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조선] 인도 새 총리 모디를 키운 RSS는 간디 암살범이 속했던 단체

최준석 주간조선 편집장 2014. 5. 29.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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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6일 취임한 인도의 나렌드라 모디 총리를 2007년 5월 서울에서 만나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러고 보니 나는 모디 총리를 인터뷰한 유일한 한국 기자가 아닐까 싶다.

당시 모디는 인도 구자라트주(州)의 주총리(Chief Minister)였다. 구자라트주는 인도 서부에, 아라비아해를 끼고 있는 곳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가장 유명한 인도의 주총리가 한국에 오는 걸 알고, 꼭 만나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는 그때 인도를 대표하는 야당 정치인으로 급성장하고 있었다. 당시 나는 약 2년 전 인도의 뉴델리 특파원으로 일했다. 2002년 구자라트주 폭동 현장을 취재한 적이 있어, 폭동을 방조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는 정치인 모디가 어떤 인물인지 궁금했다. 모디 주총리는 구자라트 폭동 당시 힌두들에 의한 무슬림 집단 학살을 방조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었다. 당시 폭동으로 790명의 무슬림과 254명의 힌두가 사망했다.(온라인 백과사전 위키피디아) 서울을 찾은 모디 구자라트 주총리는 주 대표단을 이끌고 서울 남대문 바로 옆의 대한상공회의소 건물 회의실에서 투자 설명회를 했다.

당시 조선일보에 쓴 기사를 찾아보니 그를 만난 날짜는 5월 16일이었다. 딱 7년 전이다. 투자 설명회 내용은 그리 기사로 쓸 만하지 않았다. 당시 스피치 동영상을 찾아보니 모디는 "인도와 한국은 붓다의 평화와 사랑이라는 메시지를 공유한다" "(마하트마) 간디가 구자라트주 출신이다" 등의 이야기를 했다. 나는 설명회가 끝난 뒤 모디 주총리에게 다가가 한국 최고의 신문사 기자이고, 뉴델리 특파원으로 근무했다고 나를 소개했다. 잠시 인터뷰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내 말을 듣고 좋다고 했다. 투자설명회장 옆의 공간에서 인터뷰를 시작했다. 그의 수행원들 10여명이 옆에 앉아 있었다. 이럴 경우 분위기가 산만해서 인터뷰에 집중하기가 쉽지 않다. 본인도 주변을 의식하고, 기자도 불편하다. 특히 솔직한 이야기를 듣기가 어렵다.

당시 모디 주총리는 내게 한글 명함을 건넸다. 그 명함은 어디로 갔는지 지금 확인할 수 없다. 모디 주총리는 "구자라트와 한국은 닮은점이 많다. 인구(5300만명)도 비슷하고, 오랜 역사를 가졌다"고 했다. 그는 한국에 대해 공부하고 왔다고 했다. 그는 구자라트주에 세계 최대의 선박 해체 시설이 있는 것을 언급하며 "한국은 배를 만드는 데 세계 최고지만, 우리는 배를 부수는 데 세계 최고"라고해 웃음을 자아냈다. 모디는 내게 "구자라트는 인도에서 가장 평화로운 곳이다. 노조의 파업 등 분규도 없다. 한국 기업을 위한 경제특구(SEZ)도 추진하고 있다. 한국 기업들이 구자라트에 투자하기를 권한다"고 말했다.

모디 기사는 조선일보 사람들면에 크지 않게 나왔다. 인도의 주총리가 서울에 온 게 큰 기삿거리가 되지는 않는다. 다만 조선일보 독자에게 그를 주목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어 나는 기사를 썼다. 투자 유치를 하러 열심히 다니는 '일하는 주총리'라는 측면 외에 '파시스트' '도살자'라는 비판을 받는 그의 또 다른 얼굴을 조선일보 독자에게 간단히 말했다. 나는 당시 기사를 시작하며 모디 주총리를 '인도의 논란의 정치인'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그가 "2002년 취임 직후 일어난 '구자라트 폭동'에서 힌두우파를 선동함으로써 1000여명의 무슬림 학살이라는 참극을 불렀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고도 썼다.

당시 기사에 쓰지 않았지만 그와의 10여분간 지속된 인터뷰는 기분 좋지 않게 끝났다. 모디는 2002년 구자라트 폭동 이야기를 꺼내자 불편한 듯 "어~" 하며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인터뷰를 일방적으로 끝냈다. "그만합시다. 다음 일정이 있어서"라는 식의 이해도 구하지 않았다. 일방적 행동이었고, 나는 이 사람은 매우 권위주의적이구나 하는 생각을 더욱 굳히게 됐다.

