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직장인이 인터넷을 통해 내려받은 최신 미국 드라마 ‘24시 시즌9’를 보고 있다. 허문찬 기자 sweat@hankyung.com
한 직장인이 인터넷을 통해 내려받은 최신 미국 드라마 ‘24시 시즌9’를 보고 있다. 허문찬 기자 sweat@hankyung.com
지난달 29일 서울 서부경찰서는 해외 드라마·영화의 자막을 제작해 불법 유통한 15명을 저작권법 위반 혐의로 입건했다. 고소인은 워너브러더스, 유니버설스튜디오 등 미국 제작사 6곳. 입건된 이들 중에는 회원 수가 20만명에 달하는 국내 최대의 해외드라마 카페 ‘감상의 숲’ 운영자도 포함돼 있었다. 경찰 조사 결과 이들 중 상당수는 단순 취미생활로 자막을 제작한 것으로 나타났다. 경찰 관계자는 “15명 중 자막을 만들어 공급하면서 수입을 얻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말했다. 영리목적으로 자막을 제작하지 않은 만큼 고소인을 대리한 로펌도 당혹스러워하고 있다고 경찰은 설명했다.

해외 영화·드라마에 붙는 자막은 2차 저작물이다. 따라서 저작권자 동의 없이 자막을 만들어 공유하는 것은 불법이다. 저작권법을 위반하면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이른바 ‘자막러’(자막제작자)로 불리는 이들은 왜 수입조차 기대할 수 없는 ‘불법행위’를 저지른 것일까.

방영 직후 24시간 내 자막 영상 돌아

[경찰팀 리포트] 낮에는 직장인…밤에는 '자막러'
지난 5월부터 미국에서 인기리에 방영 중인 드라마 ‘24시 시즌9’. ‘24시’는 테러진압 요원인 주인공 잭 바우어(키퍼 서덜랜드)가 하루 24시간 동안 테러조직과 맞서 위기를 해결해 나가는 내용으로 시즌마다 24편(시즌9는 12편)으로 구성된다.

지난 1일 미국 폭스TV에서 시즌9의 10회분이 끝나자 1~2시간 만에 파일공유(P2P) 사이트 및 프로그램 등에 해당 동영상이 유포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영어자막이 떴고, 24시간이 채 지나기도 전에 한글 자막파일도 속속 올라왔다. 한글 자막을 제작한 자막러는 “(자막 제작이) 늦어서 미안하다”는 글도 남겼다.

파일공유(P2P) 사이트 다운로드를 통해 미국·영국 드라마를 즐겨 본다는 직장인 김지연 씨(28)는 “요즘엔 현지에서 드라마가 방영되면 하루 만에 국내에서 동영상을 다운받을 수 있고, 자막도 거의 동시에 구할 수 있다”고 말했다.

10여년 전 ‘프리즌브레이크’ ‘24시’에서 시작된 ‘미드’(미국 드라마) 열풍이 ‘왕좌의 게임’ ‘하우스 오브 카드’ 등으로 이어지며 국내에서도 이어가고 있다. 누리꾼은 국내 ‘미드 열풍’ 요인의 하나로 자막러들의 신속한 자막파일 제작과 배포를 꼽고 있다.

“돈을 벌려는 게 아니다”

[경찰팀 리포트] 낮에는 직장인…밤에는 '자막러'
그렇다면 ‘미드열풍’의 조력자인 자막러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홍콩에서 각종 프로그램을 한글로 번역하고 감수하는 직업을 갖고 있는 김철영 씨(28)는 10년째 활동 중인 ‘베테랑 자막러’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온라인 상에서 ‘프리즌프레이크’ ‘이지A’ 등의 해외 드라마·영화 자막을 제작해왔다.

김씨가 만들어 블로그와 관련 사이트 등에 공급한 자막만 해도 100편이 넘는다. 그는 “좋아하는 미국 드라마나 영화의 자막을 직접 만들어 보겠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일을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다”며 “돈을 벌기 위한 것도 아니고 단지 개인적인 흥미와 자기만족을 위해 자막을 제작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자막러들은 수익을 목적으로 일하는 경우가 드물다. 10명 중 9명은 취미 활동 또는 어학 공부용으로 자막을 만든다는 설명이다. ‘무보수 노동’의 배경에는 해당 작품에 대한 개인적인 선호가 자리하고 있다. ‘은빛’이란 닉네임으로 영국 드라마 ‘셜록 시즌3’의 자막을 만든 백모씨(23) 역시 “셜록 시리즈를 재밌게 봤고, 이 드라마를 굉장히 좋아한다”며 “셜록 시즌3을 정확하게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한글 자막을 찾기 어려워 직접 만들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낮엔 ‘직장인’, 2~4명이 팀 꾸리기도

자막러들은 낮에는 직장인이나 학생으로 본업을 보면서 밤 시간대나 주말을 활용해 자막을 제작한다. 이들이 취급하는 드라마·영화는 다양하다. 국가별로는 영·미권과 일본, 중국 등의 작품이 대상이다. 영화·드라마뿐만 아니라 애니메이션, 게임, 다큐멘터리 등의 자막도 제작한다.

