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아버지 찾기, 집착은 하지 않으렵니다"

2014. 9. 21.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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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성수 기자]

입양 전 상호운씨

ⓒ 상호운

1988년 5월 5일 아침 6시 16분 서울 영등포 기독병원에서 한 아기가 태어났다. 아기는 태어날 때 손목과 발목이 약간 휘어져 있었다.당시 친모 나이는 23세로 추정되었고 양수 파열로 아기를 조산해 제왕절개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친모는 제왕절개수술 도중 위독해져서 바로 큰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생명의 끈을 놓아야 했다.

병원에서 아내의 며느리의 죽음을 목격한 친부와 친할아버지는 갓 태어난 아들이자 손자인 아기에 대한 친권을 포기했다. 그리고 아무런 신상정보도 남기지 않은 채 병원을 떠났다.

그 후 이 땅에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이 아기에게 한 사회복지사가 '상호운'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리고 생후 7개월 만인 지난 1988년 12월 8일 한 추운 겨울날, 상호운씨는 캐나다로 해외입양 보내졌다.

상호운씨 양아버지는 캐나다의 한 학교버스 제조회사에서 엔지니어로 근무했고 양어머니는 간호조무사였다. 이들 양부모손에 외아들로 자란 그는 초등학교 다닐 때 부모로부터 입양 사실을 전해 들었고, 동네 백인학교에 다니면서 자신이 다른 백인아이들과는 다른 해외입양인임을 깨달았다.

그도 다른 해외입양인들과 마찬가지로 어김없이 사춘기 때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이 있었다. 정체성 혼란과 함께 상호운씨는 백인아이들만 있는 학교에서 심한 소외감을 느꼈다. 방과 후 집에 돌아와서도 그는 양부모에게 자신의 외로움을 함께 나눌 수 없어서 그의 소외감은 더욱 깊어졌다. "양부모님은 아주 친절한 분들이었지만, 백인아이들만 있는 학교에서 유일한 유색인종 학생인 제가 느끼는 소외감을 이해하시기가 어려우셨던 같습니다"라고 상호운씨는 당시의 심정을 전했다.

하지만 음악과 밴드 연주활동을 하며 그는 자신의 정체성 혼란과 소외감을 극복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면서 새로 동네로 이사 온 아시아 학생들을 만나면서 그의 삶도 활기를 찾게 됐고 모국인 한국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캐나다 브리티시 콜롬비아에 있는 빅토리아 음대에서 진학하게 된 상호운씨는 클래식 기타를 전공했다. 그리고 그 후 수시로 클래식 기타를 포함한 다양한 음악공연을 했다. 그는 지금도 클래식 기타, 전기 기타, 드럼, 베이스 등 몇 개의 악기를 다루고 연주할 줄 안다

한편, 생후 7개월 만에 캐나다로 입양 보내진 후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모국을 알기 위해 그는 캐나다에서 한국어를 배웠고 한인교회를 나가는 등 모국과 친숙해지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단순히 한국어를 배우고 한인교회를 나가는 것만으로 상호운씨는 모국과 친부를 보고 싶은 뜨거운 갈증을 해소할 수 없었다.

친부 찾기 위해 전공 접고 한국에 정착

상호운씨

ⓒ 상호운

그래서 마침내 지난 2008년 12월, 해외입양 보내진 지 20년 만에 처음으로 그는 친부를 찾기 위해 1주일간 한국을 방문했다. 하지만 짧은 시간 탓인지 그는 도저히 친부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 후 캐나다로 돌아갔지만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친부를 찾고 싶어 상호운씨는 일도 잘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클래식 기타 등 다양한 음악공연 등을 하여 다시 돈을 모은 후 지난 2010년 5월부터 8월까지 약 3개월간 한국을 두 번째로 방문하여 친부 찾기를 시도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친부에 대한 아무런 기록을 찾을 수 없었다. 그 후 캐나다로 다시 돌아 간 상호운씨는 지난 2012년 2월 "좀 더 장기적으로 친부를 찾기 위해" 다시 3번째로 한국을 찾았다. 그 후 상호운씨는 지금까지 대구에서 살면서 친부와 친할아버지를 찾고 있다.

상호운씨는 대학에서 클레식기타를 전공했고 그동안 캐나다에서 음악연주 공연도 수백 번 했다. 하지만 지난 2012년 이래 본격적으로 친부를 찾기 위해 음악을 접고 대구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생활하고 있다.

그는 지금 2년째 대구에서 생활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한국 문화와 삶이 여전히 낯설다. 한국과 캐나다 두 사회와 문화에 다 무난하게 적응하고 정착하고 싶지만 아직은 그의 바람만큼 그의 삶이 수월하지 않다.

친부를 향해 상호운씨는 "어머니가 저를 낳다가 세상을 떠나셨기 때문에 아버지도 입양을 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여간 이제는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는 '왜 나를 버렸느냐'고 아버지를 원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 뿌리를 알고 싶어서 아버님을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회가 된다면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꼭 만나고 싶습니다"라며 자신의 심정을 전했다.

친부를 찾고 있는 해외입양인 입장에서 한국인들과 한국정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상호운씨에게 물었다.

"해외입양은 중지되어야 합니다. 한국은 최소한 친부모들이 친자녀들에게 모국의 문화를 직접 알려 줄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한국사회가 아직도 미혼모, 한부모가정, 혼혈아, 입양인들에게 편견을 갖고 차별하는 것은 너무도 부끄러운 일입니다. 또 한국공영방송에서 가족 찾기 프로그램이 더 활성화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친권을 포기하는 부모들에 대한 신상정보는 정부가 보관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 아이가 성인이 되어 친부모를 찾고자 할 때 최소한 의료기록은 제공해 주어야 합니다. 입양인들이 친부모를 찾을 수 있도록 한국정부는 더욱 적극적인 노력을 펼쳐야 합니다. 또 해외입양인들이 자신의 뿌리인 한국어와 문화를 공부할 수 있도록 한국정부의 지원을 바랍니다."

상호운씨는 특별히 한국친구들이 가족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자신도 한국가족이 더 궁금하고, 더 보고 싶고, 더 그립다고 한다. 인터뷰를 끝내기 전 그가 남긴 마지막 한 마디가 지금도 내 귀에 쟁쟁하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가족 찾기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집착은 안하려고 노력합니다. 집착했다가 아버지를 못 찾으면 제 삶이 너무 비참해지니까요."

덧붙이는 글 |

* 상호운씨를 알아보시는 분은 '뿌리의집'으로 연락 바랍니다. (02-3210-2451)스마트하게 오마이뉴스를 이용하는 방법!☞ 오마이뉴스 공식 SNS [ 페이스북] [ 트위터]☞ 오마이뉴스 모바일 앱 [ 아이폰] [ 안드로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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