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성추행 여학생' 아버지 "더는 눈뜨고 당할 수 없어"

2014. 12. 1.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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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나도 박사과정 밟아봐서 안다,

공동체 침묵의 카르텔과 절대적 권력관계

포기를 각오해야 하는 학문과

10년 이상 걸릴지도 모르는 소송을

딸을 살리려면 이 길 밖엔 없다는 것도

2014년 9월25일 오후 5시께 서울역. 아빠(55)는 큰딸 수지(23·가명)와 마주 앉았다. 수지가 한참이나 머뭇거렸다. 나쁜 일이구나, 아빠는 직감했다. 긴장감에 호흡을 가다듬었다. 고려대 대학원생인 수지는 지난 3개월간 이형민(54·가명) 교수로부터 성희롱을 당했다고 했다. 수시로 영상전화를 걸어오고 아침저녁으로 사진을 보내라고 요구했단다. 때로는 포옹도 했다. 정색할 수 없어 완곡하게 거절하면 "제자로서 이뻐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교수의 말과 행동이 혼란스러웠지만 수지는 감히 거역할 수 없었다. 결국 열흘 전부터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고 했다.

"감사하다"라는 문자를 보낸 뒤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아빠는 멍했다. 이틀 전 이 교수가 보낸 카카오톡 때문에 더 그랬다. 교수는 "남은 학자 인생의 에너지를 다 쏟아부어서라도 훌륭한 학자로 수지를 키워내려 한다"고 했다. 하지만 "건강이 심각한 걸림돌이 된다면 휴학을 검토하라"며 "그 말에 수지가 충격이 컸나보다"라고 했다. 아무것도 몰랐던 아빠는 "못난 자식을 맡아주셔서 감사하다" "걱정 끼쳐드려서 죄송하다"고 답장했다.

그동안 이를 악물고 참아낸 수지가 한없이 가여웠다. 그리고 미안했다. 흐느끼는 수지를 보며 아빠가 물었다. "공부를 계속하고 싶니?" 수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공부가 좋아요." 국가장학금(GPF) 때문에 그냥 휴학하지 않고 진단서를 받아 휴학하겠다고 했다.

아빠는 박사과정을 밟아봐서 안다. 교수의 성희롱을 문제 삼는 제자는 공동체에 발붙일 수 없다는 사실을, 성희롱으로 확인돼 중징계를 받더라도 공동체는 "잘못 걸려 똑똑한 교수가 망가졌다"며 측은해한다는 사실을. 아빠도 그런 공동체에 속해 있었다. 수지가 학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성희롱을 덮어야 한다고 아빠는 생각했다. "휴학해서 쉬면서 건강을 찾고 지도교수를 바꾸거나 유학을 가자."

대통령 직속 청년위원회가 대학원생 2354명에게 설문조사를 해보니 대학원생 2명 중 1명은 부당한 처우를 경험하고 있었다. 언어·신체·성적 폭력(31.8%)이 가장 많고, 사생활 자유와 사적 노동(25.8%), 물질적 대가 요구(20.2%)가 뒤를 잇는다. 성희롱·성추행을 경험한 대학원생도 4.8%나 된다. 하지만 대부분(65.3%)은 참고 넘어간다고 했다. 불이익이 두렵고(48.9%), 해결이 안 될 것 같아서(43.8%)다.(10월29일 '대학원생 연구환경실태 보고서')

학내 성폭력 사건에서 2차 피해가 발생하거나 유사한 사건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공동체 문화가 달라져야 한다. 이를 위해선 공동체가 사건을 정확하게 공유하고 자기 조직의 문제점을 진솔하게 고민·토론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렇지 못하면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뀌는 묘한 상황이 연출된다.('대학교 성희롱·성폭력 실태조사', 국가인권위원회, 2012)

수지는 휴학했다. 여행 가서 툭 털고 오라고 아빠가 수지를 이모와 함께 일본에 보냈다(10월1일). 다음날 아빠는 이 교수에게 전자우편을 보냈다. "이 상황에서도 공부가 좋다는 수지를 보면서 가슴이 무너지고 피눈물이 나지만 아이의 장래를 위해 그냥 휴학해 치료하고 미래를 생각하자고 했습니다. 힘없고 어린 수지가 어떤 불이익도 받지 않도록 해주셨으면 합니다. 제 인생을 걸고 키운 제 분신 같은 자식입니다. 부탁드립니다."

