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기내 면세품, 월매출 170억 넘는데도 승무원은 '한숨'

최우철 기자 2015. 1. 17.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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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만 '땅콩회항' 대책.. 부당 처우의 계보학 ①

"이번만 넘어가면 된다는 분위기다." 내부 제보가 빗발치고 있습니다. 대한항공 얘기입니다. 새해 벽두, 땅콩 회항 사태 재발을 막겠다며 사내 소통 강화를 약속한 그 회사가 맞나 싶습니다. 근본 원인은 뭘까요. 회사와 공항, 기내까지 그들의 비행 일정을 따라가 봤습니다. 승무원들은 불합리한 처우를 감내하고 있습니다. 인권침해에 가까운 실태 중에는, 믿기 어려운 것도 많았습니다. (작성자 주)

●출근길부터 암기전쟁… 군기 잡는 '대한여고'

비행 1시간 45분 전, 대한항공 국제선 승무원은 인천 운서동 2850-13번지 인하국제의료센터로 집결해야 한다. 이 건물 8층에 IOC라는 브리핑룸이 있다.

건물 정문엔 항상 승용차들이 서 있다. 승무원을 데려다 주러 차를 몰고 온 가족이나 연인들이다. 국제선 1편 객실 승무원은 16~17명. 국제선 여객기 한 대가 뜨는데, 매번 그만큼의 작별이 있다. 승무원은 차에서 내리자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배웅을 마친 사람은 차를 몰고 떠난다. 사랑하는 딸이거나 미래를 약속한 연인이거나, 떠나는 사람은 모르고, 남은 승무원은 안다. 이제 몇 시간 혹은 며칠 간, 참고 견뎌야 할 일이 너무 많다는 걸.

대한항공에서 10년 넘게 일한 남자 승무원 이 모 씨를 만났다. "월 10회 이상이다. 10회가 뭔가. 그냥 수시로…" 건물 앞에서 본 광경을 얘기했더니, 답답한 심경이 대꾸로 돌아왔다. 국제선 승무원의 출근길은 필요 이상으로 긴장돼 보였다. 왜 그런가 물었다. "우리 회사를 '대한여고'라고 부른다는 얘기 들어봤을 거다. 출근부터 여고식 쪽지시험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회사가 불시 업무 테스트를 자주 본다는 얘기다. 오너 일가와 경영진이 내려보내는 모든 업무지시가 시험 범위다. 시험지가 있고, 그 자리에서 그걸 풀고, 채점도 하고 점수도 말해준다.

▲ 기내 면세품 판매 목표액을 공지하고, 쪽지시험도 치르는 대한항공 국제선 브리핑룸

승무원들은 쪽지시험 성적이 인사고과에 반영된다고 믿고 있다. 엄청난 스트레스다. 심지어 먼저 시험을 본 승무원에게 문제 유출을 요구하는 일도 허다하다. 누군가가 쪽지시험 보기 싫어서 무단결근한 적이 있다는 소문이 돌 정도다. "문제가 어디 범위라는 게 없어요. 그냥 전 업무지시가 범위니까. 그 어마어마한 양을, 그러니까 수시로 이걸 들여다보고 달달 외우고 있어야 하는 거예요."

평가자는 훈련원 소속 직원들이다. 그런데 취재에 응한 승무원들 가운데, 실제로 쪽지시험이 고과에 반영되는지 아는 승무원은 없었다. 김 씨는 회사를 어느 정도 다닌 뒤에 쪽지시험의 목적을 알게 됐단다. 막연히 숙지를 안 하면 불이익을 받는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 일종의 '군기 잡기'로 업무를 개시토록 하는 게 회사가 바라는 거라고 했다.

쪽지시험에도 엄연히 출제 경향이 있다. 최다 기출 분야는 기내 면세품 판매 규정. 새로운 업무지시나 변경된 규정은 '크루넷'이란 대한항공 사내망에 올라온다. 한 달 치 공지사항을 세어 봤더니, 면세품 관련 내용만 10건이 넘었다. 사나흘에 하나씩 암기사항이 느는 것이다.

8층 브리핑룸에선 각 팀장이 노선별 특징과 안전, 서비스에 관한 브리핑을 한다. 이때 절대 빠지지 않는 게 있다. 자신들이 탑승할 노선의 면세품 판매 기록이다. 팀장은 노선별 면세품 최고 판매액과 평균 판매액을 공지한다. 팀장에겐 인사고과가 달린 문제다. 승무원 이 씨는 "비행기에서 지금껏 최고 판매액은 얼마였고, 평균 판매액은 얼마였는지 알려주는데, 강박관념 비슷한 게 생긴다"라고 말했다. "브리핑이 끝나면 평균은 해야 한다는 마음을 먹고 건물을 나선다"고 했다.

