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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자빈은 동성애자였다?…조선 왕실여인들의 내밀한 삶…
왕비간택서 탈락한 10~19세 소녀들
최고명문가 자제와 혼례하고

사랑에 목마른 궁녀들
금지된 사랑 ‘동생애’에 빠지기도

왕의 사랑 얻기 위한 미용법도 유행



조선의 국모가 되는 길은 까다로웠다. 8세부터 20세의 지체높은 가문의 규수로서 오늘날의 용어로 치자면 한번의 서류전형과 3번의 면접을 거쳐야 비로소 왕비가 될 자격이 주어졌다. 세자빈이나 왕비의 간택에서 중요하게 고려됐던 조건은 가문(족성族姓), 여인으로서의 부덕(여덕女德), 융숭한 예식(융례隆禮), 신하들의 너른 뜻(박의博議)이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여자는 예뻐야 된다”는 세속의 인식은 ‘왕의 여자’에겐 더욱 요구되는 조건이었다. 세종은 세자(후일 문종)가 세자빈 휘빈 김씨를 가까이 하지 않은 일로 사단이 나자, 그를 내쫓고 새로운 며느리를 뽑으면서 외모를 중요한 기준으로 삼기에 이른다. 세종은 새 세자빈 순빈 봉씨를 간택하는 자리에서 “집안과 덕성이 중요하긴 하나, 인물이 아름답지 못하면 또한 안 될 것”이라 했다. 

그러나 아름다운 미모로 세자빈 자리를 꿰찬 순빈 봉씨는 후일 궁녀 소쌍과의 동성애 사건으로 폐출된다. 조선 왕실에서 궁녀들의 ‘연애’는 금지됐다. 발각되면 사형이었다. 궁궐에선 왕의 직계 외엔 앓아서도 안됐고 죽어서도 안되며 연애 또한 그러했다. 그러나 때로 수백명에까지 이른 궁녀 모두가 왕의 손길(승은)만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궁녀들의 연애ㆍ간통사건이 적지 않다. 상대는 때로 종친이었지만 주로는 내시와 별감이었다. 죽음이 두려우나 사랑엔 목마른 궁녀들은 동성애에 빠졌다. 때로는 왕이 외면하는 왕비나 후궁이 궁녀들과 금지된 사랑에 빠지는 경우도 있었으니 세자빈 순빈 봉씨의 동성애 사건이 그러했다. 
‘조선의 역사를 지켜온 왕실여성’은 혼례에서 왕비의 패션까지 조선 왕실여성들의 다양한 생활상을 담았다. 고종 비 명성왕후의 수식(머리관)과 원삼(예복)을 보여주는 사진과 혼례 모습을 그린‘ 가례도감의궤’.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이렇듯 내밀하지만 복잡다난했던 조선 왕실여성의 궁궐 속 삶을 조명한 책이 최근 출간됐다. 국립고궁박물관이 펴낸 왕실문화 기획총서 제6권 ‘조선의 역사를 지켜온 왕실 여성’이다. 신명호 교수(부경대 사학과)를 비롯한 역사ㆍ문학 학자 10명이 주제별로 심층 연구한 대중서다. 위와 같은 비화도 있지만, 왕실 여성의 주체성과 위상을 새롭게 살펴보고자 발간이 기획됐다. 조선 왕실의 의례 등 국법으로 정한 엄격한 제도부터 왕비에서 궁녀에 이르는 조선 왕실 여인들의 내밀한 삶까지를 조명했다. 조선의 국모가 되는 까다롭고도 화려한 행사인 왕비의 간택(揀擇)과 책봉(冊封)에서부터 ▷왕실의 번영을 위한 왕실 여성의 임신ㆍ출산ㆍ육아 이야기 ▷공주ㆍ옹주의 혼인과 부마의 역할 ▷조선 최대의 전문직 여성인 궁녀의 생활 ▷백옥 같은 피부와 풍성한 머리카락을 가꾸기 위한 미용법과 왕실의례에 따라 달리 착용한 복식 등을 아울렀다. 또 ▷수렴청정을 통한 여성군주의 권한과 지위 ▷‘한중록’ 등 왕실의 비극적 사건을 치밀한 기록으로 승화시킨 왕실 여성의 문학작품 ▷억불 시대에도 왕실의 번영을 위해 왕실 여성이 발원한 불교 미술에 대한 이야기도 수록했다. 