입을 다물고 거부하자 "열어줘"

10월4일 여행에서 돌아온 이모가 걱정했다. "아이가 이상해요. 자다가 놀라서 깨서 파르르 떨어요. 교수와 마주치는 꿈을 꿨다는데…. 할 이야기가 더 있나봐요." 8월19일 벌어진 성추행을 수지가 마침내 털어놨다. 연구실에서 작업을 하다 오후 3시께 지도교수가 바람도 쏘일 겸 나가자고 했다. 서울 부암동에서 밥을 먹고 학교 지하주차장으로 돌아왔다. 수지가 차에서 내리려 하자 교수가 제지했다. "안 내리세요?" 잠시 뒤 움직임이 없어지자 주차장 센서등이 꺼졌다. 교수가 수지에게 강제로 키스했다. 입을 다물고 거부하자 이 교수가 말했다. "열어줘." 공포에 질려 막 뛰쳐나왔다.

분노한 아빠는 이 교수에게 다시 전자우편을 보냈다(10월8일). "겨우 23살 먹은 여자아이의 인생을 송두리째 엉망으로 만들어놓고도 멀쩡하게 대학에서 학생을 지도하다니…. 내가 가만히 있었던 이유는 문제를 삼아 공론화될 경우 아이에게 위해가 가해지고 더 큰 상처를 받을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마음속에 묻고 가려 했으나 고려대를 다니는 수지 같은 다른 아이들을 생각하니 잠이 오지 않는군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양심이 있다면 교수직을 내려놓고 공개 사과하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 인생을 걸고 법적 조치와 함께 공론화하려 합니다."

이 교수가 아빠와 수지에게 답 전자우편을 보냈다. 사진 찍어 보내기는 지도교수로서 걱정해서라고, 포옹하기는 남녀 구분 없이 모든 학생과 한다고 했다. 수지가 정신과 치료를 받는 이유는 연구성과를 내지 못한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아빠는 반박했다. "왜곡하지 말라. 본질은 성추행"이라고 반박했다. 이 교수는 "원하시는 대로 모든 조치를 하세요. 저도 준비하겠습니다. 앞으로는 제가 선정한 변호사와 이야기하도록 하세요"라고 답했다.

교수가 가해자로 지목되면 혐의를 적극적으로 부인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면 사건 처리가 무한히 늘어진다. 물적 증거가 없는 경우가 많아 사실관계 확인이 어렵기 때문이다. 대학에 신고해도 수사권이 없어서 지지부진하다. 조사가 완료되고 성폭력 사건으로 인정돼 학교에서 징계 처분을 결정해도 교수가 행정소송 등으로 적극 항변한다. 민사소송도 각오해야 한다. 어떤 경우에는 10년 이상 끌기도 한다.('대학교 성희롱·성폭력 실태조사')

이 교수가 성희롱·성추행을 전면 부인하자 수지가 발작 증세를 보였다. 심하게 말을 더듬으며 몸을 떨었다.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소리쳤다. "싫어, 싫어. 이거 나 아니잖아." 그러다 안정제를 먹고 쓰러졌다. 하루에도 수차례 반복됐다. 목욕탕에서 머리와 몸, 얼굴을 닦고 또 닦았다. 교수의 손길이 닿았던 곳은 다 가죽을 벗겨내고 입술도 도려내고 싶다고 했다. 잘 먹지도 못했다. 겨우 먹었다 싶으면 토했다. 몸무게가 7~8kg 빠졌다. 전화번호도 세 차례 바꾸고 집 전화도 바꿨다.

연구실 대학원생에게 진술서 요청한 교수

아빠는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웠다. 답답함이 밀려왔다. 그러나 날마다 우는 아내와 놀란 둘째딸(17살)을 다독여야 했다. 서울을 오가며 큰딸을 치료하고 증거 자료도 수집해야 한다. 수지의 친구들을 만나 전후 상황을 들었다. 부모보다 친구들에게 먼저 수지가 고민을 털어놨다고 했다. "교수가 허그(포옹)해줘야 한다고 한다고 그러고…." "내 볼에 입을 맞춰서 소름이 끼치도록 싫었어요." "교수가 허벅지를 쓰다듬고 무릎에 강제로 앉혔어요." "주차장 불이 꺼지고 나한테 입을 맞췄어요. 너무 무서웠어요. 죽고 싶을 만큼 싫었어." 수지가 불안감과 자살 충동을 느꼈다는 것도 알았다. "이 일이 알려지면 나한테 낙인이 찍힐까봐, 주홍글씨가 새겨질까봐 너무 무서워요." "혼자 있지도 못하겠고 혼자 어디 가는 것도 겁나요. 괜찮은 척 꾹꾹 눌렀었나봐요." "높은 데 있으면 떨어져버리고 싶고 찻길 옆에 있으면 달리는 차에 뛰어들고 싶고…. 죽고 싶어요." 수지의 친구들에게 진술서를 받으며 아빠는 싸움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학내 성폭력 사건에서 지도교수-대학생이 당사자인 경우엔 피해가 심각하다. 권력관계가 절대적으로 비대칭적이기 때문이다. 피해자는 논문 지도 및 졸업, 이후 진로 등을 생각하며 참고 또 참다가 피해가 너무 오래 지속되고 그 정도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진 뒤에야, 혹은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피해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야 구제 절차를 밟게 되는 경우가 많다.('대학교 성희롱·성폭력 실태조사') 구제 절차도 쉽지 않다. 고미경 한국여성의전화 성폭력상담소장은 "사법부에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문화가 뿌리 깊은데다 성폭력 사건은 폐쇄적 공간에서 이뤄져 피해자가 피해를 입증하는 구조다. 그만큼 가해자 처벌이 어렵다"고 했다.('대학교 성희롱·성폭력 실태조사')

