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관 중 유일한 국제법 전문가", "법의 정의를 지킨 열렬한 사명감과 고도의 문명사적 식견."
일본 전범을 합사한 일본 도쿄 야스쿠니(靖國) 신사에 있는 인도인 라다비노드 팔 판사 헌정비에 새겨진 찬사이다. 극우세력은 침략전쟁을 단죄한 도쿄 전범재판에서 전범들의 무죄를 주장한 팔 판사를 "평화를 추구한 간디주의자", "양심을 지킨 국제 법률 전문가"로 추켜세우고 있다. 그를 기리는 비석이 일본 곳곳에 만들어졌고 일부 교과서에도 수록돼 있다.
하지만 인도 근현대사 전문가로, 팔 판사를 연구한 나카자토 나리아키(中里成章) 도쿄대 명예교수는 극우세력이 침략전쟁을 정당화하고 전범을 부정하기 위해 만든 '조작된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그는 인도에서 팔 판사 유족을 만나고 현지 자료를 조사해 팔 판사의 실상을 폭로한 '팔 판사, 인도 내셔널리즘과 도쿄재판'이라는 책도 냈다.
-팔 판사가 정말 국제법 전문가이며 열렬한 간디주의자인가.
"주로 세법 전문 변호사로 활동했고 박사학위 논문은 인도 고대(古代) 법철학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도쿄 전범재판에 참여하면서 국제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전범재판 후에야 국제법 관련 서적을 냈다. 일부에서는 팔 판사가 평화주의자이자 열렬한 간디주의자라고도 주장한다. 하지만 내가 만난 그의 아들조차 '그렇지 않다'고 했다."
-팔 판사가 어떻게 전범재판관이 됐나.
"연합국이 재판관 추천을 의뢰하자, 인도 당국이 다른 판사 2명에게 요청했다. 하지만 건강 등 개인적 사정으로 거절, 세 번째 후보였던 팔 판사가 선정됐다. 자격에도 문제가 있었다. 인도 당국의 추천기준은 고등법원 현직판사 혹은 은퇴 재판관이었다. 그는 고등법원의 임시판사(판사대행)를 2년 정도 맡았을 뿐이다. 재판관으로 담당한 재판의 90%가 민사사건이었다. 당시 인도 당국의 문서에도 자격 논란이 기록돼 있다. 일종의 행정 착오였지만, 책임자들이 재선임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이유로 확정했다."
-팔 판사가 무죄를 주장한 이유는 뭔가.
"법률적 신념도 있었겠지만, 기본적으로 백인에 맞서 아시아가 단결해야 한다는 일본 파시즘의 '대동아공영권'에 공감한 것 같다. 팔 판사는 자신의 고향에서 인기가 높았던 찬드라 보세를 지지했다. 찬드라 보세는 독일·일본과 손잡고 영국과 싸워 인도를 독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A급 전범인 도조 히데키가 찬드라 보세를 지원했다. 팔 판사는 미국과 유럽의 식민지 지배에 대해서는 강하게 비판했지만, 일본의 식민지 침략에 대해서는 눈을 감았다."
-누가 그를 신화적 인물로 만들었나.
"도쿄 전범재판을 부정하는 세력이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팔 판사를 이용했다. A급 전범용의자로 복역했던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총리가 1966년 팔 판사의 일본 초청을 주도했다. 덴노(天皇·일왕)로부터 훈장을 받도록 주선도 했다. 당시 총리가 기시 전 총리의 동생이었다.기시의 손자인 아베 총리도 2007년 인도에서 팔 판사 유족을 만나 '일본인들은 팔 판사를 존경한다'고 했다."
[라다비노드 팔 판사는] 日서 최고 훈장 수여… 매년 추도 행사도
도쿄 전범재판 당시 일본 전범 전원의 무죄를 주장했던 인도 출신 재판관. 1966년 일본 최고 훈장을 받았다. 변호사로 활동하다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캘커타대학 교수와 부총장을 역임했다. 전범재판의 경험을 살려 UN 국제법 위원장으로도 활동했다. 1967년 사망했으며, 일본에서는 매년 추도 행사가 열린다. 저서로는 '베다 시대의 힌두교 법철학', '인도 장자상속법'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