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민센터 체험기]경계에 선 사람들.. "한국에서 새 삶 찾고 싶어요"

이동현 입력 2014. 11. 1. 20:16 수정 2014. 11. 2.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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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종도 출입국외국인지원센터 르포주민 반대 속 지난 2월 문 열어54명 입소자들, 낯선 한국 생활종교·정치 박해 피해 새 삶 꿈꿔"고향 가면 감옥 아니면 죽음

인천광역시 중구 영종해안북로 1204번길 123.

한적한 영종도 북쪽 해안도로 가운데 덩그러니 서 있는 3층 건물. 이곳은 출입국외국인지원센터다. 이름을 들어도 뭘 하는 곳인지 짐작하기란 쉽지 않다. 문을 열기 전 이 곳은 영종도 난민센터란 이름으로 불렸다.

우리나라는 1992년 '난민의 지위에 관한 협약'(난민협약)에 가입해 94년부터 난민신청을 받았다. 2001년 첫 난민이 인정됐고 매년 2000명이 넘는 외국인이 종교나 정치적 이유로 우리나라에 난민신청을 한다.

출입국외국인지원센터는 지난 2월 문을 열었다. 우리나라에 난민신청을 한 사람들 중 갈 곳이 없는 이들이 머무는 곳이다. 통상 1년 정도 걸리는 난민심사 기간 동안 센터 입소자들은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 속에 하루하루를 보낸다.

아프리카 배낭여행 중에 난민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중앙SUNDAY 강승한 인턴기자(경희대 국제학부 4년)가 출입국외국인지원센터에서 24시간을 함께 지내며 이들의 생활을 지켜봤다. "꼭 한번 가보고 싶다"는 그의 요청을 법무부가 들어줬다.

대한민국 안, 대한민국 밖

지난 달 29일 오전 8시 40분, 공항철도 운서역. 셔틀버스 한 대가 도착했다.

버스를 기다리는 이들은 출입국외국인지원센터에서 일하는 직원들. 운서역에서 센터까지의 거리는 불과 5㎞지만 따로 승용차를 이용하지 않으면 교통수단은 하루 세 번 운행하는 셔틀버스가 전부다.

난민신청자는 심사가 끝날 때까지 합법적인 체류자격을 얻는다. 따로 머물 곳이 있다면 반드시 센터에 머물러야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급하게 고향을 떠난 이들이 낯선 한국 땅에서 살 곳을 찾기란 쉽지 않다. 가족들과 함께 온 경우도 많아 먹고 살 일이 막막하다. 법무부는 난민신청자 가운데 주거 지원 신청을 한 이들을 대상으로 심사를 거쳐 입소자를 정한다.

센터가 문을 열기까지는 우여곡절도 많았다. 8㎞ 가량 떨어진 신도시 주민들은 인터넷 카페까지 만들어 반대 목소리를 냈다. 영종도를 대규모 난민촌으로 만드는 것 아니냐는 소문까지 돌았다. 지난해 9월 센터를 완공하고도 공식 개소하기까지는 5개월이 더 걸렸다. 센터의 이름에서 '난민'이란 말이 빠진 것이 주민들의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서란 주장도 있다. 물론 법무부는 "센터의 공식명칭은 안전행정부가 정한 것"이란 입장이다.

센터가 문을 연지 8개월. 잡음은 잦아든 편이다. 센터 주변에 사는 주민들은 오히려 큰 거부감이 없다. 개소식부터 명절에 이르기까지 주변 주민들은 센터에 놀러와 불안한 한국생활을 이어가는 난민신청자들을 도와주고 있다.

운서역과 센터를 오가는 셔틀버스는 난민신청자와 바깥 세상을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다. 센터에 마냥 머물 수 있는 건 아니다. 기본 6개월에 3개월을 연장해 최장 9개월까지 가능하다. 난민신청자들은 퇴소 이후를 위해 주변 공장이나 세차장, 경기도 전역까지 나가 일자리를 찾는다. 하지만 출퇴근이 어려운 탓에 이마저도 쉽지 않다. 센터는 대한민국 안에 있지만, 대한민국에 속하기도 어렵다. 난민신청자들은 희망과 절망, 대한민국 안과 바깥, 그 경계에 서 있다.

