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의 변심

김봉선 출판국장

“이번 일로 인해 제가 살아온 삶을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상황은 힘들고 모진 시간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중략) 시민운동가, 인권변호사 경력의 정체성을 지켜가는 것과 현직 서울시장이라는 엄중한 현실, 갈등의 조정자로서 사명감 사이에서 밤잠을 설쳤고…” 박원순 서울시장이 공약으로 추진해온 ‘서울시민 인권헌장’ 제정이 무산된 뒤 자신의 심경을 담아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다.

김봉선 출판국장

김봉선 출판국장

‘헌장 좌초’라는 결과보다 주목해야 할 일은 달라진 박 시장의 행보다. 시민위원회는 ‘성소수자 차별금지’ 조항을 담은 헌장안을 표결로 결정했지만 박 시장은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다”며 전원 합의를 요구했다. 진보 진영을 중심으로 애초 불가능한 만장일치를 요구하는 것은 만들 의지가 없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왔으나 외면했다. 대신 보수 기독교 진영 앞에서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양심선언’을 했다. 지난 10월 미국 방문길에 “한국이 동성 결혼을 합법화하는 최초의 아시아 국가가 되길 희망한다”던 호언은 출발선에 들어서기도 전에 구두선이 되고 말았다.

박 시장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진보 정치인은 그 자체만으로도 한계를 갖는다. 인권변호사이자 시민운동가인 그에게 쏠리는 진보 진영의 과도한(?) 기대도 부담이 됐을 법하다. 그렇더라도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발언은 그의 인권 감수성마저 의심하게 한다. 성소수자가 되는 일은 취향이나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정체성의 문제이다.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말이 ‘여성을 지지하지 않는다’거나 ‘장애인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근본적으로 성립할 수 없는 까닭이다. 야박하게 들리겠지만 이번 일만은 박 시장이 살아온 삶을 ‘부정당한’ 게 아니라 스스로 ‘부정한’ 것으로 봐야 한다.

이번 사태는 돌발적이거나 일과성이 아니다. 의도적 변신과 맞물려 있다. 차기 대선을 염두에 둔 박 시장은 2기 출범을 계기로 이른바 ‘중도화’ ‘우향우’ 전략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박 시장은 지방선거에서 비교적 여유 있는 승리를 거뒀다. 차기 대선주자 1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런 박 시장이지만 선거 때는 ‘보수 쪽에 연줄이 없다’는 푸념을 자주 했다고 한다. 해서 좌우를 넘나들며 지지층 확대를 시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박 시장이 요즘 보수 언론과의 스킨십을 강화하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한 보수 신문은 박 시장의 행보를 ‘거침없는 우클릭 행보’라고 평했다.

정치적 부담이 따르는 현안에 대해 박 시장이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제2롯데월드 저층부의 조기 개장 허용 과정도 그렇다. 당초 조기 개장에 부정적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시민들의 판단을 수용하는 모양새로 조기 개장을 결정했다. 보수 기득권 세력의 표를 의식한 ‘친기업’ 행보가 아니냐는 의구심을 샀다. 제2롯데월드는 대형 수족관에서 누수 현상이 발생하는 등 다시 안전 논란에 휩싸여 있다. 국민안전처가 정밀안전진단 명령을 내린 걸 보면 조기 개장의 불똥이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다. 그뿐 아니다.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서울역 고가공원화 사업을 비롯해 2기 시정이 1기 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는 흔적들은 적잖다.

진보 인사의 중도화와 우향우는 ‘확장성’이란 논리에 기반한다. 진보 표만 갖고는 선거에 이길 수 없으니 중도 표심을 잡아야 한다는 논리다. 유혹적이긴 하나 착각이다. 중도 표심이란 게 실재하는지도 의심스럽지만 중도화, 우경화 전략은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인다는 명분으로 어정쩡하거나 애매모호한 태도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말이 좋아 ‘확장’이지 ‘영합’으로 그치는 경우가 태반이다. 대립하는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해소해야 할 정치인의 소임을 감안한다면 이슈에 대한 확고한 철학이나 소신은 필요충분 조건이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EBS 다큐멘터리 <킹메이커>는 중도파의 실체 분석을 시도했다. 이 프로그램은 언어학자와 심리학자, 선거 전문가들의 연구 결과 등을 빌려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자신의 신념을 훼손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고, 선거에도 별로 유효하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인다. 대안은? 진심으로 믿는 것을 신념과 논리, 상상력으로 유권자들에게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다큐멘터리의 결론이다. 현 시점에서 ‘대선주자 1위’라는 타이틀은 인기투표 같은 것이지만 박 시장이 그동안 시정에서 자신의 소신을 구현해온 데 대한 평가가 녹아 있을 터이다. 중심을 잃고 출발점을 외면하면서 ‘다른 편’을 설득할 수는 없다. 박 시장은 지금 흔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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