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외로울까".. 목욕탕서 울었습니다

2015. 1. 16.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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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부가 가슴에 단 노란 리본 뗄 수 없는 이유, 두 가지입니다

[오마이뉴스 지요하 기자]

▲ '세월호미사'를 주례하는 새 사제

지난 9일 사제 서품을 받은 대전교구 태평동성당 출신 오순욱 바오로 신부가 14일 저녁 광화문 광장에서 '세월호미사'를 주례하고 있다.

ⓒ 지요하

14일(수요일) 저녁 서울 광화문 광장 세월호 농성장에서 봉헌된 '304명 세월호 희생자들과 실종자들을 기억하는 미사'에 아내와 함께 참례했다. 광화문의 '세월호 미사'에 아내도 함께 참례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304명 세월호 희생자들과 실종자들을 기억하는 미사'는 지난해 12월 2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 회관 대성당에서 시작됐다. 천주교 한국 남자수도회 사도 생활단 장상협의회에서 304일 동안 '세월호 미사'를 봉헌하기로 했다는 공지가 있었다. 각 수도회 별로 매일 미사를 지내면서, 매주 수요일 저녁에는 광화문 광장에서 각 수도회 사제들과 교구 사제들이 함께 미사를 지내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광화문 광장에서 '세월호 미사'를 주례하는 새 사제들

나는 지난해 12월 2일 저녁 프란치스코 회관 대성당에서 봉헌된 첫날 미사에는 참례했으나, 12월 내내 본당에서의 성탄 준비 관계로 서울에는 자주 가지 못했다. 그러다가 올해 들어서는 매주 수요일 오후엔 만사 제쳐두고 서울에 가서 광화문 광장의 세월호 미사에 참례하기로 작심하고, 지난 7일부터 실행했다. 그리고 14일에도 실행한 것이다.

초등학교 교사인 아내가 동행을 하게 된 것은 우선 겨울방학 덕이었다. 그리고 올해 연세 92세이신 모친의 이해 덕이었다. 아내는 진작부터 방학 동안에는 나와 함께 세월호 미사에 참례하기로 계획을 세웠는데, 며칠 전 그만 발목을 다쳤다. 백화산 등산을 하고 내려오다가 바윗돌 아래로 발을 잘못 디뎌 접질린 탓이었다.

여러 날 한의원을 다니며 침을 맞고 치료를 받았는데도 온전치 않았다. 그래서 14일 세월호 미사 참례를 포기할 생각도 했다. 그러다가 14일 미사는 대전 교구의 새 신부들이 주례를 한다는 말을 듣자 무리가 되더라도 꼭 참례하겠다고 하더니, 발목에 보호대를 착용하고 기어코 따라나섰다.

지난 14일 저녁 광화문 광장 '세월호 미사' 후 이 세상에서 가장 순결한 상태인 새 신부에게서 안수강복을 받았다.

ⓒ 지요하

자녀들이 생활하는 신림동의 월세 집 앞에 차를 대고 시내 버스도 타고, 지하철도 2호선에서 5호선으로 갈아타면서 광화문을 가는데, 걸음이 온전치 못한 아내를 보자니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갸륵하기도 하고, 별스럽기도 하고... 여러 마음이 뒤섞이는 기분이었다.

아무튼 우리 부부는 무사히 7시 이전에 광화문 광장에 도착했고, 우리 지역 대전 교구의 새 신부들이 주례하는 세월호 미사에 기쁘게 참례할 수 있었다. 미사 주례와 강론을 나눠 맡은 두 분 새 사제들을 보는 기쁨이 실로 컸다.

올해 대전 교구에서는 10명의 새 사제가 탄생했다. 원래는 10명 모두 14일 저녁 서울 광화문광장 세월호 미사에 참례할 예정이었으나, 각자 출신 본당에서의 첫 미사와 다른 일정들이 겹쳐 두 분만 참례하게 됐다고 했다. 태평동 성당 출신 오순욱 요셉 신부(주례)와 궁동성당 출신 정무범 요셉 신부(강론)였다.

미사를 지내면서 우리 부부는 실로 뿌듯해지는 마음이었다. 천주교 사제로서 삶을 시작하는 새 신부들의 낭랑한 음성 속에 담뿍 깃들여 있는 복음 정신, 하느님 나라의 정의를 위해 불의와 용감히 맞서 싸워나가겠다는 결의들을 들으며 벅찬 감격을 맛보지 않을 수 없었다.

노란 리본은 내 정체성의 상징

▲ 광화문 광장의 단원고 아이들

서울 광화문 광장에 가면 285명 단원고 2학년 아이들을 볼 수 있다. 영원히 열일곱 살에 머물러 있을 아이들이다.

ⓒ 지요하

미사 후 새 사제들의 첫 강복 안수 기도가 있었다. 우리 부부도 새 사제들 앞에 나가 머리를 숙이고 강복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우리 부부는 박재동 화백이 그린 안산 단원고 2학년 학생들의 예쁜 얼굴들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촬영을 부탁한 분께 우리 부부의 가슴에 달려 있는 노란 리본이 잘 나오도록 찍어달라는 주문을 하곤 했다. 사진을 찍고 나서 나는 아내의 가슴팍에 달린 노란 리본에 입을 맞추었다.

