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위 칸의 '지혜'에는 손이 닿질 않네

임지영 기자 2014. 7. 30.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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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러 나온 아이들은 그 자체로 즐거웠다. 한 중년 남성은 감탄사를 뱉으며 휴대전화로 서가 사진을 찍었다. '찰칵' 소리가 나는 곳마다 '그림'이 됐다. 8m 높이 서가에 꽂혀 있는 책 20만 권은 풍경만으로 볼거리다. 7월16일 오전, 경기도 파주출판도시에 위치한 '지혜의 숲'을 찾았다. 사람들이 곳곳에서 담소를 나누거나 책을 읽고 있었다. 개관 한 달째, 번듯한 새 책장이 햇살 아래 반짝였다.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쳐 있는 거미줄은 비현실적이었다.

6월19일 파주 출판단지에 개관한 지혜의 숲은 '열린 도서관'을 표방한다. 종이책의 보호·보존·활용을 위해 지었다는 이곳은 일반 도서관과 달리 사서가 없고, 도서 검색 시스템이 없다. 출판사와 기증자별로 나뉘어 있을 뿐 무작위로 꽂혀 있다. 일부 구역은 24시간 개방하고 대출은 안 된다. 8600㎡(약 2600평) 규모에 서가 높이는 8m. 출판사·개인·단체로부터 기증받은 책 20만 권으로 꾸려졌다. 서울 마포구 도서관(마포평생학습관)의 보유량과 맞먹는다. 이미 50만 권을 확보했고 100만 권을 목표로 한다.

ⓒ시사IN 신선영 파주 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에 위치한 '지혜의 숲'. 8m 높이 서가에는 책 20만 권이 꽂혀 있다.

그런데 이 방대한 공간을 두고 평가가 엇갈린다. '진짜 도서관' '새로운 실험'이라는 언론의 찬사가 있는 한편, 최대 규모의 북카페라거나 책무덤에 불과하다는 출판계 안팎의 비판도 만만치 않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지혜의 숲을 '종이 무덤'이라고 부른다. 손에 닿지도 않는 높이의 서고를 만들어 책을 북카페의 장식물처럼 활용했으니 도서관이 아니라 무덤이라는 의미다. 실제 8m 높이, 16칸으로 이루어진 책장에서 사람 손이 닿는 건 5~6칸까지다. 나머지 책을 보려면 담당자에게 요청해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야 한다. 어차피 높은 곳의 책은 복권(중복된 책)이 대부분이라 아래 있는 책을 보는 걸로 충분하다는 게 운영을 담당하는 출판도시문화재단 측의 설명이다. 일부 출판 관계자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한 출판 평론가는 "책이 인테리어에 불과하다고 인정하는 게 아닌가. 박제된 지식일 뿐 살아 있는 영향력을 줄 수 있는 방식이 아니라 안타깝다"라고 말했다.

일반 도서관과 구별되는 또 다른 특징은 '권독사' 시스템이다. 사서 대신 책을 권하고 보호하는 자원봉사자다. 누구나 간단한 교육을 받으면 권독사가 될 수 있고 현재 50여 명이 활동 중이다. 재단 측은 교통비·식비 명목으로 4시간 기준 1만원을 지원한다. 방문한 날은 권독사가 3명 있었다. 이들을 제외하고 도서관 운영에 배정된 인력은 3명이다. 비용을 적게 들이고 운영하는 방식이다. 비슷한 규모의 마포구 도서관에는 사서가 20명이다.

'지혜의 숲'은 세 공간으로 나뉘어 있다. 1섹터는 국내 학자 22명과 단체 4곳이 기증한 도서가 소장된 공간이고, 2·3섹터는 출판사와 유통사 37군데의 기증 도서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1섹터는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한 학자들의 서적을 볼 수 있는 곳으로, 권독사의 안내를 받아야 열람이 가능하다. 이곳 역시 어떤 책이 소장되어 있는지 그 목록을 알기는 어렵다. 1섹터를 둘러본 한기호 소장은 내용 면에서의 부실함을 지적한다. "가령 영문학자 서지의 경우 그의 영문학적 이력을 보여주거나 연구의 진수를 보여줄 만한 책들로 구성되어야 하는데 전문성이 별로 드러나지 않는다." 2·3섹터에 기증한 출판사 및 유통사도, 파주 출판단지에만 출판사가 300여 개인 데 비하면 적은 숫자라고 지적한다. 그는 "개인이 하는 거라면 상관없지만 국가 예산이 들었다. 책 구입비를 지원하는 것도 아닌 바에야, 근본적인 인프라를 만드는 게 먼저 아닌가. 파주에서 일하는 편집자들의 출퇴근 문제도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지원된 7억원 중 5억원이 서가 설치 비용

