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우린 왜 세월호가 불편해졌나? ①

류란 기자 2015. 3. 10.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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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술이 되어버린 표어 '안전한 바다, 행복한 국민'

[들어가며]

눈을 질끈 감고, 몸 곳곳의 감각에 기대 한발씩 내딛다 보면 어느새 막다른 높은 턱이 느껴지고, 그제야 조심스레 실눈을 떠 보면 햇살을 머금은 본당이 나타납니다. 휴. 다행이다.

서늘한 등 뒤로 지나쳐 온 공간은 일주문과 본당 사이 경계에 선 '천왕문'입니다. 아버지를 따라 등산을 하다 보니 저절로 전국의 유명 사찰부터 이름 없는 조그만 절까지, 여러 곳을 다녔습니다. 어느 곳이든 경내로 들어서려면 다른 수 없이 부릅뜬 눈과 치켜 올린 눈썹, 큼직한 칼을 찬 천왕문의 사천왕상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아무리 부처님을 수호하는 귀신이라지만, 발밑에 깔린 고통에 일그러진 마귀의 얼굴은 기이하고, 또 적나라해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언제부턴가 천왕문을 지날 때마다 눈을 꼭 감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재미있는 건, 눈만 감으면 되는데 꼭 숨까지 참게 된다는 겁니다. 눈을 감고 숨을 참고, 본당이 나타날 때까지 말 그대로 '숨죽여' 걸을 때면, 애도 아니고 이게 무언가 싶어 웃음이 날 때도 있습니다.

지난해 4월, 저에겐 천왕문만큼이나 지나가기 무서운 경계선이 나타났습니다. 취재 차 내려가 있던 목포해양경찰서(이하 목포해경)의 입구였습니다.

세월호 침몰 5일째가 되던 2014년 4월 20일부터 30일까지 10일 동안, 두 선배 기자와 세월호 검경수사본부가 차려진 목포해경에서 지냈습니다. 피의자로 신분이 전환된 세월호 선원들이 조사를 받고, 선원의 가족들이 면회를 오는 공간이었습니다. 영장실질심사가 있는 날이면 입감되어 있던 피의자(선원)들이 손목을 밧줄로 꽁꽁 묶인 채(수건에 가려 잘 보이진 않았지만) 차례로 근처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원으로 호송되곤 했습니다. 십 수 명이나 되는 선원들에게 예외란 없었습니다. 순서를 기다려 모두에게, 한 치의 다름없이 예정된 것처럼, 구속영장이 발부됐습니다. 그렇게 반복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10일 동안 그곳에서 취재를 하고 뉴스를 만들었습니다.

팀 막내다 보니 때때로 간식이나 식사를 사러 근처 아파트 단지의 상점가에 다녀와야 했습니다. 지금도 가는 길이 눈앞에 선한데, 그보다 더 선한 건 바로 해경에 드나들기 위해서 지나야 하는 입구 위, 구조물처럼 높은 곳에 세워져 있던 패널 속 표어입니다.

'안전한 바다, 행복한 국민'

제가 목포에 내려갔을 때는 이미, 다들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지만, 구조되지 못해 '실종자'로 셈하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망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예감하고 있었습니다. 대서양의 나이지리아 연안 어딘가, 선체 안 공기가 남아있는 공간인 에어포켓에서 생존자가 발견됐다는 기적 같은 이야기로 희망을 갖는 것도 한계에 다다른 시점이었습니다.

모두들 알고 있었지만, 말할 수 없었고, 그래서 더 답답한 시간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또 역시, 대부분 국민이 이래도 되나 싶게 하루하루 목구멍으로 밥이 잘 넘어가고 잠도 잘 오는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게 또 가책이 되어, 하루에도 몇 번 씩 움찔하며 그렇게 뻔뻔한(?) 자기 자신이 한심하고 원망스러운, 그런 때였습니다.

'안전한 바다, 행복한 국민'이라니. 유족이나 실종자 가족이 해경에 올 일 있어 이걸 보면 어떡하지? 조마조마할 정도였습니다. 반어도 이런 반어가. 저 남세스러운 것, 누가 하얀 천으로 저것 좀 가려줬으면, 입구를 지날 때면 후다닥 뛰어 지나쳤습니다.

얼마 전, 같은 팀 선배와 함께 세월호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선배는 지난해 사고 당시, 현장에서 취재를 하지 않았는데 그래서 그곳을 다녀온 제 생각을 궁금해 했습니다. 선배는 왜 1년도 안된 이 시점에, 국민들이 세월호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고, 언론 역시 그것을 언급하는 데, 충분히 조명하는 데 인색해졌는지("우린 아니다"라고 말하는 언론사가 있다면 죄송합니다)에 대한 제 의견을 물어왔습니다.

프랑스인가 유럽 어느 나라 대학 입시 시험이 그렇다던데, '인간은 무엇을 추구하는가' 처럼 밑도 끝도 없이 거대 담론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풀어내보라고. 저 역시 선배의 질문을 받고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왜 사람들이 세월호에 대해 이야기하고, 듣는 걸 불편해하기 시작했냐고?' 근래 가장 고민에 빠지게 한 주제의 대화였습니다.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를 포함한 우리는, 사람들은, 왜 세월호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했을까요? 가책? 분노? 답답함? 원망? 만약 그런 감정 때문이라면 그 화살의 끝은 무엇을 향해 있는 걸까요? 사고가 일어난 지 만 1년도 되지 않은 이 시점에, 세월호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되었나요?

개인적으로 목포에서 지낸 10일 외에도, 지난해 내내, 최근까지도 세월호 취재는 계속됐습니다. 그건 어느 언론사 사회부 기자든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전례 없는 큰 규모의 사고에 허둥지둥 댔고, 사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단서가 될 사실들을 충분히 취재하지 못해 여론에 뭇매를 맞았지만, 그래서 변명 같지만, 그래도 기자들은 계속 현장에, 현장 언저리에 있었고, 기사로 소화해내지 못한 것들을 보고 들었습니다.

뜬금없긴 하지만, 해경 입구를 뛰어 지나치며 눈을 감고 숨을 죽였던 아주 사소하고 개인적인 경험들, 이런 게 선배의 질문에 답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것들이 세월호에 대한 현재 우리의 감정을 설명하는 단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나치게 거대한 개념이나 질문엔 내가 경험해서 제대로 알고 있는 사실에 근거한 답이 유효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 같지만 모두의 것이기도 한 세월호에 대한 기억들을 정리해 봐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다음 글부터 세월호를 취재하며 만났던 사람들, 경험했던 사소한 것들에 대해 쓰겠습니다. 끝날 때쯤 선배의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류란 기자 peacemaker@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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