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곁에도 성 소수자가 있습니다

전혜원 기자 2014. 12. 23.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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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인권선언일인 12월10일 서울시는 예정돼 있던 인권 관련 행사를 모두 취소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공약이었던 서울시민인권헌장(이하 인권헌장)은 제정에 참여한 시민들이 스스로 선포했다. 박 시장은 이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다. 성 소수자 단체 등 시민 100여 명은 이날로 서울시청 점거 무지개 농성을 5일째 이어갔다. 인권변호사 출신 시장이 세계인권선언일에 모습을 감춘 상징적 장면이었다.

발단은 서울시의 인권헌장 선포 포기였다. 서울시는 지난 8월6일 시민위원 150명과 전문위원 40명 등 190명(26명 중도 사퇴로 현재 164명)으로 구성된 '서울시민인권헌장 제정 시민위원회'를 발족했다. 11월28일 열린 제6차 회의에서 50개 조항 가운데 차별 금지 사유에 '성적 지향 및 성별 정체성'을 명시한 5개 조항이 합의되지 않았다.

ⓒ시사IN 조남진 12월10일 서울시청 앞에서 인권헌장 제정에 참여했던 관계자들이 인권헌장을 발표하고 있다.

서울시는 표결 형태의 처리 방식을 반대하며 전원 합의 처리 방식을 요구했다. 사회적 갈등을 야기한다는 이유에서다. 인터넷에서 본 '시민이 만든다'는 문구에 감동해 인권헌장 제정에 참여했다는 정혜선 시민위원(62·관악구)은 '마지막 회의 때 그런 얘길 처음 듣고 당황했다. 좋은 것, 부드럽게 넘어가는 것만 오케이하고 쓰면 뱉는다는 건가 싶었다. 이용당했다는 느낌이 들었다'라고 말했다. 시민위원회 부위원장으로 그날 사회를 맡았던 문경란 서울시 인권위원회 위원장은 '서울시가 그 얘기를 한 뒤에 회의장 분위기가 술렁였다. 시민위원들이 이의를 제기하려 손을 들었고, 반대하던 이들은 서울시 뜻을 따라야 한다고 소리쳤다'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결국 논란이 되던 차별 금지 사유를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안에 60명이 찬성, 17명이 반대하며 최종안이 통과됐다.

서울시의 요구와 달리 표결로 최종안이 통과되자 서울시는 11월30일 '최종적으로 합의에 실패한 것으로 판단한다. (인권헌장은) 자연스레 폐기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박 시장 공약인 인권헌장은 의결 문제를 이유로 폐기 절차에 들어갔다.

ⓒ시사IN 조남진 서울시청 점거 농성 3일째인 12월8일 서울시민인권헌장 선포를 촉구하는 문화제가 진행되고 있다.

전에 없던 '표결 불가'라는 방침을 서울시가 들고 나온 진짜 이유를 두고 전문위원들은 '일부 개신교의 반대를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해서일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시 관계자도 표결 불가 이유에 대해 '사회 갈등과 논란이 확산되는 상황이었다. 이렇게까지 사회적 갈등이 야기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라고 했다.

이 와중에 12월1일 박 시장이 서울시청에서 열린 한국장로교총연합회 임원 간담회에서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는다'라고 발언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이 발언이 들끓던 분위기에 기름을 부었다. 시민위원회에 전문위원으로 참여한 김형완 인권정책연구소 소장은 '해가 동쪽에서 뜨는 걸 지지하지 않는다는 말만큼 터무니없는 발언이었다'라고 말했다. 12월6일, 성 소수자 단체와 이들을 지지하는 시민이 서울시청 점거 농성에 들어갔다.

농성단은 박 시장 면담과 사과, 인권헌장 선포, 혐오 폭력에 대한 조치를 요구했다. 박 시장은 공식 석상에 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활발하게 활동하던 SNS에서도 자취를 감췄다. 서울시는 먼저 농성을 풀면 12월17일 정도에 면담을 주선해보겠다는 제안을 해왔다. 유력 대권 주자인 박 시장이 보수 개신교계의 미움을 살 선택을 할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였다.

ⓒ연합뉴스

시민사회·노동 등 300여 단체 지지 이어져

하지만 사회 각계의 연대가 이어지면서 국면은 새로운 단계로 진입했다. 박 시장 자신이 만들거나 주역으로 활동했던 참여연대와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이 박 시장을 비판하는 성명을 냈다. 여성·노동·장애인 등 300여 단체가 농성단에 지지를 보냈다. 쌍용차 해고노동자 이창근씨는 농성장에 와서 '이곳이 인권의 베이스캠프'라고 말했다. 조합원이 고공 농성 중인 씨앤앰 해고 노동자들도 함께했고, 시민헌장 선포식 곁을 빨간 조끼를 입은 노동자들이 지켰다. 시민들은 '박원순' '오세훈' '엘런 페이지'(올해 초 커밍아웃한 할리우드 여배우) 등의 이름으로 후원금을 보냈다. 박 시장에게 끊임없이 트윗 멘션을 보내고, 그의 지난 인권 옹호 발언을 리트윗했다.

결국 박 시장은 12월10일 오후 5시부터 한 시간여 농성단 대표단과 비공개로 만났다. 이 자리에서 박 시장은 '여러분이 입은 마음의 상처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고 어떤 표현을 요구하더라도 제가 하겠다' '어떤 오해나 발언에도 불구하고, 어떤 시민도 차별이나 불이익을 당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사과했다. 실무적으로 성 소수자들이 겪는 어려움을 해결할 방법을 찾겠다는 약속도 했다. 다만 면담 직후인 오후 7시 올린 페이스북 사과문에서 그는 서울시가 인권헌장을 공식 선포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했다. 사실상 공식 선포를 하지 않을 거라는 해석이 많다.

12월10일 박원순 시장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사과문을 올렸다. 공론장에서 배제되던 성 소수자의 항의가, 주요 선출직 정치인이자 잠재적 대권 주자의 사과를 이끌어내는 초유의 순간이었다. 박 시장은 페이스북 사과문에서 '이번 일로 인해 제가 살아온 삶을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상황은 힘들고 모진 시간이었음을 고백합니다'라고 썼다. 그는 부천서 성고문 사건 등을 변호한 인권변호사이자 참여연대와 아름다운재단, 희망제작소를 만든 시민운동가였다. 국정원이 제기한 명예훼손 소송에서 끝내 승소하기도 했다. 인권이 인생의 핵심 키워드였던 이가 인권으로 비판받는 일에 자괴감을 느낄 법한 상황이었다. 면담에 참여한 농성단 관계자는 '(박 시장이) 시장을 그만둬야 하나 고민할 정도로 힘들었다고 했다'라고 말했다.

농성단은 다음 날인 12월6일 '박 시장이 진정성 있는 후속 조치를 취하라고 지시했다'라는 사실을 서울시로부터 확인한 후, 해산을 선언했다. 인권운동사랑방 명숙 활동가는 '농성을 시작할 때 '지지받을 수 있을까' 걱정이 많았다. 그런데 하루 만에 인권·장애·여성·시민사회·노동·정당 등 300여 단체의 지지를 받았다. 움츠러들었고 존재를 알리기 어려워했던 성 소수자들이 스스로 모여 차별받은 경험을 나눴다. 수많은 시민의 지지와 응원을 확인했다'라고 말했다. 무지개농성단은 저녁 7시30분 '승리 보고 문화제-당신의 인권이 여기 있다'를 끝으로 6일간의 농성을 마무리했다.

전혜원 기자 / wo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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