낯선 생활, 미래에 대한 희망

오전 9시 30분. 센터의 일과가 시작됐다. 오전에 있는 한국어 교육은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한다. 오후 한국문화 특강은 자율이지만 대부분 참여한다. 현재 센터에서 생활하는 난민신청자는 모두 54명. 입소시기가 모두 달라 한국어 수업은 쉽지 않다. 교실은 여느 대학 한국어학당의 분위기와 다르지 않다. 다른 점이 있다면 학생이 남녀노소를 불문한다는 것. 이해가 빠른 어린 아이들은 어른들이 틀린 문제를 답해주기 바쁘다.

7살짜리 딸과 함께 수업에 참여한 40대 중국인은 "안 쉬워"를 연발한다.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눈빛만큼은 진지하다. 난민으로 인정받아 살게 될 내일을 꿈꾸는 그에게 수업시간은 대한민국과 자신을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다.

점심시간이 됐다. 센터에서 난민신청자들에게 제공하는 하루 세끼 식대는 4600원. 한끼에 1500원 꼴이다. 센터 김태완 운영지원과장은 "예산이 한정돼 있어 유통기한이 닥친 빵이라도 지원해 주는 곳이 있으면 좋겠다"고 안타까워 했다.

식당 앞 게시판에는 임산부, 노약자, 어린이 먼저라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센터 입소자 가운데 가족은 네 가구다. 최고령인 64세 노인부터 태어난 지 74일된 아기도 있다. 이날 점심으론 쌀밥과 김치, 감자와 생선이 나왔다. 김치가 가득한 배식통에 손을 대는 사람은 드물었다. 생전 처음 맛보는 김치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다. 급한 대로 고향에서 쓰는 향신료를 밥에 뿌리거나 찍어 먹는다.

안전문제로 취사시설은 따로 제공하지 않는다. 지난 여름, 센터는 예외적으로 취사를 허용했다. 아이의 생일상을 차려주고 싶다는 몽골 출신 엄마의 요청 때문이었다. 그날 아이는 한국에 온 뒤 처음으로 엄마가 만든 몽골 음식을 먹었다.

오후 수업 전 예멘에서 온 10대 난민신청자를 만났다. 한국에 어떻게 오게 됐느냐는 질문에 서툰 영어로 답했지만 알아듣기 힘들었다. 들리는 건 '엉클(uncle·삼촌)'과 '킬(kill·죽이다)'이란 단어뿐. 손짓발짓까지 동원한 끝에 그의 사연을 이해했다. 시아파 무슬림인 삼촌이 수니파인 아버지와 자신을 죽이려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전 재산을 털어 여덟 명의 가족과 함께 한국행 편도 비행기표를 샀다.

오후 1시 30분. 한국문화 특강시간이 시작됐다. TV 속 화면에선 국악에서부터 부산국제영화제까지 다양한 한국 관련 영상들이 소개됐다. 난민들은 영어로 진행되는 강의를 자국 언어로 통역해 서로 들려준다. 수십 개의 동시통역이 이뤄지는 강의실은 금세 시끌벅적해졌다

화면에 피겨스케이트 선수 김연아가 나오자 다들 놀란 표정을 짓는다. 아프리카와 중동 출신들이 대다수인 난민신청자들 가운데 피겨스케이팅을 처음 보는 사람도 많다. 화면 속에 '강남스타일'의 가수 싸이가 등장하자 분위기는 한껏 달아올랐다. 남자들은 말춤을 따라 하고 히잡을 쓴 여자들은 박수를 치며 웃는다.

난민 인정이 되고 나면 좀더 한국문화를 이해할 수 있을까. 입소자들은 화면 속 제주도 풍경과 축구선수 박지성, 한강의 기적을 서툰 한글로 메모지에 써 가며 수업을 들었다.

가족이 된 난민들, 아버지가 된 한국인

오후 4시 일과가 끝났다. 어린 아이들은 오전에는 놀이방에서, 오후에는 센터를 놀이방 삼아 뛰어 논다. 한 아이는 최근 근처 초등학교에서 입학불허 판정을 받았다. 한국어가 서투르다는 이유에서였다.

