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툰 진행·떨리는 목소리.. 그래도 세상 가장 진솔한 DJ

김미나 기자 입력 2014. 12. 17. 02:30 수정 2014. 12. 17. 0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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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취자에게 마이크 맡기는 '심야라디오, 디제이를 부탁해'

강은경(31·여)씨는 고등학교 시절 연극 동아리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성우를 꿈꾼 적이 있었다. 대학 졸업 후 전화 상담원 일을 경험하면서 목소리 하나엔 자신이 생겼다. 그가 15일 오전 서울 마포구 MBC 라디오 스튜디오에서 일일 디제이(DJ)라는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이승환의 '가족', 고(故) 유재하의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브로콜리너마저의 '울지마' 등 전파를 탈 노래 10곡을 직접 선곡했고 방송을 통해 하고 싶은 말도 조목조목 적었다. 잊고 지냈던 꿈, 나이의 무게, 가족에게 느끼는 고마움과 결혼 등 30대 여성이 또래 친구와 나누는 소소한 이야깃거리였다.

강씨는 대기업 파견 계약직으로 일하다 4년을 꽉 채운 최근 정규직 전환에 실패했다. 화제의 드라마 '미생'을 보면서 울컥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라고 했다. "잠깐 한 마리의 백조로 살고 있다"며 호탕하게 웃던 그녀의 첫 멘트는 이렇게 시작됐다. "바둑에서 집이 아직 완전하게 살아 있지 않은, 그렇다고 완전히 죽은 돌과는 달리 여지를 남기고 있는 돌을 미생이라고 합니다. '심야 라디오 디제이를 부탁해' 오늘 디제이를 맡은 저는 '미생' 강은경입니다."

하정민(32) PD는 녹음을 도왔다. 중간 중간 강씨를 칭찬하면서 기를 북돋았다. 디제이에게 질문하는 코너 '듣다보니 궁금한 이야기'를 통해 대화를 주고받았다. 1시간 방송분을 녹음하기 위해 2시간 남짓 녹음하고 또 재녹음을 이어갔다. 얼어있던 강씨의 목소리도 차츰 나긋해졌다.

매일 오전 3∼4시 방송되는 MBC FM4U(91.9㎒) '심야라디오 디제이를 부탁해'는 청취자가 직접 마이크 앞에 앉는 프로그램이다. 매일 다른 디제이가 출연해 자신만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응급실 담당 의사, 갓 수능 시험을 마친 고3 학생, 비행기 부기장, 택시기사,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40대 남성, 영화 미술감독과 무명의 개그맨 등 다양한 계층이 디제이로 참여했다. 갱년기를 겪어 새벽에 잠을 못 이루는 어머니를 위해 심야 디제이에 나선 20대 아들, 아버지의 감시망을 피해 몰래 스튜디오를 방문한 재수생 등 신선한 사연도 등장했다. 강씨처럼 현실의 '장그래'로 살고 있는 취업준비생과 꿈을 찾는 대학생들의 사연이 특히 폭주했다. 방황하고 길을 찾아가는 사람들, 팍팍한 삶을 살고 있는 청취자들에게 '당신만 그런 게 아니다'라며 토닥여주고 싶다는 이유였다.

하 PD는 "전문 디제이에 비해 듣기 불편하고 매끄럽지 않을 순 있지만 전파를 통해 삶의 현장을 생생하게 들려주겠다는 의도"라며 "일일 디제이의 거친 숨소리와 떨리는 목소리는, 어쩌면 가장 진심이 담겨있는 방송일 것"이라고 말했다.

"고민이 많은 청취자들이 주로 이 시간대에 라디오를 켭니다. 다른 사람의 삶과 고민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이해하면서 소통하게 되죠. 라디오를 더 가깝게 느낀다는 의미도 있고요. 강원도 정선에서 사연을 보낸 청취자와 정선에서 라디오 부스를 방문한 청취자는 느낌이 다르잖아요.(웃음)"

'푸른 밤 정엽입니다(밤 12시)' '이동진의 꿈꾸는 다락방(오전 2시)' 등 주로 심야 시간대 라디오 프로그램을 제작해왔던 하 PD는 지난달 17일 이 프로그램 시작과 함께 청취자들과 직접 대면하고 호흡하고 있다. 작가, 엔지니어, 조연출 없이 혼자 만들어간다. 청취율이 높지 않은 시간대지만 잔잔한 반응을 이끌어 내고 있다. 한 달 사이 신청자는 1000명을 넘어섰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하고자하는 이야기가 명확하고 열정이 있다면 홈페이지를 통해 참가신청을 할 수 있다.

"학창시절 라디오를 옆에 끼고 자라 향수를 느끼는 40대 남성분들의 참여가 많아요. 각자의 일을 열심히 해내다 부스에 앉아 라디오를 진행하면서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면 많은 것을 느낍니다.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는 세상 속에서 타인의 삶과 슬픔, 어려움에 귀를 기울여보는 방송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글·사진=김미나 기자 min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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