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철옹성’ 독일군 암호망 뚫은 천재 수학자 튜링의 일대기읽음

한윤정 선임기자

▲ 앨런 튜링의 이미테이션 게임…앤드루 호지스 지음·김희주 외 옮김 | 동아시아 | 872쪽 | 3만6000원

[책과 삶]‘철옹성’ 독일군 암호망 뚫은 천재 수학자 튜링의 일대기

애플사의 로고는 한입 베어먹은 사과다. 컴퓨터와 사과가 무슨 상관일까. 여기에 앨런 튜링(1912~1954)이란 인물이 끼어든다. 1935년 지능을 가진 ‘만능기계’(오늘날 튜링기계)라는 개념을 창안해 컴퓨터의 최초 형태를 만들어낸 영국의 천재 과학자 튜링은 동성애 범죄로 체포됐다 사면된 뒤 청산가리를 주입한 사과를 먹고 자살했다. 이 때문에 애플사 로고가 튜링을 기리기 위한 것이란 추측이 나온다.

천재 과학자이자 동성애자로서 튜링의 삶은 너무 극적이었다. 그는 컴퓨터와 인공지능의 선구자일 뿐 아니라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사용했던 난공불락의 암호 에니그마를 해독, 연합국의 승리를 이끈 전쟁영웅이었다. 그런데 전쟁 기밀에 깊이 관여한 국가과학자라는 것, 그러면서 당시 천형과도 같았던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함께 작용해 그의 삶과 업적은 오랫동안 비밀에 부쳐졌다.

원제가 ‘앨런 튜링: 에니그마(수수께끼)’인 이 책은 1983년 처음 나왔다. 그 자신도 수리물리학자인 저자는 수학, 과학, 전산, 전쟁사, 철학, 동성애 등의 주제를 오가면서 튜링의 삶을 촘촘히 엮어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30년이 지나면서 튜링이 참여했던 암호 분석작업의 이모저모가 드러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시점이었다. 튜링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커지면서 책은 30년 이상 개정을 거듭했다. 번역 원서는 2014년판이다.

어린 시절의 튜링은 너저분한 외모에 말을 더듬지만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전형적인 ‘너드’였다. 1927년 사립학교인 셔본학교에 입학한 그는 첫사랑인 크리스토퍼 모컴을 만나 자신의 성 정체성을 깨닫는다. 1930년 결핵으로 사망한 모컴은 튜링과 수학이나 과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나중에 지능을 가진 기계를 만들자고 약속하기도 했다. 1931년 케임브리지대 킹스칼리지에 입학한 튜링은 수학을 전공하며 수치해석, 확률, 통계 등에 관심을 가졌다. 당시 그의 문제의식은 “어떤 기계에 대한 설명만 있으면 그 기계를 모방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바로 인간을 대체할 전기뇌(컴퓨터)의 아이디어가 탄생한 것이다.

1939년 튜링은 정부 신호암호학교의 암호해독반 수석책임자로 뽑혀 독일의 암호 에니그마 체계를 해독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세계에서 가장 정교하고 난해한 암호로 손꼽히는 에니그마는 매일 회전자의 위치가 바뀌기 때문에 24시간 안에 그날의 암호문을 해독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튜링은 1940년 ‘봄베’라는 기계를 만들어 독일군 기상 예보 암호문을 해독하면서 무시무시한 잠수함 ‘U보트’를 괴멸시키는 승리를 견인했다.

전후 국립물리연구소에서 컴퓨터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한 튜링은 1948년 맨체스터대 왕립협회 전산연구소 부소장으로 일했다. 이때 인공지능 연구에 몰두한다. 이후 왕립협회 회원 선출, 대영제국훈장 수훈 등 승승장구하지만 결국 동성애로 인해 발목이 잡히게 된다. 1952년 아널드 머레이란 남자를 만나 관계를 가진 튜링은 자신의 집에 도둑이 들자 경찰에 신고한다. 도둑은 머레이의 지인이었다. 경찰에 출두한 튜링은 자신과 머레이의 관계를 거리낌 없이 이야기했고, 그것이 ‘중대한 외설행위’로 형법에 위배돼 화학적 거세를 당하고 자살하기에 이른다.

저자는 튜링을 ‘성적 취향을 포함한 정신의 자유’를 추구한 인물로 본다. 그는 ‘국가과학자’였으나 그가 연구한 순수수학의 보편성은 시대와 국가를 초월해 방대한 영향을 미쳤다. 튜링은 인간을 모방하는 기계, 스스로 학습하는 기계를 구상했으며 후기에는 불가사리나 꽃의 다각형 대칭구조로부터 유전자에 내장된 기호가 어떤 생리·화학적 과정을 거쳐 질서정연하면서도 서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지를 연구하는 형태발생이론에 몰두했다. 그의 이론은 오늘날까지 고스란히 주요 연구 과제로 이어지면서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100명의 인물’(1999년 타임), ‘100명의 위대한 영국인’(2002년 BBC 전국 여론조사) 등의 명성을 얻고 있다. 2013년에는 그의 외설죄가 특별사면을 받아 무죄 처리됐다.

그럼에도 그의 삶은 짧고 불운했다. 스스로 업적을 드러내지 않은 탓에 ‘알고리즘의 거장이자 프로그래밍의 창시자’라는 위치 역시 오랫동안 공인받지 못했다. 저자는 튜링이 먹은 사과가 “1940년대의 온갖 독으로 채워진 사과”였다고 말한다. 또 그의 삶을 ‘이미테이션 게임’으로 규정한다. 이는 ‘인간을 모방하는 기계’(컴퓨터)라는 아이디어뿐 아니라 당시 관습과는 너무 다른 생각과 행동을 했던 그의 삶이 끊임없는 모방이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이미테이션 게임’은 국내에서 개봉하는 튜링의 전기영화 제목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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