"한국에서 의사가 되고 싶어요"를 서툰 우리말로 말하던 10대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체류자격에 관계없이 학교장 재량에 따라 입학은 가능하지만 인근 학교 가운데 센터 입소자 아이들을 받아줄 여력이 있는 곳이 없다.

아이들 틈에서 센터 버스기사 최영열씨를 만났다. 최씨는 "이국적인 외모 탓에 처음 만나면 센터 입소자로 아는 사람이 많다"며 웃었다. 난민신청자들 사이에서 '아버지'로 통하는 그는 "난민신청자들은 내 자식 같다"고 말했다.

- 영종도 주민인가. 처음 센터가 만들어질 때 반대가 심했다고 들었다

"28대째 영종도 토박이다. 정작 가까이 사는 주민들은 별 말이 없는데 신도시 주민들이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나는 여기 있는 아이들이 난민이 아니라 영종도 주민이라고 생각한다."

- 기억에 남는 난민신청자가 있나.

"얼마 전 취직을 해서 센터를 나갔는데 자주 집에 놀러온다. 얼마 전 예멘식당으로 초대해 음식을 대접하더라. 향신료가 독해 먹기 힘들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마음이 고마웠다."

오후 6시. 어김없이 끼니시간이 돌아온다. 울먹이는 중국 아이를 예멘에서 온 아저씨가 달래며 밥을 먹인다. 우는 아이는 먼저 발견한 사람이 달래고 밥도 먹인다. 내일을 알 수 없는 '경계인' 신분이지만 같은 처지라 가족이 됐다.

얼마 전 센터 개소 이후 처음으로 아기가 태어났다. 입소자 모두 제 일처럼 기뻐하며 잔치를 벌였다고 했다. 아프리카에서 온 사람들은 전통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축하해줬다. 아직 기운을 차리지 못한 산모를 대신해 말도 안 통하는 타국 여자들이 밥을 타 주고 수발까지 들어줬다.

삶을 향한 좁은 문

오후 10시. 입소자들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고향인 중동이나 아프리카에선 하루가 시작되는 시간이어서다. 전화로, 컴퓨터로 가족들과 연락을 하거나 자국 소식을 검색한다.

룸메이트인 이집트인 아저씨는 정치범으로 9차례나 옥살이를 했다고 했다.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하면 큰일 아니냐'고 묻자 그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인샬라. '신의 뜻대로'란 의미다. 인정되면 감사할 일이고, 거절당해도 돌봐준 한국에 감사할 것이라고 했다.

센터에서 만난 난민신청자들은 저마다 다른 사연을 가졌다. 하지만 입을 모아 얘기한 것은 고향엔 두 가지가 기다린단 말이었다. 감옥 아니면 죽음. 대부분 전자는 경험해 본 이들이다. 다음 번에는 후자가 될 확률이 높다. 정든 고향을 떠난 건 살기 위해서다.

새벽녘. 무슬림의 기도시간을 알리는 노래, 아잔(Adhan) 소리에 눈을 떴다. 이집트인 아저씨는 자리를 정리하고 경건하게 기도를 올린다. 한국에 온지도 벌써 두 달째. 반복되는 하루가 시작됐다. 어른들은 한국어강의실로, 아이들은 놀이방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난민신청자들이 모두 난민으로 인정받기는 어렵다. 절절한 사연 가운데 실제와 다른 경우도 적지 않다.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하면 이의신청을 할 수 있고, 불복하면 행정소송을 제기할 수도 있다. 94년 이후 우리나라에 난민신청을 한 외국인은 모두 8520명. 이 가운데 434명이 난민지위를 인정받았다. 올해 9월말 현재 우리나라의 난민 인정률은 7.3%. 난민인정이 되지 않더라도 인도적 체류허가를 하는 경우를 포함해도 17.9% 밖에 안 되는 좁은 문이다.

법무부 관계자는 "우리나라는 국제협약에 따라 인도적 차원에서 난민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출입국외국인지원센터도 이런 차원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강승한 인턴기자 kshwvv@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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