 번에 불러달라"고 거절하고 그의 술주정을 몇 분 간 받아낸 후 전화를 끊었다. '이 정도면 나도 사회생활 잘한 거겠지, 신입인 나를 술자리에 부르시다니 예쁘게 보셨나보다'라고 생각하면서 불길한 예감은 애써 지웠다. 그의 전화는 계속 됐다. 많게는 1주일에 서너 차례. 받지 않으면 두 번, 세 번 걸려올 때도 있었다. 김 부장님의 번호가 내 휴대폰에 뜰 때 치솟는 스트레스만큼 갈등도 깊어갔다. 그의 캐릭터를 주변에 알아봤더니 "술 좋아하고, 여자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김 부장님이 나를 여자로 보고 술 마시자는 건가. 혼란스러웠다. 아끼는 후배와 술 마시고 싶은 여자 사이에서 내 갈등은 커져만 갔다. 러브샷을 하자거나 은근슬쩍 몸에 손을 대는 것도 아닌데 일일이 항의를 하기도 애매했다. 초반부터 예민한 여자로 찍히고 싶지는 않았다. 특히 이런 일로 문제의 중심에 서고 싶지 않다. 걸려오는 전화 두 번 중 한 번은 받지 않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헛똑똑이가 따로 없다는 생각에 자존감만 뚝뚝 떨어졌다. 김 부장님의 심야 전화는 '뉴 페이스'가 등장하면서 끊겼다. 알고 보니 김 부장님은 기수마다 여직원 한 명씩 꼭 찍어 지분대는 상습범이었다.

부장님 잔혹사는 이게 다가 아니다. 내가 부장님들이 좋아하는 스타일인가라는 생각까지 해봤다. 새 부서로 옮기면서 만난 나의 직속 상관 이 부장님, 그는 친근함을 가장한 성희롱을 거침없이 하곤 했다. "ㅇㅇ야, 사랑해." 부서가 바뀌고 일주일도 안 된 어느 날 밤, 이 부장님과 업무 때문에 주고 받던 카카오톡 말미에 이 여섯 글자가 뜨는 순간, 확 소름이 끼쳤다. 며칠 뒤 몸살이 걸려 하루 연차를 내고 집에서 쉬었다. 자정이 다 된 시각, 이 부장님의 카톡이 도착했다. "ㅇㅇ씨, 몸은 괜찮아? 내가 ㅇㅇ씨 보러 불시에 갈 수도 있어.^^ 지금 갈까? ㅋㅋ" 자느라 못 봤다고 하면 됐을 텐데. 아뿔싸, 카톡을 확인해버렸다. 그는 정말 올지도 모른다. 머리를 쥐어짜다 최대한 건조하게 "부모님 집에서 쉬고 있습니다. 출근해서 뵐게요"라고 답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딸 같아서 걱정돼서 보낸 거야. 카톡 오해하진 마.^^" "ㅇㅇ씨 빨리 나아라. 그래야 술 먹으러 가지.^^"라는 카톡이 연달아 도착했다. 딸 같아서 밤늦게 혼자 사는 여자 집에 찾아오겠다니. 겁도 나고, 화도 나서 그 날 밤 한숨도 못 잤다. 요즘에는 퇴근시간이 다가올수록 불안해진다. 50대 유부남이라는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그저 젊은 여성과 술 마시고 놀기 좋아하는 이 부장님. 오늘도 또 술 마시자고 하면 어쩌지. 약속이 있다고 둘러대면 "누구 만나니, 남자 만나니?" "남자친구도 없으면서 나랑 먹자"고 한다. 나 아닌 어떤 남자를 만나느냔 식이다. 친근함을 가장한 아슬아슬한 줄타기에 발끈해봤자 "야, 부장이 그런 것도 못 물어봐"라고 특유의 능글맞음으로 눙칠 게 뻔하다. 무엇보다 나를 여자로 보는 시선은 처음부터 싫었다. 이 부장님이 낀 식사나 술자리는 되도록 피한다. 그와 말도 섞고 싶지 않고, 같은 공간에 있는 것 자체가 극심한 스트레스다. 이직도 생각해봤지만 친구들은 다른 데도 마찬가지라고, 참으라 한다. 속도 모르는 동료들은 나를 사회생활 못하는 조직부적응자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권영은기자 you@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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