지난해 4월 이후 우리 부부의 가슴에 줄기차게 달려 있는 노란 리본은 우리 부부 정체성의 상징이었다. 이제 사람들 가슴의 노란 리본은 보기가 어렵다. 성당에 가도 가슴에 노란 리본을 달고 있는 신자는 우리 부부뿐이다. 아내가 근무하는 학교에서도 가슴에 노란 리본을 달고 있는 교사는 아내 뿐이라고 한다.

우리 부부의 가슴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기도 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바라는 일이다. 가끔은 쓸 데없는 관심을 접하기도 하고, 언제까지 달고 살 거냐는 질문도 받는다. 그때마다 우리 부부는 명확하게 대답한다.

아내는 실종자들을 모두 찾아 건질 때까지 가슴에서 노란 리본을 떼지 않을 거라고 한다. 나는 실종자들을 모두 찾아 건지고, 세월호를 인양하고, 세월호 침몰 사건의 진상이 명확히 밝혀질 때까지라고 못 박는다.

우리 부부와 신부님.

ⓒ 지요하

이렇게 우리 부부 사이에는 노란 리본 착용 기한에 차이가 있다. 어느 쪽에 충족이 실현될지는 알 수 없다. 어느 쪽 조건이 먼저 달성될 것인지, 그래서 우리 부부 중 누가 먼저 가슴에서 노란 리본을 떼게 될지는 정말 아무도 알 수 없다. 어쩌면 세월호 사건 1주년이 지나고, 2주년이 지나고, 박근혜 정권의 임기가 끝나도록 우리 부부의 가슴에는 계속 노란 리본이 붙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 부부의 가슴에 달려 있는 노란 리본의 착용 기간은 현재로선 무기한이고, 현재 진행형일 뿐이다. 나는 아내가 고맙다. 나 혼자 노란 리본을 착용하고 살면 조금은 외롭기도 할 것 같은데, 아내가 동행을 해주니 전혀 외롭지 않다.

서울 광화문에 갈 적마다 단원고 아이들의 얼굴 사진들을 보고, 박재동 화백의 그림도 보곤 한다. 스마트폰을 열면 무시로 페이스북에 올라와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고, 아이들의 글이며 부모들의 글도 읽을 수 있다. 그때마다 내 눈물샘은 마를 날이 없음을 실감하곤 한다.

그 아이들을 생각하면 차마 내 가슴에서 노란 리본을 뗄 수가 없다. 가뜩이나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가득하고 무거운데, 노란 리본을 떼면 더욱 미안해질 것 같다. 죄를 짓는 심정일 것도 같다.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슴에 새기면서도 조금이라도 가볍게 만드는 방법은 노란 리본 착용 뿐이다.

목욕탕에서도 눈물 흘리다

▲ 백재동 화백이 그린 아이들

서울 광화문 광장에 걸려 있는, 박재동 화백이 그린 단원고 2학년 아이들의 얼굴이 어찌나 귀엽고 예쁜지, 아이들 앞에 오래 머물고 싶었다.

ⓒ 지요하

며칠 전에도 가까운 덕산 온천에 가서 가족 목욕 행사를 가졌다. 아이들이 집에 내려올 적마다 갖는 행사다. 그런데 며칠 전에는 아들 녀석이 내려오지 못했다. 그래서 나 혼자 목욕을 했다. 노모와 아내와 딸 아이가 함께 입장하는 뒷모습을 보며 부러워했다.

혼자 목욕하며 미구에 매번 혼자 목욕을 해야만 하는 그 세월이 도래할 터이니 미리 연습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자니 더욱 쓸쓸하고 처량했다. 아들 녀석이 없는 목욕탕, 혼자 하는 목욕이 너무 재미없고 공연히 슬퍼지기도 했다.

그러자 불현듯 안산 단원고 아이들의 부모들 생각이 났다. 나처럼 아들 녀석과 목욕을 함께 한 아비들도 많았을 터. 그 아비들은 어떻게 목욕을 할까. 어떻게 혼자 목욕을 할 수 있을까. 목욕을 할 때마다 아들 녀석과 함께 목욕을 즐겼던 일들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는 건 아닐까.

아들 녀석이 살아 있는데도 아비 혼자 목욕을 하는 데서 쓸쓸함과 외로움을 느끼고 괜히 슬퍼하기도 하는데, 아들 녀석이 이 세상에 없는 그 아비들은 어떻게 목욕을 할까. 계속 그런 생각이 하자니 갑자기 울컥 눈물이 솟구쳤다. 내 눈물을 다른 사람들이 볼 것만 같아 얼른 샤워기를 틀고 물을 맞으며 얼굴을 문질러대었다.

아들 녀석이 집에 내려오지 못해 나 혼자 목욕을 하면서, 단원고 학부모 생각에 또 한 번 목욕탕에서 눈물을 흘린 셈이었다. 그래서 더욱 재미없고 쓸쓸한 목욕이었다. 목욕을 마치고 차에 오르며 가족들에게 그 얘기를 했다. 노친은 귀가 잘 들리지 않아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지만, 아내와 딸아이는 작은 소리로 대꾸했다.

"우리도 목욕을 하면서, 딸을 잃고 혼자 목욕을 하는 엄마들 생각을 하고, 얘기도 했어요."

또 한 번 아프고 고마워지는 마음 한량 없었다.이 기사를 응원하는 방법!☞ 자발적 유료 구독 [ 10만인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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