나렌드라 모디 구자라트주 총리가 5월 26일 인도의 새 총리가 된다. 그를 총리 후보로 내세운 인도국민당(BJP)은 지난 5월 12일 끝난 총선에서 예상을 뛰어넘는 압승을 거둬, 정권을 차지했다. 의원내각제 정부 체제인 인도에서는 총선에서 과반수를 얻는 정당이 정부를 구성한다. BJP는 전체 지역구 543석 중 과반수(272석)가 훨씬 넘는 282석을 차지, 정부를 구성하게 됐다. 인도의 대표적 신문 타임스 오브 인디아는 총선이 끝난 뒤 취재기자 방담을 통해 "이번 선거전은 미국식 대통령 선거와 같았다. 나렌드라 모디 BJP 총리 후보를 지지하느냐 않느냐에 대한 투표였다. 인도에서 이런 식의 총선 투표는 없었다"고 말했다. 인도인은 12억의 나라를 이끌 새 지도자로 모디를 선택했다.

모디 새 총리는 어떤 사람인가? 그에 대한 인도 유권자의 압도적 지지는 구자라트 주총리로 일하면서 보인 경제 발전 성과 때문이다. 버스터미널에서 차를 팔던 어려운 처지에서 구자라트 주총리가 되는 신화를 일궈낸 인물에게, 이제 인도 총리로서 신화를 써달라고 주문하고 있다. 이는 그에 대한 기대 부분이다.

그에 대한 우려는 구자라트 주총리 때 일어난 2002년 구자라트 폭동 당시 모디의 역할과, 그로 대변되는 힌두 민족주의 이념의 과잉분출이 인도에 새로운 분열과 갈등의 시대를 여는 게 아니냐이다. 모디 총리를 오늘날 이 자리에 서게 한 건 힌두우파 사회단체 RSS(민족자원봉사단)다. RSS는 인도의 국부 마하트마 간디를 죽인 암살자가 속한 단체다. 모디가 속한 정당 BJP를 만든 게 RSS이다. 1980년 창당된 BJP는 RSS의 정치 기구다. 결국 나렌드라 모디 신임 인도 총리는 경제발전 신화와 '무슬림 도살자'라는 두 극단 사이의 어딘가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혹은 양쪽 다일 수도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나렌드라 모디 총리를 키운 건 RSS다. RSS는 힌두우파 민족주의 단체다. 1925년 낙푸르에 살던 의사(K. B. 헤드게왈)가 창립했다. 당시 힌두와 무슬림을 아우르는 관용적인 인도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의 리더십에 반발, 출범했다. 간디는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을 당시 인도인을 대표하는 지도자였다. 간디가 이끄는 인도국민회의당은 세속적인 민족주의를 표방했고, RSS는 인도인의 다수를 차지하는 힌두가 중심에 서는 힌두 민족주의를 내세웠다.

현재 12억 인도 인구의 80.5%는 힌두교 신자이고, 13.4%는 무슬림, 2.3%는 기독교도, 시크교도는 1.9%이다. 무슬림은 소수이나 지배계급으로서, 서기 1206년 델리에 이슬람 왕국이 들어선 이후 이 도시를 중심으로 인도를 1857년까지 650년간 호령했다. 힌두는 압도적 다수이면서도 소수 무슬림에 눌려온 역사에 대한 반감을 갖고 있다.

이 감정이 비등점에 다다른 게 1948년 RSS 회원이었던 나투람 고드세의 마하트마 간디 암살이다. 당시 인도는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했던 초대총리 자와할랄 네루를 중심으로 나라를 정비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마하트마 간디는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쪼개진 나라의 현실을 가슴 아파하고, 분단의 후유증으로 종교집단 간 유혈 폭동 사태를 겪고 있는 나라를 추스르는 정신적 지도자였다. RSS 조직원 고드세가 보기에 마하트마 간디는 힌두의 적이었다.

델리에서 벌어진 간디 암살 사건 직후 당시 네루 총리는 RSS를 불법화하고, 2만명 이상의 조직원을 체포했다. RSS는 사건 1년 뒤인 1949년 다시 합법적인 활동을 허용받았다. RSS 일부 회원의 타 종교에 대한 배타적인 정서는 아직도 강하다. 지금도 한국의 일부 기독교 선교사들은 인도에서 사역하며 'RSS 조직원들이 인도의 기독교도들을 위협하고 살해한다'는 글을 보내오고 있다.

