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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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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띵동!” 이제 넌 혼자가 아냐

지난해 12월 국내 첫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 문 열어…
“필요한 건 나를 이해하고 자유롭게 살아갈 용기를 주는 사람들”
등록 2015-02-13 05:21 수정 2020-05-02 19:27

“트랜스젠더 여성인데요. 들키면 어떡하죠. 가족에게 말하기가 더 겁나요.”
청소년 성소수자인 ㅂ(19)씨는 요즘 기회만 닿으면, 강원도 홍천에서 서울 성북구까지 1시간30분 정도 버스를 타고 온다. 얇은 주머니를 털어야 하는 고된 서울행은 성북구의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이하 띵동)의 문을 두드리기 위한 여정이다. 띵동은 한국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청소년 성소수자’를 위한 ‘쉼터’다. ㅂ씨는 지난해 12월 띵동의 개소 소식을 듣고 다급하게 상담을 의뢰했다. 가족의 ‘동성애 혐오증’을 커밍아웃 하기 전에 경험했기 때문이다. 위기에 처한 그에게 띵동 쪽은 “일단 만나서 함께 방법을 찾아보자”고 답했다. 그렇게 서울행은 시작됐다. 12월에 문을 열고 홍보를 하지 않았음에도, 벌써 띵동에 알음알음으로 찾아온 청소년 성소수자는 두 명이 더 있다.

쉴 곳 아닌 살아남아야 하는 곳

한국 사회에는 성소수자 청소년에 초점을 맞춘 위기관리 프로그램이 전무했다. 2013년 5월 띵동의 밑그림이 그려졌다. 기독교를 기반으로 한 커뮤니티 ‘퀴어 코리아 얼라이언스’(Queer Korea Alliance)에서 동성애자인권연대와 섬돌향린교회, 열린문메트로폴리탄공동체교회, 차별없는세상을위한기독인연대에 청소년 성소수자를 위한 쉼터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해외에선 청소년 성소수자 홈리스가 이미 중요한 의제다. 홈리스 퀴어 청소년을 지원하는 미국 단체(fortytonone.org)의 통계를 보면, 전체 청소년 인구에서 LGBT(레즈비언·게이·양성애자·트랜스젠더의 앞글자를 딴 것으로, 성소수자를 뜻함) 청소년이 차지하는 비율은 5%이지만 홈리스 청소년 중 LGBT 비율은 40%에 이른다. 이렇게 LGBT 청소년의 가출 비율은 이성애자에 견줘 매우 높다.

2014년 9월26일,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 설립을 위한 1단계 모금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것을 축하했다. 이날 동성애자인권연대, 아름다운재단, 성북지협 즐거운교육상상 등 띵동을 응원하는 사람 80명이 모였다. 띵동 제공

2014년 9월26일,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 설립을 위한 1단계 모금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것을 축하했다. 이날 동성애자인권연대, 아름다운재단, 성북지협 즐거운교육상상 등 띵동을 응원하는 사람 80명이 모였다. 띵동 제공

그럼에도 한국에서는 청소년 성소수자들을 위한 공간이 없었다. 청소년 성소수자들은 가출 청소년을 위한 쉼터에서 이중고를 겪는다. 일부 쉼터 교사는 자신의 종교적 가치관으로 재단해 청소년 성소수자들을 차별하기도 한다. 쉼터에서 다른 청소년들에게 따돌림을 당할 위험도 있다. 남성동성애자 김익준(21·가명)씨는 “쉼터는 쉬는 곳이 아니라 필사적으로 살아남아야 할 곳이었어요”라고 했다. 그는 18살 때 부모님에게 ‘커밍아웃’을 했다. 아버지는 김씨를 내쫓으며 그의 방에 있는 물건을 치웠다. 숨통이 막혀서 한밤중에 문을 박차고 나왔다. 갈 곳이 없었다. 예전에 집을 나와 잠시 머물렀던 ‘가출 청소년을 위한 쉼터’가 떠올랐지만 그곳엔 가지 않았다. “동성애자인 저에게 ‘같은 남자끼리 뭐 어때’ 이런 농담을 하고 껄껄 웃던 분위기의 그 쉼터는 편한 곳이 아니었어요.”

청소년 쉼터는 대개 부모 동의를 받은 뒤 청소년들의 입소를 허가한다. 성정체성을 이유로 부모와 갈등을 심하게 겪은 청소년 성소수자들은 부모 동의를 받기가 더욱 어렵다. 박소라(18·가명)씨 아버지는 그에게 “네가 뭘 안다고 양성애자라는 말을 써?”라고 윽박질렀다.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대들었다가 맞았다. 학교에 가지 않고 동네를 배회하다 밤이 됐다. 황급히 ‘청소년 쉼터’에 전화를 걸었더니 부모의 동의를 받아야 머물 수 있다고 했다. “집에 연락을 하는 건 잡으러 오라는 거랑 마찬가지잖아요.”

