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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인간조건 위한 빈곤퇴치에 국경 있나요"

입력 : 
2014-07-29 17:04:03
수정 : 
2014-07-29 17:3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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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빈민촌에 여성직업센터 건립 이순주 서울국제친선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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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길 왜 가려고 하시죠? 더럽고 위험한 데다 태풍에 파도가 넘치면 '유령 마을'이 따로 없어요." 택시 기사조차 꺼리는 필리핀 나보타스 시(市) 피시 항구의 한 빈민촌. 모처럼 쨍쨍 빛나는 햇빛이 이곳 사람들의 눅눅한 몸과 마음을 말려주던 지난 10일 오후, 문을 연 여성직업훈련센터에 몰려든 사람들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스물다섯 살부터 마흔 살까지 나이는 제각각이지만 '직업'을 얻겠다는 희망에 설레는 동네 여자들이 미용기술을 배우겠다고 모여들었다. "아무 미래도 없이 단지 살기 위해 살아가는 여성들의 무기력한 표정이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예산 지원을 받고 현지에서 건설업자들과 직접 담판 지어 센터를 지어낸 이순주 서울국제친선협회(SIFO) 회장(54)의 말이다. 센터에선 나보타스시 빈민 여성들을 위해 이ㆍ미용 기술과 컴퓨터 다루는 법을 가르친다.

"학생들이 인근 관광지의 스파나 회사의 콜서비스센터에 취업할 수 있도록 준비할 겁니다." 강의실과 실습실, 창고 등이 있는 162평의 건물은 나보타스 시에서 제일 큰 직업훈련센터보다 한층 현대적이다.

마을은 마닐라 만 북쪽 항구로 통하는 길 중 아래쪽에 있다고 해서 'NBBS(The North Bay Boulevard South)'라는 어엿한 이름이 있지만 보통 '해상판자촌'으로 부른다. 6~8명의 식구들이 강가나 수면 위에 판자를 이어 만든 3평 남짓한 집에 모여 산다. 한 줌의 쌀, 오염되지 않은 한 바가지의 물만큼이나 소중한 말은 '직장'이다. 도시에서 밀려난 이곳 사람들은 세계은행이 정한 절대빈곤 기준인 하루 1.25달러도 벌지 못한다. 남자들은 임시직 짐꾼이나 어부로 나서지만 여자들은 바닷가에 떠다니는 쓰레기 속에서 고철 조각을 주워 파는 것 외에는 일거리가 없다.

한나절 일한 여성이 버는 돈은 하루에 50페소 정도. 가족의 한 끼를 위해 식빵 300g을 사고 나면 끝이다. 공식 집계된 거주민 27만여 명 중 절반이 세금을 낼 수 없는 처지다 보니 시의 재정으로 가난 구제는 엄두도 못 낸다.

"우리나라에도 저소득층이 넘쳐나는데 왜 외국을 돕느냐" "해외봉사도 결국 스펙 쌓기일 뿐이다"라는 삐딱한 시선도 있다. 외교관 자녀로 성장해 통역 전문가의 길을 걸으며 이화여대 강의와 국회 통역을 맡아온 이순주 회장 역시 동남아의 빈곤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는 삶을 살아 왔다. 그러나 그는 "가난과 실업은 국경을 넘은 인간 조건의 문제입니다. 매년 태풍의 비바람에 집과 사람들이 휩쓸려 가는 이곳에서 절대 빈곤을 이겨내고 희망을 찾기 위해 고민하고 더 나은 삶의 조건을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야말로 가치 있는 일이죠"라고 소신을 피력했다.

센터에 전기료와 수도료를 지원하기로 한 존 레이 나보타스 시장은 이날 개소식에서 직접 통역으로 나서 "센터를 지어준 SIFO와 KOICA, 이ㆍ미용기술 강사와 물품을 지원한 동성제약, 건립 추가 비용을 댄 제인투어&DMC와 한미글로벌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가난에 시달리며 아픈 부모 대신 동생들을 키우기 위해 다니던 대학을 중퇴해야 했던 아이위 씨(28)는 센터 운영을 짊어질 기둥이다. 동성제약 후원으로 한국에서 약 한 달 동안 두피케어 교육을 받은 후 현지로 파견 온 강사들에게 집중 과외까지 받은 그는 열댓 명의 1기 학생들에게 머리 염색과 두피 마사지를 가르친다.

"저에게는 일할 곳이 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이에요. 지금은 다이아몬드처럼 눈이 빛나는 학생들을 어떻게 하면 저보다 더 뛰어난 두피마사지사가 되도록 하느냐가 숙제가 됐어요." 집은 안 막히면 30~40분 거리여도 필리핀 특유의 교통난 때문에 출근만 2시간이 걸리지만 아이위 씨는 센터에 오는 것이 뿌듯하다며 밝게 웃었다.

[나보타스 = 김인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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