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성폭력 피해자와 가해자의 이상한 동거

임재성 2015. 2. 8. 0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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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만 되면 더 생각난다. 그날의 일들... SNS 내용... 다 생각난다. 친구들이 쑥덕거리는 것 같아 학교도 못가고 있다. 내가 죽으면 (가해 친구가) 반성하지 않을까..."

- 성폭력 피해 여고생 A양 '상담기록' 중

A양을 만나기 전, 피해 학생의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담일지에는 18살 소녀의 처절한 고통과 절규가 고스란히 기록돼 있었습니다.

가장 아름다워야 할 '고3' 마지막 학창시절,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요?

■ '가해자'로 바뀐 '절친'

A양 성폭행 미수 사건의 가해 남학생은 2명이었습니다. 이 중 B군은 'A양의 상담일지'에서 '친한 친구', '믿었던 친구'라고 표현돼 있던 같은 학교 동급생입니다. 사건 당일에도 A양은 B군이 여자친구와 헤어져 위로하기 위해 B군을 만났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수사당국에 제출한 증거자료, 'B군의 SNS 메시지'에는 A양이 말하던 '친구'는 없었습니다. '수면제를 먹이자'부터 입에 담기 힘든 범행 방법까지...

메시지 속에는 분명 '친구'는 없고, '가해자'만 있었습니다. 그 날, A양의 '믿었던 친구'는 성폭력의 가해자로 바뀌었습니다.

'장난이었다', '그런 적 없다'던 가해자들! '대질 심문'과 '거짓말 탐지기'까지 동원된 수사를 통해 두 남학생은 불구속 기소됐고, 재판을 앞두고 있습니다.

■ 성폭력 '피해자'와 '가해자'의 '이상한 동거'

A양은 사건 직후, 외상 후 스트레스와 우울증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A양의 고통은 이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B군에게 '퇴학' 결정이 내려진 지 한달 남짓, B군이 다시 등교를 시작했습니다. 같은 학교, 같은 건물에서 '가해자'와 생활하게 된 A양, 상담일지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B군과 부딪히는 것이 무섭고, 싫다. (… 중략 …) B군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을 보면 화가 난다. B군의 친구들이 B군을 봐주라고 한다. B군을 매일 보는 것이 너무 힘들다."

- 성폭력 피해 여고생 A양 '상담기록' 중

학교에 물었습니다. A양을 위해 어떤 보호조치를 취했냐고. 학교 측은 학교폭력 매뉴얼에 따라 모든 보호조치를 했다고 답했습니다. B군에게 '접근금지' 명령을 내렸고, 상담과 함께 A양의 상황을 주시했으며, A양이 B군을 보는 것이 너무 힘들면 '재가학습'도 허가해 주겠다고 했답니다. A양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학교만 몰랐던, 그러나 학교 친구들은 모두 알고 있었던 A양의 학교 생활은 이랬습니다.

"B군과 너무 많이 마주치니까... 복도에서도 만나고, 급식실에서도 자주 만나고.. B군이 매점도 자주 다니고 하니까...A양이 B군을 보고 나면 교실에 와서 혼자 울어서 저희가 달래줬었어요. 아니면 조퇴를 하고..."

- A양 같은 학교 동급생들

A양은 B군과 퇴학 결정이 보류됐던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2월 졸업까지 한 학교, 한 공간에서 생활했습니다. 그리고 이달, 두 사람은 함께 졸업식을 치르게 됐습니다.

■ '이상한 동거' 명령, 주체는 없다?!

A양이 왜 이런 2차 피해를 겪어야 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누가, 왜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도 묻고 싶었습니다.

【해당 학교 & 경기도교육청 징계조정위원회】

처음 학교의 입장은 단호했습니다. '퇴학'이었습니다. 그러자 B군 측은 경기도교육청 징계조정위원회에 이의제기를 합니다. 그러나 이곳 역시 '퇴학은 정당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경기도교육청 행정심판위원회】

B군이 다시 학교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곳, '경기도교육청 행정심판위원회'였습니다. B군 측이 이번에는 '행정심판'을 제기한 것입니다. 그리고 행정심판위원회는 B군의 손을 들어 줬습니다. '최종 심판 결과가 나올 때까지 B군이 다시 학교를 다녀도 좋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행정심판위원회의 '퇴학 처분 정지' 결정에는 문제가 없었을까요? 경기도교육청의 한 관계자의 답은 '아니다'였습니다.

"경기도교육청 행정심판위원회가 직접 '지금 (퇴학)집행이 정지됩니다.'라고 결정하기 어렵죠. 왜냐하면 사립학교의 결정은 '행정심판'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원칙적인 처리를 했다면 최종 처분이 있을 때까지는 학교에 등교할 수 없었던 거죠."

- 경기도교육청 관계자

행정심판의 대상은 '행정기관', 그러니까 경기도교육청 징계조정위원회의 결정에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사립학교의 결정은 '행정심판'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행정심판 결과는 아무런 '절차' 없이 학교에 그대로 적용됐습니다.

또 하나, 취재 과정에서 이상한 점이 포착됐습니다. 학교에 B군의 등교를 '명령'한 곳이 단 한 곳도 없다는 것입니다.

행정심판위원회는 도교육청 징계조정위에 재심결과를 통보했을 뿐이라고 했고, 도교육청 징계조정위는 행정심판 결과를 그냥 학교에 '안내' 했을 뿐이랍니다. 반면 학교는 상급기관인 도 교육청의 '명령'을 받아 처리한 일이랍니다. 결국 A양과 B군의 '이상한 학교생활'의 책임자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두 달이 지나 겨울 방학을 앞둔 지난해 12월, 행정심판위원회는 B군의 퇴학 대신 '특별교육'과 '사회봉사'를 결정했습니다.

■ "누굴 위한 '제도', 누굴 위한 '인권'입니까?"

피해학생의 아버지는 현재 지병으로 병상에서 투병 중입니다. 그런 아버지가 화났습니다. 딸이 겪은 가슴 아픈 사건도 사건이지만, 딸에게 더 큰 고통을 준 '제도' 때문입니다.

첫째, 퇴학을 취소한 학교와 교육청의 두 위원회는 왜 퇴학이 취소됐는 지 피해학생에게 조차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또, 학교에서는 피해학생과의 분리를 위해 가해학생을 다른 교육기관에 위탁할 수 있도록 돼 있지만 이것도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모두 가해학생의 '인권'이 이유였습`니다.

두번째, 학교폭력 매뉴얼도 문제입니다. 메뉴얼 60페이지 <법령 53>에는 학교의 징계에 대해 가해학생이 이의제기를 하면 자동으로 징계가 '유보'되도록 하고 있습니다. 법적 근거도 모호합니다. A양과 같은 2차 피해가 언제,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반면 올해 개정된 이 매뉴얼의 피해학생 보호조치 규정은 기존 구체적인 사례가 삭제되고 '노력한다'로 바뀌었습니다.

응당 가해자 역시 '인권'을 존중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A양의 아버지는 누굴 위한 제도고, 인권인지 되물었습니다. 가해자의 인권은 존중받으면서, 정작 피해자의 인권은 보호받지 못하는 것이 옳은 제도냐고... 이 아버지가 A양에 대한 재판과 함께, 또 다른 법적싸움을 준비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바로가기 [뉴스9] '성폭행' 피해-가해학생 한 학교서 수업…악몽 계속

임재성기자 ( newsism@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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