나렌드라 모디가 RSS에 입문한 건 고향 마을 바드나가르(Vadnagar)에서다. 1958년으로, 8살 때였다. 바드나가르는 구자라트주 내 북동쪽 도시로, 구자라트주 수도 간디나가르 북쪽에 있다. 개띠해인 이해 가을, 인도의 최대 축제 중 하나인 디왈리 때 소년 모디는 구자라트주의 RSS 책임자가 주최하는 행사에 참석, 소년 자원봉사단원(bal swayamsevak)이 되겠다고 선서했다.

나렌드라 모디의 큰형 솜바이 모디는 "나렌드라는 항상 뭔가 다른 걸 하고 싶어했다. 매일 우리가 집이나 학교에서 하는 것 이상의 뭔가 다른 것을 원했다. RSS가 그에게 그걸 줬다"고 말했다.(인도 잡지 캐러반 2012년 3월 1일자 보도) 나렌드라는 육형제 중 셋째다. 그의 가족은 간치 카스트 소속이다. 이 카스트는 전통적으로 야채유를 짜서 팔아 생계를 유지해왔다. 나렌드라의 아버지 다모다르다스 모디는 추가로 기차역에서 차 점포를 운영했다.

나렌드라 모디는 아침에는 기차역에서 아버지 일을 도왔고, 학교에서 수업이 시작되는 종소리가 나면 철길을 가로질러 학교로 달려가곤 했다고 그의 학교 친구들은 기억한다. 모디는 바드나가르의 구도심에 있는 고등학교(Bhagavatacharya Narayanacharya)를 다녔다. 이 학교에서 산스크리트어를 가르쳤던 교사는 나렌드라에 대해 "평범한 학생이었다. 토론과 연극에 큰 관심을 보였다. 내가 토론반을 만들었는데 나렌드라는 빠지지 않고 나왔다"고 말했다. 나렌드라가 당시 의상을 입고 무대에서 연극을 하고 있는 모습은 사진으로 남아있다.

모디의 친구로, 고향 마을 바드나가르에서 전통 아유로베다 의사로 일하는 수디르 조쉬는 인도 언론에 "저녁에 학교가 파하면 우리는 집에 책을 던져놓고 샤카(샤카는 RSS 회원들의 일일 행사다. 아침 혹은 저녁에 모여 1시간 동안 체력 단련과 노래로 결속을 다진다)로 곧장 달려가곤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돕는 일과, 학교에 가는 것을 하면서 모디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건 샤카였다"고 회고한다. 나렌드라의 큰형 솜바이는 "우리는 그애가 힌두 탁발승이 되려고 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고 말했다.

나렌드라는 이때까지도 장차 무엇이 될까 확신하지 못했다. 힌두 사제의 길을 갈 것인지, 힌두우파운동(Hindutva)에 뛰어들 것인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을 때 부모는 전통에 따라 아들의 결혼을 서둘렀다. 바드나가르의 간치 카스트의 전통에 따르면 결혼은 세 단계로 진행된다. 3~4살 때 약혼을 하고, 13살이 되기 전 종교의식(샤아디·Shaadi)을 하며, 18살 혹은 20살에 부모가 때가 됐다고 판단하면 신랑 신부가 한 집에서 살게 된다(고나·Gauna). 나렌드라 모디는 세 살 적은 자쇼다벤 치마늘랄과 약혼했고, 13살 때 샤아디를 했다. 그런데 약혼녀와 같이 살아야 할 나이가 된 18살 때 모디는 무슨 생각인지 가출했다. 이후 히말라야 산중을 돌아다녔다.

모디가 이때 무엇을 했는지는 가족도 모른다. 어디에 갔는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2년 후 어느날 나렌드라는 집에 돌아왔다. 그는 은둔 생활을 그만두고 아마다바드로 가겠다고 선언했다. 구자라트 최대 도시에서 점포를 하는 아저씨를 돕겠다고 했다.

나렌드라 모디의 이웃은 당시의 일을 기억한다. "나렌드라가 집을 다시 떠나기 전 그의 어머니는 나렌드라와 며느리가 같이 살게 하려고 했다. 사돈에게, 며느리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날 자쇼다벤이 고나를 위해 나렌드라의 집으로 왔다. 나렌드라는 그 일로 식구들과 싸웠고, 집을 다시 나갔다."

아마다바드에서 모디는 버스터미널에서 노점을 운영하는 아저씨를 도왔다. 그리고 독립해서, 인도식 전통차인 차이를 파는 행상 일을 시작했다. 모디가 RSS로 돌아온 건 이때였다. 인도 캐러반 잡지의 편집장인 비노드 K. 조스는 이 말을 구자라트주의 RSS 고위 관계자로부터 들었다고 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모디의 보복을 두려워해 익명으로 기사를 써달라고 요구했다고 했다.