조선왕실의 가장 큰 경사와 행사는 왕비나 세자빈을 맞아들이는 일, 곧 왕이나 세자의 혼례였다. 혼례의 시작은 금혼령으로부터다. 혼인할 왕이나 세자의 나이에 따라 달랐지만, 적게는 8세부터 20세에 이르는 양반가 미혼 여성들의 혼인이 일정기간 금지됐다. 사대부이면서 사조(부ㆍ조부ㆍ증조부ㆍ외조부) 중에 현관(현의 관리)이 있는 집안의 적령기 미혼여성은 궁궐에 처자단자를 신고해야 했다. 이는 해당 여성의 사주 등을 쓴 문서로 일종의 서류심사를 위한 것이었다. 이들 중에서 다시 후보를 추려내 세번의 간택과정을 거쳤는데 처음이 30명 안팎, 두번째가 5~7명, 세번째가 3명정도였다. 조선 후기 역대 국왕과 왕비가 혼인했을 때의 연령은 10세부터 19세까지로 평균 15세 안팎의 처녀가 왕비가 됐다. 간택에서 떨어진 후보들은 평생 수절하며 살았다거나 후궁으로 들어갔다는 설이 지금까지는 만연했으나, 실제로는 최고 명문가의 집안 자제와 결혼했다. 조선 왕비의 혼인연령은 후기로 갈수록 낮아지는 경향을 보였다. 대체로 13~15세에 혼인했으나 현종비인 명성왕후부터 10~11세로 낮아졌다. 그러나 왕비의 첫 출산 연령은 조선시대 500년 동안 20세 전후였으며 30대 초반에 단산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산은 곧 왕실의 번창이었다. 이성계는 왕실 자손이 번성하는 경사를 ‘종사지경’이라 했는데, 여기서 종사는 여칫과에 속하는 곤충, 흔히 베짱이를 가리키는 것으로 한번에 아흔아홉개의 알을 낳는다.

왕실 여성의 출산력은 인조대 이후 급격하게 떨어졌다. 태종, 세종, 성종, 중종, 선조와 같은 왕들은 자녀가 20~29명에 이르렀으나 인조 이후에는 4~14명으로 줄었다. 왕실 족보를 이용한 통계에 따르면 조선 시대 왕실에서 태어난 총 자녀 수는 273명으로 이 중 왕비의 자녀는 93명, 후궁의 자녀는 180명으로 3분의 2가 후궁소생이다. 성비로는 남아 152명, 여아 121명이다. 인조 이전의 자녀수는 183명, 이후는 90명으로 반감했다. 조선 최대의 다산왕은 29명(왕비소생 8, 후궁소생 21)의 자녀를 둔 태종이었다. 왕비와의 사이에서 가장 많은 자녀를 둔 왕은 세종으로 22명의 자녀 중 정비 소생이 10명(8대군 2공주)이다. 대체적으로 조선 왕실에서 ‘다산’의 기준은 열 다섯 자녀였다.

왕실의 수족이 되고 살림을 도맡은 이들은 궁녀였다. 원칙적으로 노비 신분만 궁녀가 될 수 있었다. 이들은 빠르면 4~6세에 입궁했고, 늦으면 20~30대에도 궁녀가 됐다. 대부분 생계를 위한 선택이었다. 막 입궁한 소녀 궁녀, 즉 아기나인들은 무서운 첫날밤 신고식을 치렀다. 환관들이 저녁 식사 후 아기나인들을 대궐 뜰에 모아놓고 소녀들의 얼굴에 횃불을 들이대며 ‘쥐부리 글려, 쥐부리 지져’ 하며 위협을 주는 의식으로 입단속을 하라는 의미의 행사였다.

그 대가로 궁녀들의 연애는 철저히 금지됐다. 나이들고 병들거나 힘이 떨어져 궁궐 밖으로 나온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궁녀들의 연애는 간통죄로 여겨져 참수형으로 다스려지곤 했다.

이형석기자su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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