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상 고객' 인격 모독·성희롱.. 팀장님은 "너만 참으면 된다"

류인하 기자 2014. 11. 16.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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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권 종사자 3명 중 2명 "폭언·협박 시달려도 웃어야"사측 보호 없는 게 더 '상처'

국내 한 보험회사에서 텔레마케팅(TM) 일을 하고 있는 오모씨(37)는 지난 8월부터 수면제를 복용하고 있다. 잠자리에만 들면 낮에 고객들로부터 들은 폭언과 오후 4시20분마다 모니터에 뜨는 실적 경고창이 생각나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오씨는 "차라리 조용히 전화를 끊어버리면 모르겠는데 '내 정보를 어떻게 알았느냐. 소송 걸겠다'며 협박하거나 '밥 먹고 할 짓이 없어 이런 일이나 하느냐'고 비하하는 사람들을 상대하는 게 너무 힘들다"고 털어놨다.

오씨는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7시까지 팀장이 할당한 고객정보 데이터 베이스(DB) 60~80건을 토대로 보험계약 요청전화를 건다. 처음에는 전화만 열심히 돌리면 될 줄 알았지만 현실은 달랐다. 팀장은 "하루에 60통을 돌리면 3~4건 정도는 성사시킬 수 있다"며 "그 정도만 해도 월 200만원 이상 보장된다"고 했다. 하지만 하루에 단 한 건의 계약도 성사시키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월급은 두 달 전부터 140만원을 넘지 못하고 있다.

다행히 전화연결이 돼도 온갖 폭언이 쏟아지기 일쑤였다. 남성 고객들은 성적 수치심이 느껴지는 말도 서슴지 않고 내뱉었다. 하지만 오씨는 "너무 심한 것 아니냐"는 말조차 할 수 없었다. 정신적으로 버티기 힘들어 잠시 '콜'을 쉬면 모니터 화면에 경고가 떴다. 정당하게 쉴 수 있는 시간은 오후 3시30분~4시 사이 간식타임이 전부였다.

국내 금융지주회사 산하의 한 보험사 면접담당자는 "임신한 여성이 TM 업무를 하다 정신적으로 힘들어 유산할 뻔한 사례가 있다"고 했다. 현재 이 회사는 임신한 여성은 TM 업무에서 배제하고 있다. 금융사 정규직들도 '진상' 고객들 때문에 힘들기는 마찬가지이다. 명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은행에 취직한 최모씨(32)는 최근 공공기관으로 이직했다. 막무가내로 '내것 먼저 처리하라'는 사람들을 웃는 얼굴로 맞이하는 것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매년 아이템만 다를 뿐 반복되는 실적 압박과 은행 영업시간과는 별개로 해야 하는 잔업과 야근으로 건강까지 잃었다. 최씨는 "급여는 은행보다 적지만 잘 선택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16일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은행·증권·생명·손해보험회사 등 금융권 직원 2456명을 상대로 감정노동실태조사를 벌인 결과 직원의 3분의 2가 폭언을 듣고도 실적을 위해 친절함을 강요당하는 '감정노동'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폭언을 경험한 업무별로는 '보상업무' 담당이 67.3%로 가장 높았고 고객응대 업무는 66.6%가 폭언을 들어본 것으로 조사됐다. 영업업무(41.7%)의 폭언경험은 비교적 낮았다. 폭언의 주체는 고객이 90% 이상을 차지했다. 보상업무 담당자의 94.1%가 고객으로부터 폭언을 들은 경험이 있었다. 또 10명 중 1명꼴로 고객과 상사로부터 성희롱을 당한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10명 중 9명은 불쾌한 감정을 숨기고 고객을 응대해온 것으로 조사됐다. '내가 하는 일은 내 기분과 관계없이 항상 웃거나 즐거운 표정을 지어야 한다'는 물음에 직종 평균 88.9%가 '그런 편' 또는 '매우 그런 편'이라고 답변했다. 고객응대 담당자의 91.8%는 이 같은 '감정노동 외면행위'를 하고 있다고 답했다. 응답자 직군별 평균 34.3%는 병원 방문이 필요한 중등 이상의 우울증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은 "고객응대가 주 업무인 근로자들이 고객들로부터 폭언 등 피해를 입는 것은 업무수행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며 "중요한 것은 사측이 이 경우 근로자를 보호하려는 태도를 얼마나 보이느냐에 있다"고 지적했다. 감정노동 피해를 입었을 경우 회사가 적극적으로 나서 문제를 해결하거나, 근로자들에게 "고객으로부터 폭언 등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경우 적극적으로 대응하라"는 지속적인 매뉴얼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 위원은 "감정노동의 가장 큰 문제는 노동자가 폭언을 들어도 '네가 참아라'라고 하는 회사의 태도에 있다"고 말했다.

<류인하 기자 ach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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