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기 빠졌다" 주먹질 "싸가지 없다" 발길질.. 인권 외딴섬

안아람 2014. 8. 4.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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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혹행위 일상화한 軍

헌병대에 고발 소용 없어 "잘못 진술 땐 무고죄" 윽박

"軍은 별개 사회… 폭행해도 된다" 잘못된 인식 뿌리 깊게 박혀

KBS가 4일 육군 28사단 윤 일병 사망사건과 관련한 현장검증 사진을 입수해 공개했다. KBS 화면 촬영

2012년 7월 입대한 임모(21)씨는 같은 해 10월 육군 6사단 의무중대로 배치 받은 후 지옥 같은 날들을 견뎌야 했다. 선임 병사들은 임씨가 업무를 제대로 못한다고 머리박기, 엎드려뻗쳐를 시키고, 이마에 딱밤을 때리는 등 폭언과 폭행을 일삼았다. 다리 털을 뭉쳐서 한꺼번에 뽑기도 했고 귀를 깨물기도 했다. 베개로 성기를 때리는 등의 성추행을 하기도 했다. 부대에는 병사들의 고충을 소원 수리하는 '마음의 편지'가 시행되지 않아 신고할 방법도 없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얻는 등 심신이 피폐해진 임씨가 헌병대에 선임들의 가혹행위를 고발하려고 하자 수사관은 "잘못 진술하면 무고죄로 처벌받을 수 있다" "거짓말 탐지기를 사용할 수 있다"고 윽박질렀다. 결국 임씨는 제대 후 지난해 8월에야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해 권리 구제를 기다리고 있다.

육군 28사단 윤모(23) 일병 사망 사건을 계기로 군대 깊숙이 숨어 있던 구타 및 가혹행위, 성희롱 등 인권침해의 고질적 병폐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군기를 잡기 위해서는 폭력을 쓰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그릇된 인식과 이를 당연시하고 변화하지 않는 군 고위층의 무사안일이 윤 일병 사망 사건 같은 참극을 불러일으킨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2012년 육군 1사단 포병대대를 제대한 A(25)씨는 이등병 시절 선임 병사로부터 "넌 싸가지가 없다"는 말과 함께 주먹으로 갈비뼈를 맞았다. 하지만 치료를 받으러 간 군 병원의 흉부외과 군의관은 A씨가 어디가 아픈지 확인하기는커녕 꾀병을 단정짓고는 오히려 "넌 태도가 왜 그러냐"며 면박을 줬다. 별다른 치료를 받지 못한 A씨는 휴가 때 방문한 민간 병원에서 갈비뼈에 금이 간 흔적이 남아 있다는 판정을 받았다. A씨는 "뭐 군대에 있다 보면 한 대 맞을 수도 있고….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게 군대인가 봐요"라며 말끝을 흐렸다.

새정치민주연합 김광진 의원이 4일 오전 국회 원내대표실에서 열린 국방부 현안보고에서 육군 28사단 윤모 일병 폭행 사망 사건과 관련해 한민구 국방부 장관에게 질의하고 있다. 오대근기자 inliner@hk.co.kr

지난해 9월 육군 27사단에서 군 복무를 마친 B(25)씨에게 선임 병사들이 이유 없이 뒤통수를 때리는 건 일상이었다. 시킨 일을 잘못 하거나 같은 실수를 반복하면 선임 병사들은 그를 으슥한 곳으로 끌고 가거나 다른 병사에게 망을 보게 한 후 생활관 내 관물함에 밀어 넣고 폭행했다. B씨의 동료는 선임 병사가 담뱃불로 지져서 화상을 입기도 했다.

2012년 한 육군 부대에서는 잠꼬대를 하거나 이를 가는 후임병에게 방독면을 씌웠고, 1.5ℓ짜리 생수를 목구멍에 들이 붓거나 초코파이 또는 건빵처럼 목이 메이는 빵ㆍ과자류를 토할 때까지 먹게 하는 일도 있었다고 최근 전역한 한 병사는 증언했다. 그에게 샤워를 마치고 나온 후임 병사에게 샴푸를 통째로 부어 다시 씻게 만든 건 사소한 장난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성희롱 등 성폭력을 가하는 인권침해적인 사례들도 많았다. 2007년부터 1년 여간 강원도 전방부대 전초(GOP)에서 근무한 박모(29)씨는 선임 병장이 막 입대한 이등병 두 명을 한 침낭에 들어가게 한 후 키스하게 하고, 서로의 성기를 만지게 한 사실을 목격했다. 수치심을 느낀 이등병이 샤워실에서 군화 끈으로 목을 맸다가 살아나자 부대 간부는 적반하장식으로 "죽을 거면 나가서 죽지, 왜 여기서 죽으려 해서 우리에게 피해를 주느냐"고 역정을 냈다고 박씨는 증언했다.

훈련을 가장한 가혹행위도 일상적이다. 의장대에서 복무를 마친 C(23)씨는 팔굽혀펴기 100회는 가혹행위라고 여겨본 적도 없다. 선임 병사들이 "의장대는 팔 힘이 중요하다"며 100회 후 잠시 일으켜 세웠다 다시 100회를 반복시키는 등 300회까지 한 적도 많다. 이처럼 훈련을 가장한 은밀하고 교묘한 가혹행위는 적발하기도 쉽지 않다.

병사들이 이런 악폐를 묵인하고 넘어가는 건 군대에는 위계질서가 확립돼야 한다는 잘못된 군대문화가 뿌리깊게 박혀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제대한 이모(24)씨는 "군대는 별개의 사회니까 '이런 걸 해도 되는구나'하는 분위기가 있고, 가혹 행위를 안 하면 위계질서가 사라진다고 스스로도 생각하니까 문제를 묵인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다른 제대 군인 박모(23)씨는 "개인의 개성과 행복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시대는 변했는데 군대에서는 여전히 폭력 같은 방법으로 훈련 외의 사생활까지 통제하려 하니 총기 난사 사건이나 이번 윤 일병 사건 같은 일들이 벌어지는 것 같다"고 씁쓸해 했다.

안아람기자 onesho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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