대한항공은 왜 이런 의식 아닌 의식을 강제하는 걸까. 매출 규모가 답이다. 2013년 10월 한 달, 모든 국제선의 기내 면세품 매출액은 16,693,083달러. (현재 원-달러 환율 1077원 기준) 179억 8천만 원이 넘는다. 국제선 승무원은 약 200개 팀으로 구성되니, 1팀당 약 9천만 원 어치를 판 셈이다. 제조사 수익과 운송 수수료 등을 뺀 대한항공 순이익은 50~60%이다.

▲ 대한항공의 외주 용역회사 직원이 승무원들이 판매할 면세품을 기내로 나르고 있다

●공항에서 그들은 왜 '일사불란' 달려야 하나

기자는 취재를 위해 며칠 간 대한항공 승무원들의 동선을 따라다녔다. 그들은 항상 일사불란했다. 버스를 타고 내릴 때도, 단 몇 초 만에 탑승과 하차가 끝났다. 인천국제공항 3층에 내린 그들은 '대오'를 유지하며 출국장을 가로질렀다. 걸음은 경보 선수만큼 빨랐다. 승무원용 전용 출입구가 있는데, 조금이라도 수속이 지체될 것 같으면 순식간에 두 팀으로 대열이 분리됐다. 빠르고 정확하게 최단 코스를 주파하는 육상 선수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들의 몸에 밴 건 뭐였을까. '판옵티콘' 아래 수인처럼 그들은 자신들을 주시하는 권력을 무의식적으로 의식하며 살고 있다.

▲ 대한항공 국제선 승무원들은 공항에서 매우 빠르게 이동한다

취재 과정에 만난 전직 승무원 김 씨는 대한항공 승무원만의 일사불란함은 '지적 당하지 않으려는 공포'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자칫 징계로도 이어질 수 있는 절대적인 '지적'. 그건 조양호 회장과 조현아 전 부사장 등 오너 일가만 할 수 있다고 했다. 조현아 전 부사장의 검찰 공소장에서도 드러나듯, 오너 일가에겐 '내가 곧 매뉴얼'이다.

취재를 위해 만난 승무원들은 하나같이 오너 일가를 극도로 두려워했다. 김 씨는 옛일을 떠올리며 헛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오너 일가가 공항에 나타나면, 공항공사나 법무부 사람들이 저희를 챙겨줬어요. 공항 상주 직원들이 'K.I.P가 떴다'면서 어서 여기를 벗어나라고 귀띔해 주는 게 다반사죠. 눈에 띄면 대개 지적을 당하고, 심할 땐 욕설을 들으니까, 자기들이 알아서 경고 아닌 경고를 해주는 거죠." K.I.P란 대한항공의 K와 VIP를 합친 승무원들만의 암호였다.

하지만, 아무리 걸음이 빨라도 오너 일가의 '판옵티콘'을 빠져나갈 수 없다. 승무원처럼 직접 고객을 응대하는 직업이라면 누구나 감수하는 일이 많다. 서비스 과정에 실수가 있을 수 있고, 누군가 대한항공 홈페이지에 불만 글을 쓸 수도 있다. 하지만, 대한항공에선 고객 불만사항이 접수된 직원에겐 조양호 회장이 직접 코멘트를 다는 경우가 많다. 정말 피하고 싶은 최악의 경우다. 사내 게시판에서 그의 코드명은 'DDY'이다. DDY코멘트는 주로 승객 불만 글에 댓글 형식으로 달린다.

코멘트가 달린 대상은 길면 한 달 간 직무에서 배제된다. 그리고 반드시 징계 결과가 보고된다. 경영자로서 직원의 명백한 잘못을 지적하는 건 온당하다. 대한항공 승무원들은 그러나, 지적에 일관성이 없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막연한 공포심을 주려는 게 코멘트의 목적처럼 보인다는 반응이 많았다.

