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랩..헤어졌던 '형제'의 전격 재회

2014. 11. 2.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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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시인·래퍼·평론가 '의기투합'

시 낭독에 소리·연기 입히고

시를 랩으로 재해석하는 등

시의 음악성·랩의 문학성 살려

둘의 연결고리 만드는 게 목표

"시와 랩은 배다른 형제다."

힙합 래퍼와 시인, 음악평론가…. 어딘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세 남자가 뭉쳤다. 그룹 가리온의 엠시(MC)메타, 김경주 시인, 김봉현 음악평론가는 "시와 랩의 연결고리" 구실을 하겠다며 지난 9월 프로젝트 유닛을 결성했다. '포에틱 저스티스'다. 공연, 출판, 강연 등을 통해 시와 랩의 연결고리를 만드는 게 세 남자가 한배를 탄 이유다.

포에틱 저스티스는 지난달 18~19일 대구 공연으로 첫 공식활동을 시작했다. 공연에서 김경주 시인은 입체낭독 퍼포먼스를 했다. 기존의 전형적인 시 낭독을 벗어나 사운드, 연기, 도구 등을 다양하게 활용하며 시를 소리내 읽었다. 엠시메타는 김경주 시의 원문을 훼손하지 않은 채 시인이 심어놓은 라임을 랩으로 재해석하는 슬램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이를 '포에트리 슬램'이라 하는데, 시와 랩의 중간 형태로 보면 된다고 엠시메타는 설명했다. 시와 랩을 시나리오로 결합한 랩 드라마 <자살공화국>도 선보였다. 극작가로도 활동하는 김경주 시인이 쓴 대본에 따라 엠시메타가 랩을 하고 김경주 시인이 내레이션을 하며 스토리를 전달하는 형태다.

"랩의 라임(두운, 각운 등 운율)은 영미 시문학에서 온 것이에요. 시는 본래 노래로 불려지기 위해 쓰여진 형태가 발전한 거고요. 시와 랩은 한 뿌리에서 나온 셈이죠." 이 모임을 제안한 김봉현 평론가의 설명이다. 그는 <힙합-블랙은 어떻게 세계를 점령했는가> <힙합, 우리 시대의 클래식> <한국힙합-열정의 발자취> 등 책을 쓰며 힙합 분야에 천착해왔다.

김경주 시인은 2003년 등단해 2009년 김수영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등을 수상하며 주목받았다. 한국 현대시의 미래를 이끌어갈 젊은 시인으로 꼽힌다. "현대시는 내재율을 지녀요. 랩처럼 외형률을 많이 쓰진 않죠. 하지만 시를 소리 내 읽으면 작가가 심어놓은 음악성을 느낄 수 있어요. 음악이 없었다면 시가 탄생하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현대시가 너무 어려워서 대중과 멀어지는 분위기가 있는데, 그럴수록 시가 지닌 본래의 음악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경주 시인과 김봉현 평론가는 1년여 전부터 시와 랩의 교집합에 대해 토론해왔다고 한다. 김경주 시인이 진행하는 팟캐스트 방송 <문장의 소리>에 '김봉현의 흑형 이야기'라는 꼭지를 만들어 문학과 힙합의 접점을 매주 설명하기도 했다. 그러다 한국 힙합 1세대 래퍼 엠시메타까지 끌어들여 포에틱 저스티스의 세 꼭짓점을 완성했다. 엠시메타는 시의 은유를 뜻하는 메타포에서 이름을 따왔을 정도로 시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 "노래 가사보다 시를 쓴다는 생각으로 랩 가사를 써왔다. 시와 랩의 접점을 찾는 작업은 오래전부터 갈망해오던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힙합은 이제 대세 문화가 됐다. 케이블 채널 엠넷의 힙합 프로그램 <쇼 미 더 머니>는 방송될 때마다 큰 반향을 일으켰고, 거리에는 래퍼들이 즐겨 쓰는 모자인 '스냅백'이 넘쳐난다. 그러나 엠시메타는 "최근 힙합이 인기몰이를 하고 래퍼 지망생이 늘고 있지만, 힙합계에서는 상대적으로 우려하는 이들도 많다. 래퍼들의 실력은 갈수록 좋아지는 데 반해, 랩에 담긴 메시지는 점점 더 빈약해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스왜그(잘난 척하거나 으스대는 행위), 디스(랩으로 비방하거나 공격하는 행위), 배틀(랩 실력을 겨루는 행위)만 넘쳐난다는 것이다. 그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는데도 이를 음악으로 표현하거나 하다못해 1인시위라도 하는 힙합 음악인들이 거의 없다"며 힙합계에 사회적 목소리가 유독 적은 분위기를 아쉬워했다.

김경주 시인은 "힙합의 양적 성장뿐 아니라 질적 성장을 위해서는 본질에 해당하는 라임과 메시지가 필요하다. 힙합 본연의 문학성과 저항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상실의 시대라 할 만큼 어려운 시대를 지나고 있지만, 예술가들의 선언이 부족한 것 같아요. 사회적 문제와도 싸우고 당대의 상투성과도 싸우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시적 정의'를 의미하는 포에틱 저스티스를 이름으로 정한 것도 이와 관련있다. 시나 소설 속의 권선징악, 인과응보 사상을 일컫는 문학비평용어인데, 힙합의 저항성과도 일맥상통하는 지점이 있다고 김봉현 평론가는 설명한다. 그래선지 힙합계에서도 이 용어를 종종 만날 수 있다. 미국의 전설적인 래퍼 투팍과 마이클 잭슨의 동생이자 가수인 재닛 잭슨이 출연한 1993년작 영화 제목이 <포에틱 저스티스>다. 또 지난해 미국 힙합계에서 '컨트롤'이라는 곡으로 대대적인 디스전을 촉발한 것으로 유명한 래퍼 켄드릭 라마는 2012년 '포에틱 저스티스'라는 제목의 노래를 발표했다.

세 남자는 이달 말 캐나다 시인 셰인 코이잔의 <아마도 그건 아물 거야> 출간 기념회를 겸한 공연을 할 예정이다. 김경주 시인이 이 책을 번역했는데, 시집보다는 랩북에 가깝다고 한다. "셰인 코이잔은 '포에트리 슬램'을 하는 작가예요. 어릴 때 학원폭력에 시달리던 '왕따' 소년이었는데, 그런 그에게 할머니가 '너의 생각을 랩으로 풀어봐라'고 권한 뒤로 이 길로 접어들었다고 해요. 그의 책을 번역해 소개함으로써 시와 랩의 연결지점을 전하고 싶었어요."

이들은 또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아이들의 학교가 있는 안산 단원구에서 12월 중순께 열리는 축제에 참여할 예정이다. "웃음이 사라진 동네에서 웃음을 되찾고 위로와 치유를 받을 수 있는 축제를 예술가들이 마련한다고 해서 우리도 동참하기로 했다"고 김경주 시인은 말했다. 김봉현 평론가는 "이 시대에 예술이 마땅히 지녀야 할 사회적 목소리를 시와 랩으로 표출하는 활동을 계속해서 펼쳐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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