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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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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색달라요, 정말

26년 만에 내한공연 하는 신디 로퍼… 성소수자 친구로 함께하며
“세상을 아주 조금은 바꿨다”고 믿는 그녀 이야기
등록 2015-01-03 04:26 수정 2020-05-02 19:27

마돈나에 취해 그녀를 잊고 있었다. 레이디 가가의 40년 전에 그녀가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한국에 온다. 그녀의 데뷔 앨범 (She’s so unusual) 발매 30주년 투어공연의 일환이다. 1980년대 팝 아이콘 신디 로퍼가 1월23~24일 서울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26년 만에 내한공연을 한다. 앞서 2014년 9월, 그녀의 자서전 (뮤진트리 발간)가 한국에서 출간됐다.

기괴함? 그녀 방식의 문화혁명
1983년, 그녀의 데뷔 앨범은 세상을 뒤집어놓았다. 단숨에 5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고, 한 앨범에서 빌보드 톱(TOP)5 싱글 4곡을 배출한 첫 여성 아티스트가 됐다. 신디 로퍼는 점잖은 사람들 눈에는 어쩌면 기괴해 보이는 스타일을 거침없이 선보였다. 그것은 원래 그녀의 스타일이자 그녀 방식의 문화혁명이었다. 전성기 시절에 대한 그녀의 회고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항상 매우 정상적으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내가 완전히 정상이라고, 평범한 옆집 아가씨 같은 여자라고 눙쳤다. 이제 정상적인 사람들이 비정상을 흡수하여 정상으로 만들고 있었다.” 이런 스타일은 그녀의 남다른 기질에서 나왔지만, 한편으로 오래 경험한 가난에 빚지고 있었다. “또 하나의 아이러니는 내 스타일의 많은 부분은 사실 정말로 원하는 것을 살 형편이 못 되어 할 수 없이 기발해져야 했던 데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다”라고 그녀는 회고했다.

신디 로퍼는 세대를 대표하는 뮤지션이 되지는 못했지만 세상을 사랑하는 인간이 되었다. 그녀의 자서전 〈신디 로퍼〉(오른쪽)에는 성공담이 아니라 ‘생존자의 목소리’가 담겼다. AP 연합뉴스,

신디 로퍼는 세대를 대표하는 뮤지션이 되지는 못했지만 세상을 사랑하는 인간이 되었다. 그녀의 자서전 〈신디 로퍼〉(오른쪽)에는 성공담이 아니라 ‘생존자의 목소리’가 담겼다. AP 연합뉴스,

그녀는 의상과 무대를 음악에 포함된 요소로 중시했다. 마치 2010년대 레이디 가가가 ‘가가 하우스’라는 음악과 비주얼을 포괄하는 자신만의 아트하우스를 만든 것처럼, 그녀는 일찍이 지인들과 그런 선구적 집단을 만들었다. 의상보다는 의상에 달린 장신구를 중요시하고 급진적인 헤어스타일을 선도했던 그녀는 “웃기는 이야기지만 머리를 보면 어느 해였는지, 어떤 앨범으로 활동하고 있었는지 기억난다”고 말할 정도다. 이런 반골 기질에는 1970년대 예술을 사랑하는 소녀로서 겪었던 반문화의 영향이 새겨져 있다. “내가 팔았던 것은 섹스가 아니라 표현의 자유, 남들과 다를 수 있는 자유였다. 쫓아다니는 남자들이 없었다. 대신 우울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이야말로 내가 노래로 달래주고 싶은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괴상한 아이, 이상한 여자라는 눈총을 받으며 살았던 그녀는 자신과 같은 이들의 친구가 되고자 했다.

특별한 숫자, ‘40에서 0으로’

데뷔 앨범 이후 그녀의 인기는 예전 같지 않았다. 두 번째 앨범은 3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지만 당시로선 실망스러운 성적이었다. 더구나 그녀는 고분고분한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Time After Time)같이 지금도 끝없이 리메이크되는 명곡을 만든 작곡자이자 자신의 음반을 직접 프로듀싱하는 뮤지션이다. 음반사 간부들의 말에 고분고분하지 않고 성차별에 민감한 그녀를 음반사 간부들이 불편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짧았다면 짧았던 스타 시절 뒤에도 그녀는 뮤지션의 길을 걸었다. 지금까지 발매한 11장의 정규 앨범 판매량은 4천만 장에 이른다.

‘40에서 0으로’. 그녀가 특별하게 여기는 숫자다. 신디 로퍼는 1980년대부터 성소수자 커뮤니티와 각별한 관계를 맺어왔다. ‘40’은 미국 무주택 청소년의 40%가 LGBT(레즈비언·게이·바이섹슈얼·트랜스젠더)로 추정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녀는 자서전에서 “LGBT 청소년의 비중이 전체의 3에서 5퍼센트에 불과한 것을 고려하면 놀랄 만한 수치다”라고 전한다. 신디 로퍼가 설립한 ‘트루 컬러스’(True Colors) 재단은 가출한 LGBT 청소년을 위한 쉼터를 운영한다. 그녀는 뉴욕 할렘에 위치한 이곳을 “내 인생의 특별한 중심”이라고 부른다. 이곳의 현판에는 ‘그레고리 내털, 보이 블루’라고 쓰여 있다. 그녀의 노래 의 가사도 적혀 있다. 그레고리는 그녀가 “특별한 보호 욕망을 느꼈던” 게이 친구다. 12살에 의붓아버지에게 성폭행당한 그레고리를 어머니는 집에서 쫓아냈다. 그레고리가 “스물일곱 살이라는 어이없는 나이에” 에이즈로 숨지는 모습을 보면서 그녀는 성소수자 운동을 자신의 소명으로 받아들였다. 그녀의 친언니 엘런도 커밍아웃한 레즈비언이었다.

“아무것도 아니지 않았다”

는 LGBT 커뮤니티의 송가가 되었다. “팬들이 보낸 이메일을 읽었다. …주로 커밍아웃이 정말 힘들었고 를 듣고 힘든 시기를 이겨냈다는 이야기들이었다. 동성애임을 선언하자 가족과 친구들에게서 버림받고 일자리를 잃어 자살 생각도 했지만 이 노래를 부르며 버텼다고 했다. 내가 를 부르며 위로를 받았던 것처럼.” 17살에 의붓아버지의 성폭력에 시달리다 가출해 ‘생존자’가 된 그녀는 누군가의 생존을 지키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내가 세상을 아주 조금 바꾸었다고 확신한다. 미미했지만 아무것도 아니지 않았다.” 이렇게 자서전을 맺음하는 구절에는 그녀의 자부심과 겸손함이 하모니를 이루고 있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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