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여자 후배에게 "자고 가라"하고 손목 잡는다면..

입력 2015. 1. 3. 16:20 수정 2015. 1. 4.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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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뉴스 AS]

'자고 가라'며 여직원 손목 쥔 상사에 "추행 아냐" 판결한 대법원손목 잡는 건 성추행 아니고, 어깨 주무르는 건 성추행?법 논리와 국민 정서의 괴리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강원도 정선군의 세탁공장에서 일하던 ㄱ(54·여)씨는 2011년 6월 어느날 저녁 당황스러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공장 소장 서아무개(61)씨가 이전에 새 밥상을 구해달라고 ㄱ씨에게 부탁해서 이것을 가져다주던 길이었습니다. ㄱ씨는 새 밥상을 서씨 숙소 침대 방에 갖다 놓고 일어서려 하는데 서씨가 "잠깐 있다 가라"며 맥주와 담배를 권했습니다. ㄱ씨는 거절하면 안될 것 같아 할 수 없이 5분 정도 앉아 있었습니다. ㄱ씨에게 그 어색한 5분은 5시간처럼 느껴졌습니다. ㄱ씨는 일어서 나가려 했습니다. 그러자 서씨는 "자고 가"라며 ㄱ씨의 손목을 붙잡아 끌어당겼습니다. ㄱ씨는 고민 끝에 서씨가 직위를 이용해 성추행했다며 형사 고소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건을 어떻게 보십니까. 대법원은 2일 '서씨의 언행이 위계를 이용한 성추행에 해당하지는 않는다'고 밝혔습니다. 서씨는 1·2심에서 성폭력범죄처벌특례법 위반(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추행) 혐의가 인정돼 벌금 300만원을 선고받았지만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습니다. 대법원은 이 사건을 2심 법원인 춘천지법으로 돌려보냈습니다.

(▶ 관련 기사 : '자고 가라'며 여직원 손목 쥔 상사…대법 "추행 아냐")

대법원의 이러한 판단과 달리 누리꾼들은 대체로 판결을 비판하는 의견이 많습니다. 판결 내용을 소개하는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면 "자고 가라는 말에 그 남자의 본심이 다 들어 있는데 그런 판결을 내리다니 우습다"(야옹이님), "자고 가라고 말하고 한번 (성관계) 하자라고 듣는건데 판사가 한국말을 잘 모르는군"(미르님) 등의 의견이 달려 있습니다.

대법원1부(주심 이인복 대법관)의 입장에서 사건을 살펴볼까요. 대법원은 서씨가 ㄱ씨의 손목을 움켜잡은 것을 두고, 성적 행동이 아니라 그냥 '돌아가겠다'며 일어서는 ㄱ씨를 다시 앉히기 위해 한 행동으로 판단했습니다. 물론, 손목을 움켜잡는 행위는 경우에 따라 성추행이 될수도 있지만, 서씨의 경우 음흉한 표정을 지으면서 손목을 쓰다듬은 것도 아니고 끌어안으려는 행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단순히 손목을 움켜쥔 행위만으로는 추행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취지입니다.

대법원 쪽의 설명을 들어도 쉽게 납득이 안되기는 합니다. 직장 상사가 손목을 잡으면서 자고 가라고 말을 하는데 이것이 성추행이 아니라면 도대체 뭐가 성추행일까요. 손목이 아닌 중요 부위를 꼭 움켜쥐었어야한다는 것일까요. 성추행으로 인정받기 위해 서씨가 더 과감한 행동을 하도록 ㄱ씨가 좀더 견뎌야했을까요. 생각할수록 아리송합니다.

직장 성교육을 받을 때 가장 흔하게 듣는 설명이 '피해자 중심주의'입니다. 손목이 됐든 뭐가 됐든 피해자가 해당 접촉에 대해 성추행이라고 느꼈다면 피해자 입장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원리입니다. 대법원의 판단은 이러한 피해자 중심주의에서 좀 벗어나 있는 듯 보입니다.

또 이번 대법원의 판단은 이전 대법 판결과도 모순돼 논란입니다. 2004년 4월 대법원은 부하 여직원이 거부 의사를 밝혔는데도 어깨를 주무르게 한 상사의 유죄를 확정하며 "추행은 신체 부위에 따라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볼수 없다. 피해자 의사에 반해 피해자가 혐오감을 느꼈다면 추행"이라고 판시했습니다. 손목을 중요하게 본 이번 대법원 판결과는 많이 다르지요.