‘서리’라는 닉네임으로 일본 애니메이션 자막을 만드는 윤모씨(21)는 “낮에는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근무가 끝난 뒤나 휴일에 자막을 만들고 있다”고 했다.

작업량이 많은 시리즈 드라마나 번역이 상대적으로 어려운 작품은 2~4명이 ‘자막팀’을 꾸려 일을 나눠 한다. 보통 1~2명이 번역하면 다른 1명은 감수를, 또 다른 1명은 영상과 자막을 맞추는 일을 담당한다. ‘ND24’와 같이 회원 수만 1만7000여명에 이르는 자막 제공 사이트도 존재한다. 이 사이트 회원들은 프로젝트별로 수시로 팀을 만들어 자막을 만들기도 하지만 대부분 홀로 작업한다. 마음이 맞는 자막러를 구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자막 제작에 걸리는 시간은 60분짜리 동영상을 기준으로 4~6시간 정도다. 내용이 어렵거나 독특한 편집이 필요한 경우 20시간 가까이 소요되기도 한다. 이렇게 제작된 자막은 유명 자막 카페나 사이트, 블로그에 등에 올라간다.

업로더와 웹하드 업체, 수익 3 대 7로 나눠

자막러들이 자막파일을 올리면 실제로 돈을 버는 이는 따로 있다. P2P·웹하드 사이트 등에서 활동하는 파일 업로더들이다. 이들은 해외 드라마·영화를 해외 사이트에서 다운로드받은 뒤, 자막러가 올린 한글 자막파일을 검색해 동영상과 한 개의 파일로 묶는다. 이렇게 완성된 파일을 제휴가격(신작영화 1편 기준 4000원가량)보다 80~90% 이상 저렴하게 판매한다. 3년째 미국 영화·게임 등의 자막을 제작해 온 심요한 씨(28)는 “상당수 자막러들이 재능기부 차원에서 자막을 제공하는 데 이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보면 힘이 빠진다”고 말했다.

연간 1만여건 이상을 업로드하는 ‘헤비 업로더’는 1억원 이상의 수익을 얻기도 한다. 2012년 11월 검찰이 헤비업로더 372명을 대규모로 적발했을 때 이들이 게시한 불법 저작물은 모두 99만5522건. 유통 금액으로 따지면 568억원에 달했다.

헤비업로더들의 ‘활약’에 힘입어 웹하드 업체들도 큰 수익을 얻고 있다. 각종 동영상을 내려받을 수 있는 ‘위디스크’를 운영하는 이지원은 지난해 매출 167억원, 영업이익 40억원을 올렸다. ‘파일노리’ 운영사인 선한아이디도 2012년 기준 매출 111억원, 영업이익 33억원을 기록했다. 업로더와 웹하드 업체들은 통상 3 대 7로 수익을 나누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업로더와 동영상 유통 업체들이 큰 수익을 내더라도 자막러들이 수익을 배분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자막 제작 자체가 저작권 침해인 탓이다. 한 자막러는 “내가 직접 제작한 자막이라고 하더라도 자막 제작과 유포가 불법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고 말했다.

물론 자막 제작으로 직접 수익을 챙기는 자막러도 없지는 않다. 카페 등에 자막파일을 모아 놓고 광고를 링크해 수익을 얻는 방식이다. 사이트·카페의 규모에 따라 다르지만 한 달 30만~40만원 정도의 ‘용돈벌이’ 수준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영화 자막 파일을 올려 번역실력을 과시한 뒤 영화사나 출판사에서 일감을 따내려는 사람도 있다.

‘자막러 포화시대’… 콘텐츠 질은 떨어져

최근 몇 년간 자막러가 급격히 늘면서 부작용도 커지고 있다. 김철영 씨는 “자막은 무료로 얻을 수 있는 파일인데다 제작 과정도 어렵지 않다 보니 자막을 올리는 사람들도 급증했다”며 “그러다 보니 ‘질 낮은 자막’들이 유포되면서 실제 내용과 다른 부정확한 자막이 나오는 등 콘텐츠의 전반적인 질은 악화되는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워너브러더스, 유니버설스튜디오 등의 최근 고소 건도 ‘자막러 포화’에 따른 부작용이라는 지적도 있다. 국내에 저작권이 등록돼 있는 해외 인기작들 위주로 자막파일이 지나치게 많이 유포되면서 해외 제작사들을 자극했다는 것이다.

윤희은/김태호 기자 sou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