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범죄 사각지대'에 놓인 탈북 여성들

김민정 2015. 1. 24. 0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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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간죄에 관대한 북한 문화 탓 격렬한 저항 표출 어려운 데다

가해자 보복 두려워 소극적 대응, 처벌·피해 구제 전혀 안 이뤄져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 땅을 밟은 40대 탈북 여성 A씨. 대다수의 탈북민이 그렇듯 가족을 북에 두고 온 A씨는 홀로 타지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지난해 초 A씨가 개설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계정으로 남성 B씨가 접근해 왔다. 게시글을 통해 A씨가 탈북자임을 눈치 챈 B씨는 A씨에게 위로를 건네며 자신을 가족처럼 의지하라고 꼬드겼다. 북쪽의 가족 생각에 A씨는 그의 호의를 의심 없이 받아들였으나 직접 대면한 B씨는 야수로 돌변해 A씨를 성폭행했다. A씨가 성폭행보다 더 큰 상처를 받은 것은 검찰 수사 과정에서였다. 검찰은 A씨가 소리를 질러 위험을 알리거나 적극적으로 반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B씨를 불기소 처분했다.

A씨 사례는 성범죄 노출과 피해 대응에 속수무책인 탈북 여성들의 실태를 그대로 보여준다. 서울시 천주교성폭력상담소가 2013년 8월부터 141명의 북한이탈여성을 대상으로 상담ㆍ심리치유프로그램을 운영한 결과, 17명이 A씨와 유사한 형태의 성폭행 피해를 당했다. 이 중 가해자가 제대로 된 법의 심판을 받은 경우는 단 한 건에 불과했다.

상담소 관계자는 23일 "기본적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의존성이 큰 탈북 여성은 성범죄에 노출될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며 "그런데도 범죄 발생 이후 처벌이나 피해 구제가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성범죄에 대한 남북의 법질서 및 인식 차이는 탈북 여성이 성폭행 피해에 적극 대응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로 꼽힌다. 북한에도 강간죄는 있지만, 아동을 상대로 하거나 흉기ㆍ위력을 이용한 성범죄만 사실상 처벌을 받는다. 성인 남녀 사이에서 생기는 일반적인 성범죄는 북한 형법 8장에서 규정한 '남녀의 음탕한 행위에 관한 죄'로 다스려지고 있다. 북한에선 남녀 모두에게 책임을 묻고 피해자인 여성은 사회적으로 매장된다는 것이 탈북 여성들의 공통된 증언이다. 성폭행 위험에 처해도 소리를 지르는 등 격렬한 저항을 해야 한다는 인식이 부족한 것이다. 여러 차례 생사의 고비를 넘기고 한국으로 건너온 탈북 여성들로서는 가해 남성이 훗날 자신을 해코지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크다는 점도 이런 소극적 태도에 영향을 미친다.

한 탈북자는 "북한에선 여성이 완강히 반항하다 숨지지 않는 이상 성인 남녀 간에 강간은 성립할 수 없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며 "여성의 동기 유발로 성범죄가 일어났을 것이라는 봉건적 사고에 머물러 있다"고 설명했다.

또 대부분 즉결로 처리되는 북한과 달리 조사 기간이 훨씬 길고 진술도 여러 차례 해야 하는 남한의 수사 체계도 탈북 여성들에겐 어려움이다. 피해 여성이 조사 절차나 용어 등을 잘 이해하지 못해도 도움을 받기 어렵다. 경찰 관계자는 "탈북 여성의 성폭행 피해 신고가 접수될 경우 '탈북자 관리를 맡은 보안과나 관련 단체에 협조를 요청해야 한다'는 의무 규정은 없다"고 말했다.

사정이 이런데도 현재 탈북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 대처법이나 남북간 성적 가치관 차이 등에 관한 교육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북한 이탈주민의 사회 정착을 돕는 통일부 산하 교육기관인 하나원이나 탈북자 대안 학교에서 특강 형태로 한 두 차례 통상적인 성교육을 진행하는 정도다. 한 탈북 여성은 "성교육 특강 때 피임기구 사용법 등에 대한 안내를 받는 게 전부"라고 말했다.

김미순 천주교성폭력상담소 소장은 "성범죄 사각지대에 놓인 탈북 여성의 열악한 처지를 해소하기 위해선 피해 대처법 교육에 앞서 우리 사회가 이들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노력이 우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민정기자 fac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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