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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에서 대통령까지'…우루과이 대통령 전기 화제

1970년 10월 어느 날 오후.

35세의 게릴라 대원 무히카가 '라 비아'라는 바에 들어서는 순간 경찰이 신분증 제시를 요구했습니다.

무히카는 품 안에 있던 콜트 45 권총을 움켜쥐었습니다.

경찰이 무히카를 덮쳤고 6발의 총성이 울렸습니다.

무히카는 체포돼 우루과이 수도 몬테비데오의 '푼타 카레타스' 교도소에 갇혔습니다.

무히카는 다른 게릴라 대원 110명과 함께 땅굴을 파 이듬해 탈옥했습니다.

그러나 무히카는 1972년 다시 체포됐고, 1985년에야 자유의 몸이 돼 햇빛을 볼 수 있었습니다.

4일(현지시간) 브라질 일간지 폴랴 지 상파울루에 따르면 최근 우루과이 서점가에서는 오는 2월 말 임기가 끝나는 호세 무히카(79) 대통령의 전기 '조용한 혁명'(La Revolucion Tranquila)이 베스트셀러로 떠올랐습니다.

우루과이 언론인 마우리시오 라부페티(39)가 쓴 이 책은 무장게릴라로 활동하던 시절과 14년에 걸친 교도소 생활, 세상에 알려진 소문에 관한 무히카 자신의 증언이 축을 이룹니다.

조만간 10여 개국에서 번역 출판될 예정입니다.

우루과이에서는 1970∼1980년대 군사독재정권이 집권했습니다.

인권단체들은 군사정권 기간 4천700여 명이 체포돼 고문을 당했고, 이 가운데 200~250명이 수감 중 사망하거나 실종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우루과이 군사정권들은 1970년대 좌파 인사 색출을 위해 '콘도르 작전'에도 참여했습니다.

'콘도르 작전'은 1975년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브라질, 칠레, 파라과이, 우루과이 등 남미 6개국 군사정권 정보기관장들의 합의로 추진됐습니다.

겉으로는 좌익 게릴라 척결을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반체제 성향의 사회·노동운동가, 지식인들을 대상으로 무차별적인 추적·납치·살해 행위를 저질렀습니다.

무히카는 1960∼1970년대 반정부 게릴라 조직 투파마로스 인민해방운동(MLN-T)에서 활동했습니다.

현재 상원의원인 부인 루시아 토폴란스키(69)도 투파마로스 대원이었습니다.

무히카와 토폴란스키는 10여 년간 복역하면서 맺은 인연으로 부부가 됐습니다.

무히카는 중도좌파연합 프렌테 암플리오(Frente Amplio) 후보로 나서서 2009년 11월 대선에서 승리했습니다.

대통령 임기가 끝나면 상원의원 신분으로 의회로 돌아갑니다.

팔순 나이에도 정치 현장에 남아 우루과이의 변화를 이끌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무히카는 마리화나 합법화와 낙태의 제한적 허용, 동성결혼 인정 등을 주도했습니다.

빈곤 감소와 노동 기회 확대, 환경 보호에 노력한 점을 스스로 가장 큰 성과로 꼽습니다.

그러나 마리화나 합법화와 낙태의 제한적 허용, 동성결혼 인정은 국내외에서 적지 않은 논란을 불렀습니다.

이 책에서도 무히카는 '세계에서 가장 검소한 대통령'으로 묘사됐습니다.

무히카가 가장 최근에 제출한 재산신고 서류에 따르면 매월 받는 월급 1만4천 달러의 87%는 프렌테 암플리오와 사회단체에 기부했습니다.

이밖에 무히카의 재산 목록에는 자신이 사는 허름한 농장과 1987년형 하늘색 폴크스바겐 비틀, 트랙터 2대, 몇 대의 농기구가 올라 있습니다.

무히카의 '트레이드 마크'인 비틀은 아랍의 부호로부터 100만 달러에 사겠다는 제의를 받기도 했습니다.

한편, 지난 5년간의 무히카 대통령 정부는 비교적 성공한 정부로 평가받습니다.

무히카는 2009년 11월 대선 결선투표에서 52%의 득표율로 당선됐습니다.

퇴임을 앞둔 현재 지지율은 이보다 높은 65%입니다. 기사수정 편집완료 전송정보 대기 매 체 명 해쉬태그

(SBS 뉴미디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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