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집회는 사전에 신고해야 한다?

정희완 기자

“시민이 수긍할 수 없는 판결은 판결이 아니다.”

법원의 판단에는 시민들이 고개를 끄덕일 만한 어떤 논리, 즉 법리가 존재한다. 사법부가 정치권력의 눈치를 살피던 과거 군사독재 시절이 아니고서는 말이다. 법리가 선 판결을, 시민들은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는 <공평한가?, 그리고 법리는 무엇인가>(북콤마)를 펴냈다. 책은 2005~2014년 법원이 내린 판결 가운데 사회 변화의 흐름을 반영하지 못하거나 국민의 법 감정과 괴리된 판결, 반인권적·반민주적 판결, 반대로 인권 수호 기관으로서 법원의 위상을 정립하는 데 기여한 판결에 대한 비평을 모아놨다.

“광장으로 이끌어내 토론의 주제가 돼야 하고 이 이야기들이 다시 법원으로 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는 판결들이다. 책에서 다룬 비평을 2회에 걸쳐 소개한다. (▶ 1회 보기)

<2회>
- 존재의 절규에 답한 법원의 성별 정정 결정
- 내란음모 안되면 내란선동?
- 군인에게 헌법이란 무엇인가
- 모든 집회를 사전에 신고하라는 발상이야말로 위헌적이다.
- 이승만·박정희 다큐멘터리는 긍정, 부정적 평가를 모두 담아야 한다?

1. 존재의 절규에 답한 법원의 성별 정정 결정 (▶ 판결 내용 자세히 보기)
외부 성기를 제외하고 여성으로서 나머지 요건을 모두 갖춘 성전환 남성. 이 남성은 가족관계등록부에 기록된 성별을 여성으로 바꿀 수 있을까.

2013년 11월 법원은 “단지 외부 성기를 구비하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로 가족관계등록부상 여성으로 묶어두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와 행복추구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외부 성기가 없는 성전환 남성 30명이 성별 전환을 할 수 있었다.

‘남성(수컷)·여성(암컷)’이라는 고정된 이분법은 다양한 성소수자를 비정상·질병으로 간주하게 했다. 그러나 동성애·양성애·트랜스젠더·간성(間性) 등 성적 다양성, 곧 무지개야말로 자연과 인간의 진화를 이끄는 한 축이었다. |AP연합뉴스

‘남성(수컷)·여성(암컷)’이라는 고정된 이분법은 다양한 성소수자를 비정상·질병으로 간주하게 했다. 그러나 동성애·양성애·트랜스젠더·간성(間性) 등 성적 다양성, 곧 무지개야말로 자연과 인간의 진화를 이끄는 한 축이었다. |AP연합뉴스

법원의 결정문을 보면 민주 사회의 관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관용은 나에게 편안한 사람들과 편안한 삶의 방식을 공유하는 공간을 내어주는 게 아니라 나에게 불편한 사람들과 불편한 삶의 방식을 함께할 공간을 내어주는 것.”

2006년 대법원의 지침에 따라 법적으로 성별이 정정되려면 성전환 수술이 필요했다. 그런데 여자에서 남자로 성 전환하는 수술은 현대 의학 수준에서 보면 생명이 걸린 무척 위험한 수실이다. 수술비용은 2000만원이나 되고 건강보험료도 적용되지 않는다고 한다.

유럽인권법원은 성전환 수술과 치료를 위한 비용에 국민건강보험이 적용돼야 한다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성전화자 성별 정정에 관한 한 가장 최근에 제정된 영국의 성별인정법은 성전환 수술을 성별 정정의 법적 요건으로 규정하지 않고 있다.

정정훈 변호사는 “법적 성별과 자신의 정체성 사이의 불일치를 존재의 감옥으로 여기며 이 사회를 향해 절규해온 당사자들에게 법원이 이제 하나의 대답을 준 것”이라고 평가했다.

2. 내란음모 안되면 내란선동? (▶ 판결 내용 자세히 보기)
정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통합진보당 이석기 전 의원의 ‘내란음모’ 사건. 서울고법은 혁명조직 ‘RO’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내란음모죄 성립 요건인 “내란 범죄 실행을 합의하는 단계에까지 이르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다만 ‘내란선동’죄는 유죄로 봤다. 최근 대법원은 항소심의 판단을 유지해 이석기 전 의원은 징역 9년을 확정 받았다.

하태훈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선동은 주로 상대방의 감정을 자극하는 언어적 표현 행위가 대부분인데 언어의 추상성과 다의성으로 인해 그 적용 범위가 무한히 확장될 위험이 있어 죄형법정주의에 반한다”며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킬 우려도 크다”고 지적한다.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이 대법원 대법정으로 들어오고 있는 모습. | 정지윤 기자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이 대법원 대법정으로 들어오고 있는 모습. | 정지윤 기자

범죄를 실행할 결의가 있는 내란음모죄에 준할 정도의 불법을 인정할 수 있으려면 선동의 내용도 구체적이어야 한다고 꼬집는다. 선동된 상대방이 범죄 결의를 하게 하거나 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정도로 구체성과 적합성이 있는 선동 행위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 교수는 “사문화된 형벌 규정이 되살아나는 사건이 종종 일어나고 있다”며 “과거 독재정권처럼 국가 형벌권을 최우선 수간, 유일한 수단으로 여기고 있다”고 비판한다.

3. 군인에게 헌법이란 무엇인가 (▶ 판결 내용 자세히 보기)
지난해 4월 대법원은 마르크스주의 서적과 북한 원전 등을 가지고 있다가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 소지 혐의로 기소된 해병대 김모 중위의 상고심에서 유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무죄 취지로 파기 환송했다.