다만, 법원 판결이 일반 국민 감정과 다르다고 해서 무조건 비판할수는 없습니다. 법원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보수적이고 신중한 판단을 하는 곳으로 자리매김 하는 게 옳을 수도 있습니다. 단 한명이라도 억울한 처벌을 받아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국민 감정상 사형감인 연쇄살인범에게도 사형 판결이 잘 나오지 않는 것도 이러한 이유일 겁니다.

다시 한번 대법원 논리를 살펴봤습니다. 이번 사건에서 대법원은 성추행과 성희롱을 구분했습니다. 서씨가 "자고 가라"며 손목을 잡아당긴 행동은 성희롱이 될순 있지만 성추행으로까지 보기는 어렵다고 본 것입니다. 성희롱은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만 할 수 있을 뿐 가해자를 형사처벌할 수는 없습니다. 업무상 위력에 의한 추행죄는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지지만 성희롱을 형사처벌 대상으로 규정한 법률은 없습니다. 아마 성희롱을 다 형사처벌 하면 어쩌자는 것이냐며 성희롱과 성추행을 우리 법이 구분하고 있었던 것일수도 있겠습니다.

따라서 법원은 서씨의 행동이 도덕적인 지탄의 대상이 될지언정 형사처벌감은 아니라고 봤을 수도 있습니다. 대법원 관계자는 "이번 판결은 피해자 의사, 성별, 연령, 이전부터의 관계, 사건 경위 및 경과, 행위, 주변 상황 등을 종합한 결과 성희롱은 될수 있어도 추행까지는 아니라는 취지의 판결을 내린 것"이라고 언론에 해명하고 있습니다. 대법원의 설명을 이해하려면 아무래도 사건을 자세하게 추적해봐야 할것 같은데, 피해자 ㄱ씨가 원하지 않는 상황에서 언론이 이렇게까지 파악해보는 것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여성단체에서는 법원이 성희롱과 성추행을 구분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고 비판합니다. 성희롱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추행도 포함되는 것인데 법원이 마치 성희롱은 언어적인 것이나 좀 약한 정도의 피해 정도로 인식하고 그이상의 것만 성추행으로 인식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외국에서는 성폭력의 개념에 성희롱, 성추행, 강간 등을 광범위 하게 넣어 한꺼번에 처벌을 한다는 게 여성단체의 설명입니다.

우리 법원이 이렇게 판단을 하니까 성폭력 피해자들이 고소를 하는 대신 꾹 참는 길을 택한다고 합니다. <여성의 전화>에 상담을 의뢰한 피해자 다섯 명이 최근 가해자를 고소했는데 단 한건만 유죄 판결받았다고 합니다. 아마 고소하신 분들은 '괜한 일로 직장 상사 고소까지 하는 여성'으로 낙인 찍혀 회사를 더이상 다닐수 없게 되었을지 모릅니다.

성추행을 바라보는 법의 논리와 국민 정서와의 괴리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1차적으로 우리 법원의 남성중심주의적 문화와 인식을 바꿔야 한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다만, 이것은 너무나 오랫동안 주장되어온 이야기이고 당위적이어서 좀 공허하게 들리지요. 위에서 말씀드렸듯 우리의 법체계가 성희롱과 성추행을 구분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법률적 재정비라든지 이런 노력을 함께 기울여야 한다는 지적이 그래서 함께 제시되고 있습니다.

어찌 됐건, ㄱ씨가 서씨를 고소한 것은 주변에서 격려해야 할 일로 보입니다. 성폭력 피해는 창피한 것이 아닐 뿐 더러 참는 것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서씨처럼 행동하면 처벌당할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우리 사회가 이를 계속 고민하도록 해야 합니다. 직장 남성 상사들도 경각심을 갖고 조심을 기울일 수 있을 겁니다.

변화에는 늘 누군가의 희생과 노력이 따릅니다. 그런 면에서 ㄱ씨의 고소는 대법원의 판결 여부와 상관없이 우리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 같습니다. (2012년 8월부터 업무상 위력에 의한 추행죄는 비친고죄가 되어 피해자의 의사에 상관없이 형사처벌이 가능해졌습니다.)

허재현 기자 cataluni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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