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국민이 '졸'로 보입니까?

강우일 2015. 1. 24. 0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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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사고 직후 한 유가족이 이런 얘기를 했다. 국민의 생명을 지켜주지 못한 국가는 국가가 아니다, 이런 국가의 국민으로 살고 싶지 않다고. 문제가 일단락되면 다른 나라로 떠나고 싶다고. 그 얘기를 들으며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가 진정 제대로 된 국가 구실을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지난 8년간 제주 강정에서 해군기지 반대운동을 펼치는 동안 많은 신부와 수녀, 신자들이 경찰에 붙들려가 벌금을 내고 옥살이도 했는데, 이 과정을 지켜보면서 생각이 많았다. 영화 <카트>에서도 비정규직 아주머니들이 결국에는 경찰과 용역에 끌려 나가지 않나. 왜 경찰이 저런 일을 해야 할까? 국민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게 경찰이고 국가일 텐데, 왜? 저는 오늘 '국가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여러분과 생각을 나누고 싶다.

사전에는 국가가 이렇게 정의되어 있다. '일정한 영토를 보유하며, 거기에 사는 사람들로 구성되고, 통치권을 갖고 있는 공동체.' 다시 말해 국가는 국민을 다스리는 권력을 가진 주체요, 국민은 국가의 통치를 받는 아랫사람이라는 인식이 사전적 정의에 깔려 있다. 반면 우리 헌법 제1조에는 이런 표현이 나온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에 따르면 국가의 존재 근거는 국민이다. 곧 국가가 먼저가 아니라 국민이 있고서야 비로소 국가가 성립된다. 그런 만큼 국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하며,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고 지켜야 한다. 국가를 위해 국민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헌법이 법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렇게 인간의 기본권을 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기본권이 그 어떤 규범보다 우선하기에 각종 법률이 인간의 기본권을 제약하거나 훼손하지 않도록 감시하라는 게 헌법의 기본 정신이다. 헌법 제2장은 '국민의 권리와 의무'를 10조에서 39조까지 무려 29개조에 걸쳐 길게 규정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27개가 국민의 권리와 자유에 대한 내용이다. 차별받지 않을 권리, 교육받을 권리, 거주 이전의 자유, 직업 선택의 자유, 양심의 자유, 언론의 자유 등등. 나머지 2개조만이 의무에 관해 말하고 있을 뿐이다(납세와 병역). 이를 보면 헌법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가 확연히 드러난다. 우리 헌법은 근본적으로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엄과 권리가 보장되어야 하며, 정부라고 해서 이를 함부로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에 대못을 박기 위해 이토록 길게 국민의 권리와 의무에 관한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헌법 정신이 현실에서 제대로 이행되고 실현되고 있는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공무원은 말할 것도 없고 법관들조차 우리 헌법의 구조와 기본 정신에 대한 이해를 갖추고 있는지…. 국가에 대한 개념 자체가 왕조 시대 내지 일본 제국주의적 국가관에 머물러 있는 사람도 많다. 국가는 국민 위에 좌정해 통치하는 최고의 기구이고, 국민은 이에 복종해야 한다는 식이다. 우리 역대 정부는 이런 낡은 국가관에 기반해 헌법 정신을 도외시하는 위헌적인 법률을 잘도 만들어왔다. 사법부 또한 정부 입맛에 맞는 판결을 수없이 쏟아내 왔다. 이로 인해 체포·고문·사형당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나. 인혁당 사건이나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이 대표적이다. 30~40년이 지난 이런 사건들에 대해 오늘날 재심 판결이 나오고 있다. 문정현 신부도 그 결과 1억원 넘는 보상금을 챙긴 분 중 하나다. 그 돈 받자마자 강정에 땅을 사시더라. 건물 올릴 돈은 없으니 땅만(웃음). 이 땅 위에 강정평화센터를 짓자 해서 저도 요즘 뛰는 중이다. 군인들은 전쟁을 준비하는 건물을 짓지만 우리는 평화를 만들기 위한 작은 센터를 지으려 한다.

