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성읍교회-영광법성교회] 포구의 십자가 우상을 이겨내다
교회 차량이 분주히 오갔다. 법성포구는 신·구도로 '두 줄'로 이어지는데 주일 아침 그 신·구도로는교회 차량이 지나는 것을 빼면 한산한 편이었다. 그 도로 서북방향 10㎞ 지점에 영광원자력발전소가 있고,40㎞ 동쪽엔 광주광역시가 있다. 신·구도로 양쪽엔 굴비 가게가 즐비하다. 소위 '영광굴비'의 본산이 이곳 법성포다.
법성교회는 옛 법성상고 터 앞 구길 가에 위치한다. 예배당 마당에 서면 멀리 명소 숲쟁이꽃동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조선 중종 때 해풍을 막을 목적으로 심은 느티나무가 숲을 이뤄 붙여진 명칭이다.그 동산 너머에 백제불교도래지가 테마공원처럼 펼쳐진다. '백제불교도래지'는 곧 법성(法聖)이란 지명의 연유다.
이 테마공원은 전래의 정확한 위치가 불분명함에도 200여억원의 공사비를 들여 지난 2006년 문을 열었다.18m 높이의 불상 등 다양한 시설이 들어섰다. 영광군 기독교인들의 반대가 심했으나 이를 저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반면 '지금도 살아 있는' 조선 진성(鎭城)과 그 성읍 내 문화재 그리고 일제 강점기 근대 문화재류 등은 속수무책으로 사라지고 있다. 법성은 중세와 근세가 혼재하는 역사 공간인데도 실재(實在) 유적을 찾기 어려운 무속류가 '신들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 숲쟁이꽃동산은 관광객을 위한 용어다. 역사유물 용어로는 법성진성이다. 조선시대는 쌀과 특산물 등으로 세금을 걷었고 이 세금을 쌓아둔 곳이 조창(漕倉)이다. 바닷길을 이용해 한양 도성으로 세금을 가져간 것이다. 이 때문에 항구도시가 생겼다. 이 도시를 방어하고 치리하기 위해 성을 쌓고 수군을 주둔시켰다. 숲쟁이꽃동산을 중심으로 한 마을 이름이 지금도 진내리인 이유다.
법성진성은 야트막한 산 위에 쌓은 석성이다. 이 석성은 북·서·남벽 총 460m가 건재하다. 석성과 관아 건물의 복원과 증축 등을 거치면 특정 종교 테마파크 이상일 텐데 복원·증축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법성교회를 세운 에미상은 누구인가
법성교회. 지난 12일 주일. '제114권 40호'라고 표기된 법성교회 주보를 받았다. 1900년에 교회가 시작됐다는 얘기다. 그 법성교회에 들어서니 청년들이 강단에 일렬로 서서 준비 찬송에 열중이었다. 곧이어 성가대가 들어와 착석했다. 작은 면 단위 교회에 활기가 넘쳐 보였다. 3000여 가구, 6300여명의 면민이 산다. 그 인구 가운데 총인원 500여명이 이날 예배당 안에 있었다.
그 법성교회 시작은 이러하다. 구한말 일제의 야욕이 노골화되면서 일본 상인자본이 이 옛 고을에까지 미친다. 조선 땅 가운데서도 상행위가 활발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일본 상인들은 곡물과 어류 등을 거래해 자본을 축적한 후 상업자본을 만들어 이 일대 간척에 나섰다. 법성포 평지는 대부분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 조성됐다.
이때 독실한 크리스천인 '에미상'이란 여인이 가족과 함께 이곳까지 들어왔다. 법성교회 요람은 '당시 법성면 법성리 642번지 에미상 집에서 8세 아동 3명이 모여 첫 예배를 드렸다'는 구전된 내용을 담고 있다. 642번지는 포구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지점으로 일본인 고급 가옥이 많았다.
이 구술은 3대째 신앙을 이어온 송덕천 원로장로가(家)에서 비롯됐다. 반면 첫 문서기록은 1918년이 시작이다.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1928년 간행)에 따르면 '1918년 9월에 배유지 선교사가 미국 남장로교 선교회에서 75만원을 후원 받아 20여평의 초가 ㄱ자 예배당을 4개월에 걸쳐 짓고 그해 12월 중순 100여명의 성도가 모여 예배를 드리다'라고 기술됐다.
그리고 1940년 1월 17일자 조선총독부 관보는 '조선 야소교 법성포교회가 진내리 201번지에 소재'를 못 박고 있다. 진성 동헌 터 아래 초가 예배당에서 예배와 야학이 겸해졌다는 것을 각종 사료를 통해 알 수 있다. 어쨌든 용왕제 등 민간신앙과 함께 우상이 강했던 이 지역에 복음이 어렵게 정착했음을 알 수 있다.
대창에 찔려 순교한 김종인 목사 부녀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으로 법성포가 인민군 수중에 떨어지기 열흘 전쯤인 9월 초순. 예언의 종소리가 울렸다.
이 교회 1대 장기탁 장로(2008년 작고) 등의 목격으로 작성된 교회사.
