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태기획-대학 성희롱 환영회·체력 단련·속옷 군가] 나도 당했으니.. 일그러진 집단문화

양민철 기자 2015. 3. 26. 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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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서리치게 싫어했었는데 후배 들어오니 똑같이 반복.. 회사 입사해도 크게 안 달라

2003년 대학생이 된 A씨(31·여)는 학사편입과 4년간의 수험생활 끝에 2014년 지방의 의학전문대학원에 입학했다. 대기업에 취직한 대학 동기들은 대리로 진급하던 차였다. 늦깎이 신입생이지만 한껏 꿈에 부풀었다. 그런데 학교생활은 생각과 달랐다. 선후배 모임마다 '걸그룹 댄스'를 강요하는 장기자랑을 해야 했고 '군기'도 엄격했다. 춤을 배우려고 한참 어린 여자 동기들과 방송댄스학원에 다녀야 했을 정도다. 서러움에 밤마다 서울의 부모에게 전화해 하소연을 했다.

그렇게 시달렸던 A씨는 최근 기자와 만나 "내가 악마가 된 것 같다"고 했다. 1학년 후배들과의 생활을 문득 돌아보니 자신도 1년 전 그 선배들과 똑같이 굴고 있더라는 것이다. 지난달에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앞둔 후배들에게 1년 전 자신이 다녔던 댄스학원을 알려줬다고 한다. 복장과 행동수칙도 엄하게 주의를 준다고 했다. A씨는 "아마 내가 2학년 중에 가장 무서운 선배로 통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사회에는 '신고식'이란 괴물이 산다. 높은 경쟁률을 뚫고 대학에 들어가도, 취업난을 이겨내 회사에 들어가도 신고식은 피할 수 없다. 소속감을 높인다거나 단합을 다진다는 명분 아래 장기자랑, 사발식, 체력단련 등은 일상적인 과정이 됐다.

신고식은 수시로 도를 넘어서고, 사고로 이어진다. 대한보건협회에 따르면 2006∼2014년 해마다 1∼3명씩 대학생이 신입생 환영행사에서 무리한 음주로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그런 일을 겪으며 신고식에 질색하던 '신입'들이 시간이 흐르면 '가해자'가 된다. 이렇게 어그러진 집단문화는 어디서부터 시작됐을까.

20대 초반 대학생들의 '군기'는 군대를 방불케 한다. D대의 한 학과 학생회는 매년 신입생을 대상으로 '얼차려'식 체력훈련을 10년 넘게 해오고 있다. 일부 신입생은 "학과 활동에 참여하지 않으면 '아싸'(아웃사이더)가 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했다.

관행 속에서 '지켜야 할 선'은 무력하게 무너진다. 지난 19일 밤 강원도 강릉의 한 대학 남학생들이 번화가 한복판에서 예비군복을 벗고 속옷차림으로 군가를 부르며 소란을 피웠다. 갓 제대한 남학생들이 복학 전 과 선배들과 술자리를 갖는 '예비군 대면식' 행사였다.

지난달 서울 S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선 선배들이 '아이 러브 유방' '작아도 만져방' 등 선정적 문구를 적어 각 방문에 붙이는 일도 있었다. 이들은 방을 돌며 인사하는 후배들에게 '입장 시 섹시댄스 추기' 등 성희롱이나 다름없는 규칙을 강요하기도 했다.

회사라고 다르지 않다. 신입사원은 물론 비정규직 여직원 등 사회적 약자들이 표적이다. 지난 6일 한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에는 "회사에서 장기자랑을 하는데 걸그룹 노래에 맞춰 선정적인 춤을 추라고 한다. 다른 여직원 모두 싫어하는데 위에서 시킨 거라 아무 말도 못하고 있다"는 글이 올라왔다. 이 글에 달린 댓글 중에는 " 인터넷에서 가짜 깁스라도 구해서 아프다고 해보라"는 댓글이 가장 많은 추천을 받는 서글픈 일이 벌어졌다.

지난해 2월엔 한 시중은행의 신입행원 합숙 연수 동영상이 논란을 일으켰다. 신입행원들은 기마자세를 한 채 3시간여 동안 도산 안창호 선생의 '주인정신'이라는 글을 낭독했다. 가혹행위, 인권유린이라는 비난이 쇄도하자 이 은행은 낭독 프로그램을 중단했다.

전문가들은 신고식의 뿌리를 '군대문화'라고 본다. 권인숙 명지대 교육학습개발원 교수는 "군대문화와 유교적인 서열문화가 결합돼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양윤 이화여대 심리학과 교수는 "군대가 존속하는 나라에는 이런 문화가 대부분 남아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도 해마다 대학교별로 존재하는 남학생클럽과 여학생클럽의 신고식에서 빚어지는 폭행, 사망, 성범죄 등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비뚤어진 집단문화의 이면에는 '보상심리'가 깔려 있다. 양 교수는 "잘못된 신입문화를 겪은 후배들이 나중에 선배가 되면 이를 바꾸기보다 '나도 당했으니 (너도) 똑같이 당해야 한다'는 심리를 갖게 된다. 이를 '집단의 결속'이나 '우리는 하나다' 등으로 포장하지만 인간의 본성에 있는 괴롭힘의 단면일 뿐"이라고 말했다.

양민철 기자 liste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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