두 차례 세계대전이 인류에게 남긴 깨우침

사실 돈 몇 푼 받는다고 국가 폭력으로 고통받은 분들의 망가진 생애가 보상이 되겠나. 돌아가신 분들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20세기 들어 두 차례 세계대전을 거치며 인류가 깨달은 것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인간의 생명이라는 사실이었다. 인간의 생명을 멋대로 훼손할 수 있는 권리는 그 누구도 갖지 못하며, 국가라 해도 인간의 생명과 기본권을 박탈할 권리는 없다는 것을 수천만명을 죽이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그렇게 나온 것이 1948년 유엔이 채택한 세계인권선언이다. 그런데 유엔에 가입했다면서도 여전히 국민을 국가의 졸(卒)로 취급하는 곳들이 많다. 국민의 인권은 언제든 국가에 의해 제약될 수 있다고 여긴다. 얼마 전 <비정상회담>이라는 방송 프로그램에서 사형제를 놓고 동서양 젊은이들이 토론을 벌인 얘기를 어느 수녀님이 전해주셨다. 중국 청년은 '극악무도한 범죄는 응징해야 한다. 사형제는 범죄 피해자들을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필요하다'라며 사형제에 찬성하고, 프랑스·독일 등 유럽 청년들은 '아무리 나쁜 짓을 한 사람이라도 국가가 한 인간의 생명을 박탈할 권리는 없다. 그것은 또 하나의 살인이다'라며 사형제에 반대했다더라. 이 유럽 청년들이 교회에 다니거나 신앙이 있어서 그랬을 것 같지는 않다. 그보다는 아마도 어릴 적부터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교육을 받으며 자라온 문화적 토양이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흔히 우리는 국가를 숭고하고 고귀한 가치를 지닌 존재인 양 여기는 경향이 있다. 국가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지켜야 하는 신성한 존재요, 국가를 위해 몸 바쳐 싸운 사람은 찬양받아 마땅한 애국자라는 식이다. 그러나 국가가 그토록 절대적인 권위와 가치를 지닌 존재인지, 역사를 돌아보며 성찰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유대인을 학살한 독일 나치 정권이나 한국을 식민지화하고 난징에서 30만명을 학살한 일본 제국주의 정권 모두 신성한 국가의 이름으로 힘없는 대중을 유린했다. 미합중국 또한 마찬가지다.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했을 때 유럽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간 이주민은 100만명가량이었다. 본래부터 이 땅에 살고 있던 아메리카 원주민은 이보다 10배 정도 많은 1000만명이었고. 그런데 그로부터 100년이 흐른 뒤 이주민은 1억명으로 불어났고, 원주민은 50만명으로 줄어들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투투 대주교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선교사가 아프리카에 왔을 때 그들은 성경을 갖고 있었고, 우리는 땅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함께 기도하자고 했고, 우리는 눈을 감았습니다. 눈을 떴을 때 우리는 성경을 갖고 있었고, 그들은 땅을 갖고 있었습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일어난 일이 아메리카에서도 똑같이 일어났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본래 땅을 사유(私有)한다는 개념이 없었다고 한다. 자연은 하늘이 내린 선물이고 모두가 공유할 자격이 있다고 여겼기에 그들은 이주민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이주하자마자 맨 먼저 한 일은 땅에 금을 그어 제 것이라 주장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저항하는 원주민들은 총과 칼과 대포로 몰아내고 학살했다. 이것이 오늘날 미합중국(USA)이라는 국가가 건립된 경위다. 그랬던 이 나라가 오늘날 자기네 땅에 들어오겠다는 사람들을 봉쇄하고 밀입국자로 가차 없이 쫓아내는 걸 보면 무슨 자격으로 저런 권리를 행사하나 싶기도 하다. 성서의 전통으로 보면 땅은 본디 인간이 독점할 수 있는 소유물이 아니다.