▲ 대한항공 사내 게시판인 크루넷. 승무원은 'DDY 코멘트'가 달리는 일 만큼은 평생 없길 바란다

●"목표도 못 채우는데 인센티브는 무슨"

"승객 여러분. 대한항공에서는 다양한 면세품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구매를 원하시는 분은 승무원에게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대한항공을 자주 이용한 승객이라면, 익숙한 기내 방송을 듣고 도착이 가까워졌다고 느낄 것이다. 같은 시각 승무원들은 평균은 넘기자는 각오로 면세품이 실린 카트를 끌고 나온다. 물론, 전체 달성 목표액도 무시할 수 없다. 기내기판본부장을 겸하던 조현아 전 부사장이 제시하던 바로 그 수치다. 그는 2014년 10월 목표액도 상당했다. 200여 개 팀에 1,643만 달러 즉, 170억 대 판매액을 달성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대한항공 승무원도 기내 면세품이 회사 수익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걸 안다. 기왕이면 적극적으로 판매하려는 자세를 갖고 있다. 그래서 승객이 승무원에게 10만 원 짜리 향수 1병을 샀다면, 1,900원은 그 승무원 몫이었다. 조현아 전 부사장이 2010년 담당 전무로 오기 전까지만 그랬다.

조 전 부사장의 당시 취임 일성은 한마디로 이랬다. "목표도 못 채우는 데 무슨 인센티브!" 판매 목표액은 물론, 자신이 정하는 거였다. 대한항공 측은 달성률이 80%를 웃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일선에서 면세품을 직접 팔고 받던 격려금의 성격은 완전히 사라졌다는 데 불만이 크다. 실적을 못 채우면 그나마 주던 1.9%마저도, 회사가 가져간다는 뜻이다. 대한항공 승무원들에게 인센티브는 어떤 의미일까. 대한항공은 면세품 판매 과정의 모든 위험을 승무원에게 전가하는 구조다. 취재 결과, 국내외 항공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100% 실손 책임제를 운영하고 있었다.

매번 몇만 원씩 가욋돈이 들어오는 셈인데도 승무원들은 오히려, 면세품을 팔다가 손해 볼일 없길 바란다. 한때 대한항공 승무원이 자기 돈으로 면세품을 산다는 소문도 사실이란 걸 확인했다. 고객 서비스의 일선에서, 그들은 면세품 판매 역군인데도 갈수록 홀대만 받고 있다. 무한 책임만 있을 뿐, 과실은 없다.

●고강도 노동 그리고 불통 문화.. 서서히 병들다

승무원의 겉모습은 화려하다. 스튜어디스는 아직 선망받는 직군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이미지 이면에 너무나 알려지지 않은 실상이 존재한다. 마치 달의 뒷면과 같아 보일 정도다. 이번 땅콩 회항 사태와 같은 사건이 없다면 알려지지 않는다.

대한항공 승무원이 연봉을 적게 받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건 정당한 노동의 대가라고 보는 게 옳다. 상당한 초과 노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항공은 몇 년 째 승무원 규모를 6천 명 수준으로 유지하고 있다. 취항 노선은 늘어가는데, 기존 인력으로 수익을 짜내는 구조다. 국제선 승무원 상당 수가 70일에서 많게는 100일 가까운 연차를 쓰지 못한 채 쌓아두고 있다. 비행 스케쥴이 빡빡한데다, 담당 부서가 정기 휴가를 거의 승인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몇년 째 매년 사흘 이하의 휴가로 버티는 승무원도 많았다.

땅콩 회항 재발 대책이 사내 소통위원회 구성을 통한 소통 강화일 만큼, 대한항공 내부의 상명하복 문화는 이미 도를 넘은 수준이다. 게다가 이번 사태에서 보듯, 조현아 전 부사장 등 오너 일가의 안하무인식 행태까지, 대한항공 승무원들이 받아온 부당한 정신적 피로 수준은 폭발 직전이나 다름없다. 승무원들은 겉으론 화려하지만, 실은 강도 높은 노동 여건과 스트레스를 말 없이 견뎌온 것 뿐이다.

SBS 탐사보도팀은 이번 취재 과정에, 대한항공 측에 30여 개의 질문을 보냈다. 대한항공 측은 취재 과정에 확인한 부당 처우에 대해, 원칙적으로 불합리한 처우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이 글을 쓰고 고치는 몇 시간 동안에도, 대한항공 승무원과 그 가족이라는 사람의 제보 메일이 속속 도착하고 있다. 신변 보호에 대한 강력한 요청으로 시작하는 글들은, 하나같이 그들이 견뎌온 울분이 너무 오래 대책없이 방치돼 왔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 해당 8시 뉴스 보러가기 : "남는 기내식 먹어라"…억눌렸던 승무원 불만 폭주

자세한 취재 내용은 추가로 알려 드릴 계획입니다.

* 사진 : SBS A&T 영상취재팀 주범 기자

최우철 기자 justrue1@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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