'지혜의 숲'을 만드는 데 문화체육관광부 예산 7억원이 배정됐다. 상반기에 5억1000만원을 지원했고 하반기에 나머지를 투입할 예정이다. 비영리 민간단체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는 최근 문화체육관광부에 '지혜의 숲 조성 사업과 관련된 계획서 일체'를 요구했다. 단체가 입수한 '열린 도서관 조성계획'에 따르면 7억원의 국고 중 서가 제작 및 설치에 5억원, 도서 입력 및 전산화에 9000만원, 홍보 및 관리비에 1억1000만원이 배정되어 있다. 주로 서가 설치 비용이다.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의 조민지 간사는 "사업 목적에 책의 보호·보존이라고 되어 있는데 기본적인 항온·항습시설 설치 예산이 없다. 20만 권이나 되는 책을 분류조차 해놓지 않고 시민에게 공개했다는 점도 이용자 편의성을 무시한 처사다. 가장 큰 문제는 설립 후 중장기 계획이 없다는 점이다. 기존의 북카페, 작은 도서관도 지자체가 건립만 해놓고 추후에 관리가 안 되어 제 기능을 못하는 사례가 많다"라고 말했다.

ⓒ시사IN 신선영 '지혜의 숲'에는 사서가 없고, 도서 검색 시스템이 없다. 일부 구역은 24시간 개방되기도 한다.

서울 서교동의 한 출판사 대표는 이 문제에 관심이 없었다가 예산이 7억원이라는 이야기를 뒤늦게 듣고 놀랐다. "엄밀히 말하면 출판계 전체에 들어올 돈이 파주 출판단지로 간 거다. 출판사로서는 300만원짜리 출판지원금 하나 받으려고 아등바등하는데 큰돈이 그렇게 쓰이니 씁쓸하다." 또 다른 출판 관계자는 "종이책을 독자에게 보여주고 싶은 욕구는 이해하지만 흥행을 위해 정말 '보여주는 데'에만 치중해 아쉽다"라고 말했다.

논란이 일자 재단 측은 처음 강조했던 '열린 도서관'에서 도서관이라는 이름을 지우고 있다. 도서관이라기보다 문화 공간으로 봐달라는 것. 한길사 대표이기도 한 김언호 출판도시문화재단 이사장은 예전부터 호텔·전시관·도서관을 결합한 형태의 공간을 구상해왔다. 지혜의 숲이 들어선 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 건물도 2층부터 5층까지는 텔레비전 대신 책을 갖춘 '지지향(紙之鄕)'이라는 게스트하우스다. '지혜의 숲'은 카페와 전시 공간, 이벤트 홀 같은 공간을 포함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관계자 역시 "도서관을 짓는다고 해서 예산을 들인 게 아니다. 파주에 있는 출판·유통업체에서 나오는 도서의 재활용에 목적이 있다. 계획보다 앞당겨 개관해서 시행착오를 겪는 중이다"라고 말했다. 하반기 예산은 지적받았던 책의 데이터베이스화 작업에 쓰일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논란과 무관하게 '지혜의 숲' 이용자들의 표정은 밝았다. 푹신하고 넓은 소파, 엄숙하지 않은 분위기는 처음의 포부대로 '열려 있는' 분위기였다. 정미경 인천도서관협회 독서진흥팀장은 "부정적인 선입견을 갖고 왔는데 긍정적인 기능도 있더라. 도서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동기 부여하는 게 도서관이라면 제 몫을 충분히 한다. 출판도시에 상징적인 공간이 있는 것도 좋다. 다만 책 검색이 안 된다든지 권독사의 역할이 불분명한 건 아쉽다. 예산이 투입되었다면 바람직한 방향으로 개선되어야 할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이제 개관한 지 한 달, '지혜의 숲'은 조만간 도난 방지 시스템을 마련할 예정이다.

임지영 기자 /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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