이런데도 강력한 리더십을 원하는가

한국 얘기도 해보자. 1948년 4월3일 제주도 내 좌익 무장세력이 12개 경찰지서를 습격하면서 4·3사태라는 게 일어난다. 당시만 해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이니까 미국 군정 책임자가 국방경비대를 제주에 파견하기로 결정했고, 이것만으로 사태가 수습되지 않자 그해 12월에는 이승만 정권이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한다. 그런데 당시 건국 헌법에는 계엄령과 관련한 조항 자체가 없었다. 이에 법적 근거가 없다는 문제 제기가 나오자 이승만 정권은 일제 치하 법률에 있었으니 문제없다는 논리로 계엄령을 밀어붙인다. 그 뒤 겁에 질린 중산간 마을 주민들이 뭐가 뭔지 모른 채 산으로 숨어들었고, 군경은 이들 마을을 하나씩 포위해 초토화하면서 사람들 씨를 말렸다. 그 결과 당시 제주 인구의 10%에 해당하는 3만여 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름이 정확히 확인된 사망자만 1만4000명가량이고, 나머지는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는 사람들, 그러니까 그냥 사라진 사람들이다. 6·25전쟁이 터졌을 때도 공산당에 협력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보도연맹 가입자 20여만 명이 학살당했다.

역사를 보면 소수의 지도자가 자기 명분과 이익을 위해 정당성이 지극히 의심되는 방식으로 과도한 폭력과 범죄를 행사해온 사례가 너무도 많다. 국가를 신격화하는 것 또한 이들이 흔히 써온 수법이다. 왕정 시대에는 임금이 신과 소통하는 제관을 겸임했다. 하늘로부터 권위를 부여받은 신성한 존재인 양 백성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해서다. 이스라엘의 경우 재미있는 것이, 이집트에서 살던 노예들이 이주해 모여 살기 시작한 초창기에는 국가 없이 부족 단위로 200여 년을 지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자기들도 왕을 세워야겠다고 백성들이 아우성을 치자 당시 예언자였던 사무엘은 하느님에게 들은 그대로 왕정의 실상을 이렇게 전한다. '당신들을 다스릴 왕의 권한은 이러하다. 그는 당신의 아들들을 데려다 그의 병거와 말을 다루는 일을 시킬 것이다. …왕의 밭을 갈게 하고, 곡식을 거둬들이게 할 것이다. 그는 당신의 밭에서 난 가장 좋은 것을 가져다 신하에게 줄 것이며… 당신의 양떼 가운데 열에 하나를 가져갈 것이며… 마침내 당신까지 왕의 종이 될 것이다'(<사무엘상> 8장 11~17절).

그런데도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강력한 리더십을 원한다. 국가의 통치 권력에 어떤 초월적 권위가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지상에서 참된 평화를 실현하려면 우리가 국가라는 신화화된 지평 위로 한 단계 더 올라서야 한다. 국가가 아니라 국가를 이루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엄한 인격을 최우선의 가치로 놓고, 인류 전체의 행복을 추구하는 초월적인 전망을 열어가야 한다. 그러지 않는 한 나라와 나라 사이 마찰과 분쟁, 이번에 프랑스 파리에서 벌어진 것 같은 끔찍한 테러는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지난해 일본 후쿠오카에서 열린 평화대회에서 만난 한 외국인 수녀님이 자기소개를 이렇게 하더라. '제 이름은 마리아, 제 국적은 하늘나라입니다'라고. 참가자 모두 박수를 쳤다. 물론 우리가 현실 속에서 국가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럼에도 국가가 본연의 위상과 의미, 본질을 지키면서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국민이 국가를 끊임없이 감시해야 한다. 국가가 국민 위에 서지 않게끔, 국민 밑으로 내려가게끔, 우리 모두 국가 권력을 독점한 소수의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진실을 외치고 호소해야 할 것이다.

정리·녹취/ 김은남·장일호 기자

강우일 (천주교 제주교구장·전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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