김 중위가 신학대 동아리에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해 학습하고 대안적 시각의 근현대사를 학습하긴 했으나 기독교 청년들을 위한 교육기관일 뿐 반국가단체나 이적단체와는 상관없다는 것이다. 또 김 중위가 중국 여행 중 책자를 구입한 뒤 내용을 전파하지 않고 그대로 보관한 점 등을 살펴보면 이적 행위 목적을 가지고 책자를 소지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봤다.

남북 공동경비구역(JSA)

남북 공동경비구역(JSA)

이에 앞서 군인 신분인 김 중위는 기무사에서 조사를 받았고 군사법원에서 열린 1·2심에서 모두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형사재판에서는 무죄 선고가 때로는 상처뿐인 영광으로 남는 경우가 많다. 무죄 판결을 받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들였는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도저히 알 수 없다. 그는 제대 예정일로부터 2년이 지나도록 군인 신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의무 복무 장교인 그가 수사 당국에 의해 기소되면 휴직 상태가 돼버리기 때문이다.

이광철 변호사는 “정치적,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북한보다 우월한 게 있다면 무엇일까?”라며 “군사력? 경제력? 틀린 말은 아니다. 좀 더 가까운 것은 민주주의”라고 말한다. 이어 “북한에 맞선 상황이라서 군인의 머릿속과 입까지 구속하려 드는 것이 정녕 민주주의인가”라고 반문한다.

4. 모든 집회를 사전에 신고하라는 발상이야말로 위헌적이다 (▶ 판결 내용 자세히 보기)
지난해 1월28일 헌법재판소는 집회를 열려면 48시간 전에 미리 관할 경찰서에 신고해야 하고 이를 어기는 사람은 형사 처벌한다는 집시법 조항(제22조 제2항, 제6조 제1항)이 헌법상 기본적인 집회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다고 결정했다.

집회 허가를 받으라는 것도 아니고 미리 경찰에 신고하라는 것이 과도한 부담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취지다. 헌법소원을 제기한 이들은 2010년 5월 서울광화문광장에서 ‘인터넷에서 자유롭게 말하게 해달라’ 등의 문구가 적힌 손 팻말을 들고 6~7미터 간격으로 서 있는 방법으로 미신고 시위를 주최했다가 기소됐다.

모든 집회는 사전에 신고해야 한다?

긴급하게 열리는 집회의 경우 48시간 전에 미리 경찰서에 집회 신고를 하는 것이 어렵고, 어떤 경우에는 주최자 없이 현장에서 우발적으로 집회가 열릴 수도 있다. 하지만 집시법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 아무런 내용도 담고 있지 않다.

해당 집시법은 기자회견이나 1인 시위를 규제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집시법은 기자회견이나 시위로 보지 않는다. 그러나 기자회견 도중 자연스러운 행위인 구호를 외치면 기자회견은 집회가 돼버린다. 1인 시위도 집시법의 적용을 받지 않지만, 여럿이 릴레이 1인 시위를 하거나, 여러 명이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유사한 내용을 다루면 경찰은 이를 집회로 판단해 처벌한다.

정민영 변호사는 “설령 혼란을 막으려 사전 집회 신고를 하도록 할 현실적 필요가 있다 하더라도 집회 신고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형사처벌을 하는 것은 과하다”며 “국가 형벌권의 발동은 불가피할 때만, 그것도 보충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게 형사법의 대원칙”이라고 지적한다.

신고 없이 집회·시위를 열다 적발되면 2년 이하의 징역이나 2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다.

5. 이승만·박정희 다큐멘터리는 긍정, 부정적 평가를 모두 담아야 한다? (▶ 판결 내용 자세히 보기)
시민방송 RTV는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판적으로 다룬 역사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을 방영했다는 이유로 방송통신위원회로부터 중징계 처분을 받았다. 합리적 근거 없는 증거로 진실을 왜곡했다는 것이다. RTV는 징계가 부당하다며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법원은 방통위의 손을 들어줬다. 역사 다큐멘터리는 꼭 인물의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를 공평히 담아야 할까.

모든 집회는 사전에 신고해야 한다?

‘백년전쟁’은 ‘친일인명사전’을 만든 민족문제연구소가 ‘근현대사 진실 찾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만든 6부작 다큐멘터리이다. 일제 강점기부터 이명박 정부까지 100년의 현대사를 소재로 4개의 본편, 2개의 번외 편으로 각각 만들어졌다.

이 가운데 이승만 전 대통령을 소재로 한 프로그램에서는 이 전 대통령이 독립운동을 위해 모금된 하와이 교민들의 성금을 횡령하고 하와이 법정에서 독립 운동가를 밀고했다는 등의 내용에다 비서 노디 김과의 불륜, 백범 김구 선생에 대한 비난 등 의혹도 담겨 있다.

장영주 KBS 책임프로듀서는 “법원이 역사적 사실 여부를 확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판결을 내렸고 역사적 사실에 대한 증거를 역사 왜곡이라 단정했다”고 비판한다.

재판부가 방송의 문제점이라며 표까지 만들어 지적한 부분은 보수 인터넷신문에 김모씨가 올린 글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고 장 프로듀서는 지적한다. 판결문은 그 글의 내용을 그대로 재인용해 잘못 번역된 부분도 반복된다고 한다. 김씨는 전문적인 이승만 연구자가 아니며 <독립정신>을 풀어쓴 책을 엮어내면서 원본에 있던 이승만의 친일 발언을 삭제한 채 출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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