'9월 첫 주부터 예배당 종탑이 연 4일간 동네 전체에 주야로 울렸다. 너무 신기해 종탑 밑에 등을 대자 온몸에 그 진동이 전달돼 가슴이 출렁일 정도였다. 중국으로 배를 타고 가던 상인이 길조라고 했다. 이 일이 있은 후 인민군이 내려온다며 사람들이 피난을 떠났다.'
9월 15일 인민군이 성읍 마을에 총을 쏘며 진입했다. 그리고 참화가 이어졌다. 기독교인 명단을 찾아낸 그들은 면사무소 창고에 당회장 김종인 목사를 가두었다가 대사고개라는 곳으로 끌고 가 양잿물을 삼키도록 했다. 김 목사가 양잿물을 삼키지 않고 입에 머금고 있자 칼로 목을 쳐 사망케 했다. 이 소식에 큰딸 김순화는 '공산당 물러가라'고 외치며 다녔다. 그는 인근 신덕동 저수지로 끌려가 발가벗겨진 채 대창에 온 몸이 찔려 죽었다.
장 장로도 집으로 들이닥친 인민군 손에 죽음 직전에 직면했다. 그는 간신히 탈출했으나 부인 송옥수 집사가 잡혔다. 송 집사는 박옥남 집사, 김진복 청년교인 등과 함께 전깃줄에 손이 묶인 채 끌려가 엄목산 밑 해수 둠벙 앞에서 대창에 찔린 후 둠벙에 버려졌다. 이때 전국 순회 복음전도인이었던 이광년 전도인도 희생됐다.
영광은 야월교회순교기념탑 등이 상징하듯 순교의 고장이다. 야월교회, 염산교회, 법성교회 등에서 수많은 보혈의 피를 흘려야 했다.
그러한 역경을 이겨낸 법성교회는 종소리 예언과 순교 등의 영향으로 교인 수가 급격히 늘었다. 한국대학생선교회(CCC) 설립자 고 김준곤 목사가 당회장으로 있던 무렵이다. 그리고 53년 지금 교회당 뒤 포구 쪽에 새 예배당을 매입, 구령 열기를 높여 나갔다. 그 예배당은 파시 등으로 흥청대던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고급 요정 해월루였다. 이어 78년에는 지금의 자리로 옮겼고, 이 자리에 2006년 현대식 석조 예배당을 봉헌했다.
법성교회는 영광원자력발전소 사택 주거인구 등으로 2004년 최정점을 찍다가 법성∼광주 간 고속화도로가 생기면서 인구가 유출, 교인 수 역시 줄었다. 그럼에도 90여개 영광군내 교회 중 두 번째로 교인 수가 많다. 현재 이 교회에는 이낙연 전남지사의 어머니가 출석한다. 법성면 출신인 이 지사는 어머니와 함께 가끔 예배를 보곤 한다.
우상이 유난한 지역… 선한 영향력 주문
이날 이병화(42) 목사는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말씀 선포를 통해 정체기를 넘어 쇠퇴기에 접어든 한국교회를 염려했다. "교회는 목사가, 장로가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주의 종의 자세로 천국과 땅을 연결해 교회 공동체를 연결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세상 가운데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교인이 될 것을 주문했다. 이 목사는 10년 전 이 교회 전도사를 거친 후 지난해 청빙됐다.
법성은 우상이 유난한 지역이다. 전래종교와 신흥종교의 성지 영향력이 강한 곳이기도 하다. 여기에 과학기술의 우상이라고 할 수 있는 원전이 갖는 미묘함이 배어 있다. 굴비는 특산이나 맘모니즘이라는 양면성이 있다.
이 혼돈한 곳에 표어 '영혼 구원하여 제자 삼는 교회'(마 28:18∼20)를 내세운 법성교회가 우뚝하다.
'영적 방풍림' 법성교회 장로 "40여일 금식기도 … 왠지 부끄럽습니다"
'성읍 장자교회'는 지혜자 장로들이 거센 세상 해풍을 막으며 느티나무 방풍림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을 만나 믿음생활을 얘기했다. 그들의 '한 마디'씩을 담았다. 한편 이 자리에 이선학 강성권 최사휴 장로는 시무관계로 함께하지 못했다. 송덕천(72) 원로장로 "3대째 법성교회를 섬긴다. 김준곤 목사님이 시무하시던 1953년 무렵 김 목사님 사택은 훗날 우리 집이 되었다. 돌아가시기 전 이곳을 찾으셔서 그 사택으로 안내했던 기억이 난다." 김영삼(69) 원로장로 "('40여일 금식기도 등으로 빈틈없는 신앙생활을 한다'는 장로들의 상찬이 있은 후 조용히 다가와서) 기자님 금식기도 얘기 쓰지 마세요. 부끄럽습니다." 나병섭(80) 은퇴장로 "초등학교 때 담임이 교회 가자고 해서 다니기 시작했다. 그 일이 내 삶을 바꿨다. 감사할 일이다." 한문섭(58) 시무장로 "송덕천 장로님이 나를 전도하셨다. 아버지 같은 영향을 끼친 분이다. 교회를 섬기고 전도해야 하는 이유다." 송동필(64) 시무장로 "송 장로님이 형님이시다. 어릴 때부터 항상 예수 안에서 살았다. 흔들린 적도 있으나 결혼 후에 더 열심히 하나님을 섬겼다."
법성포(영광)=전정희 선임기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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