이혜정(24·가명)씨는 거리를 전전하다가 폭력을 당한 적이 있다. 가족에게 성정체성이 알려져 정신병원에 끌려갔던 이씨는 퇴원하자마자 집을 나왔다. 이씨는 거리에서 만난 20대 ‘언니’ 집에 얹혀살았다. ‘언니’는 “규율이 엄격한 쉼터보단 나을 것”이라고 그를 설득했다. 하지만 그곳도 안전하진 않았다. 함께 지낸 지 3개월쯤 됐을 때, ‘언니’는 왜 네 멋대로 행동하느냐며 이씨를 때렸다. “그 집에서 쫓겨나면 갈 데가 없으니까 참았어요. 엄마한테 끌려가는 게 더 무서웠거든요.” 가정, 학교, 쉼터 어느 곳도 안식처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청소년 성소수자들은 거리로 내몰린다. 거리 청소년들을 상담하는 ‘움직이는 청소년 센터 EXIT’ 활동가 변미혜(40)씨는 “찾아오는 청소년 성소수자 수가 매주 서너 명 정도 된다”고 전했다. 성정체성을 알리지 않은 경우를 생각하면 그 수는 더 많을 것이다.

없는 게 놀라운 청소년 성소수자 쉼터

띵동은 절박한 위기의식에서 출발했다. 2013년 8월, 청소년 사회복지센터에 입소했던 청소년 성소수자들의 이야기를 듣는 자리가 있었다. 한 청소년 성소수자는 “입소할 때 성정체성 표시 항목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야기가 모일수록 청소년 성소수자를 위한 쉼터의 필요성이 부각됐다. 지난해 9월까지 1단계 후원금을 모금했다. 목표보다 훨씬 많은 3900만원이 모였다. 후원금의 23%는 해외에서 모금됐다. 띵동 실무자인 정민석(37)씨는 “모금 홍보 영상을 국제 자선기금 운영단체 사이트에 올렸을 때 ‘청소년 복지 서비스가 있는데 왜 그렇지, 차별 아냐?’라는 반응이었다”고 전했다. 한국에 청소년 성소수자를 위한 쉼터가 따로 없다는 것이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노력은 지원으로 결실을 맺었다. 띵동은 22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아름다운재단’ 지원사업에 선정돼 성북구에 공간을 마련할 수 있었다. 성소수자 어른들은 띵동에 살림살이를 기부하고 모금을 하면서 이들을 도왔다. 한 레즈비언 커플은 띵동에 침대를 사줬다. 한 게이 남성은 띵동에 의자를 15개나 기부했다. 동성결혼을 한 김조광수 감독이 속한 ‘신나는 재단’에서는 컴퓨터를 마련해주었다. 이렇게 자신의 아픈 과거를 기억하는 이들의 손길이 끊이지 않았다. 이들은 청소년기를 통과하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 알기 때문이다.

띵동에서 상담을 받고 있는 청소년 성소수자 ㅈ(19)씨는 “탈학교 청소년인 나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졸업장이 아니라 나를 이해하고 자유롭게 살아갈 용기를 주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청소년 성소수자 ㅎ(19)씨는 띵동 사람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는 성정체성에 대한 고민에 생활고까지 겹쳐 힘겨운 나날을 보냈다. 그는 띵동의 문을 두드린 뒤 자기 앞에 놓인 생존 문제를 해결할 기운을 얻었고, 자립을 준비하고 있다. 어렵게 모인 성소수자 청소년들은 띵동에서 서로의 경험을 나누며 홀로 지고 있던 짐을 던다. 상담을 맡은 MTF(Male To Female) 트랜스젠더 ㅂ씨는 “폭력적인 집안 분위기에 내몰려서 집을 나온 지 3~4년밖에 안 됐다”며 “이제는 위기가 극복됐지만, 그 시절의 상처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가까스로 청소년기를 탈출한 LGBT들은 ‘생존자’에 가깝다.

무지개 조명이 켜진 등대

띵동은 찾아오는 청소년을 맞는 일뿐 아니라 집을 나온 청소년 성소수자도 찾아갈 계획이다. 2월5일부터 청소년 거리상담을 해온 단체의 도움을 받아 거리에서 청소년 성소수자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정민석씨는 “가출 위기를 겪는 청소년 성수자의 비율이 높을 것으로 추산되지만 한국에는 통계조차 없다”며 “거리에서 말을 걸고 수다를 떨면서 청소년 성소수자들에게 필요한 것을 지원하는 일이 띵동에 남겨진 숙제”라고 말했다. 띵동에는 간판 대신 LGBT의 상징인 6색 무지개 조명이 불을 밝힌다. 누군가에게는 등대가 되어줄 무지개다.

이수현 인턴기자 alshgogh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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