이 교수가 10월19일 오후 2시40분께 전남 순천으로 내려와 아빠를 만났다.

아빠: 8월19일에 강제로 입맞춤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교수: 했습니다.

아빠: '열어줘'라고 얘기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교수: '열어줘'라는 건 문을 열어달라는 뜻입니다.

아빠: 아니 어떻게 지금 그런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합니까. 애가 지금 내 차 조수석엘 못 앉아요, 무서워서.

아빠는 고려대 양성평등센터에 신고했다(10월24일). 이 교수는 연구실 대학원생에게 진술서를 써달라고 요청했다(10월29일). "교수는 연구실 관련 모든 행사와 일상생활에서 성추행 또는 성희롱 관련 어떤 행위도 절대 하지 않았다." 대학원생들에게 아빠는 미안했다. "우리가 이기려면 대학원생들을 증인으로 세우고 해야 하는데 그러면 학교에서 불이익을 받을까봐 걱정이다. 우리 세대가 세상을 이렇게 만들었구나, 반성한다."

사직서 처리하면서 조사 중단

같은 과에서 정년퇴임한 명예교수가 "원만하고 조속한 해결에 도움을 주고 싶다"고 연락해왔다. 아빠는 정중히 거절했다. "이렇게 끝내면 '나는 무죄인데 여학생 부모 때문에 억울한 일에 말렸다'고 이 교수가 주장하고 다닐 것이다. '그 여학생이 모든 것을 취하한 것을 보면 알지 않느냐'며 다른 학교에 가지 않겠나."

아빠는 서울 송파경찰서에 고소장을 제출했다(11월6일). 수지는 학내 양성평등센터에서 피해를 진술했다(11월7일). 당시 상황을 다시 떠올리며 괴로워하던 수지가 정신과 약을 다량 복용했다(11월12일). 인근 병원에서 위 세척을 하고 돌아온 그는 이튿날 경찰병원 원스톱센터에서 고소인 조사를 받아야 했다. 아빠가 미루자고 했지만 수지는 가겠다고 했다. "더 이상 무력하게 당하고 싶지는 않아요." 경찰 조사를 받는 도중에 수지는 다시 발작을 일으켰다. "가해자를 처벌하지 않으면 피해자가 평생 패배감에 휩싸인다니까, 또 딸이 너무 원통하고 분해하니까, 이 싸움을 한다. 하지만 솔직히 무섭다. 아이를 살려내려고 시작한 일이 아이를 잡는 게 아닌지…." 아빠는 복잡한 심정이다.

이 교수가 사직서를 제출했다고 했다. 아빠는 총장에게 전자우편을 보내 "성추행 혐의에 대한 공적 조사와 판단이 끝나기 전에 사직서를 수리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사직은 책임을 피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생각해서다. <한겨레> 등 언론 보도가 나왔다(11월21일). 이 교수 쪽은 "강제추행은 전혀 없었고, 아끼는 제자와 스승의 관계일 뿐이었다"고 해명했다. 고려대는 이 교수의 사직서를 받아들였다. 양성평등센터의 조사·징계는 중단됐다. 고려대 관계자는 "사표를 냈는데 수리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성추행 사건을 조사하고 징계위원회를 열기는 현실적으로 힘든 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아빠는 허망하다. "학교에서 손을 떼면 경찰 조사만 남는다. 홀로 잘 싸워서 가해자를 기소하더라도 집행유예로 풀려나지 않겠나."

순천/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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