"몇몇 프라차락(RSS의 상근 고위직)은 아침 샤카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모디의 차이 카트에서 차이를 마시곤 했다. 모디는 그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고향인 바드나가르에서 RSS에 가입했다는 얘기도 들었다. 나렌드라는 얼마 지나지 않아 행상 일을 접었다. RSS의 (구자라트) 본부로 옮겨 사환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모디는 자신의 전기 '나렌드라 모디: 근대 국가의 설계자(Narendra Modi: The Architect of a Modern State)' 작가인 M.V. 카르마트에게 RSS 본부 초기 생활을 얘기한 적이 있다. "12~15명이 (구자라트의 RSS 본부 건물인 헤드게왈 바반에서) 함께 살았다. 나는 사무실에서 일했고, 그곳이 내가 속해야 할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고위 간부들을 위한 아침과 차를 준비했다. 이후 건물 전체를 청소했다. 건물에는 방이 8, 9개 있었다. "나는 건물 전체를 쓸고 닦고, 그리고 바킬(최고책임자) 어른과 내 옷을 세탁했다. 최소 1년간 그렇게 지냈다. 이때 나는 많은 사람을 만났다."

모디가 RSS 구자라트 본부에 있을 때는 구자라트와 전국적으로 RSS에 있어 중요했다. RSS가 열광적인 지하 세력이자 합법적이고 강력한 정치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RSS가 정치적인 입지를 넓혀간 데는 네 가지 이유가 있다고 아마다바드의 유명한 사회과학자인 트르딥 수흐룻은 말한다. 우선 1974년 나브니르만(Navnirman) 운동이 유리한 기회를 제공했다. 구자라트의 한 공대에서 기숙사 밥값이 오른 게 나브니르만 운동의 직접적 발단이었으나, 상황은 주 전체 대학생들의 소요로 확대됐다.

부패한 주 정부 퇴진을 요구한 학생들의 운동은 결국 주정부 붕괴로 이어졌다. 두 번째는 인디라 간디 총리가 선언한 비상사태가 RSS 입지 확대를 도왔다. 당시 인디라 간디 총리는 반대 세력을 정치적으로 탄압하기 위해 비상사태를 선언했고, 이는 반대 세력의 광범위한 연대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RSS는 간디의 반대 세력과 연합, 그 역량을 키웠다. 셋째 자선단체로서의 역할도 작용했다.

1971년과 구자라트에 대기근이 발생했을 때와, 1979년 마추강 댐 붕괴로 수천 명이 사망하는 재난이 발생하자 RSS는 조직원들을 대거 동원, 구조활동에 나섰다. 이는 구자라트 주민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넷째, 인디라 간디 총리가 1971년 구자라트의 옛 토후들의 직함과 재산을 빼앗을 때 RSS는 또 다른 지지세력을 얻었다. 옛 토후들은 간디 총리에 반대하는 RSS에 힘을 보탰던 것이다.

모디는 구자라트 RSS 내부에서 급속히 주요한 임무를 맡아갔다. RSS 지도자들이 여행할 때 버스와 열차를 예약하는 일과, RSS 구자라트 본부에 도착하는 편지들을 열어보는 일도 했다. 이때 모디는 처음으로 낙푸르의 RSS 본부에 갔다. 한 달 코스의 간부 훈련에 참석했다. RSS 조직에서 공식적인 임무를 맡기 위해서는 이 과정 이수가 필요했다. 1단계 훈련과정은 RSS에서 중요하다. 모디는 22살 혹은 23살 때 이 과정을 이수했다. 낙푸르는 인도 정중앙에 있는 도시로, 시내에 인도의 도로원표(Zero Milestone)가 있다. 모디는 이후 RSS의 외곽 학생 조직(ABVP)을 책임지는 RSS의 간부가 되었다. RSS는 수많은 외곽 단체를 보유하고 있다. 정당, 여성, 학생, 노동자, 농민 등등….

모디는 아주 작은 일에도 자신의 의견을 분명히 드러냈다. 고위 지도자들이 모디에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당시 ABVP 간부의 이야기다. "인디라 간디 정부의 비상사태 정국 때(1975년 6월 25일~1977년 3월 21일)였다. ABVP 간부들에게 반정부 시위를 조직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동네에서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시위를 했다. 어느날 아마다바드의 불라바바이 찰 라스타 지역에서 모임을 열고 있었고, 우리는 반정부 발언을 하되 차분하게 하라는 지침을 받고 있었다. 그것이 RSS 스타일이었다. 경찰과 정보기관도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집회가 진행되고 있을 때 나렌드라 모디는 평온한 집회에 화를 냈다. 그는 무대에 뛰어올라 마이크를 잡고 대중선동 연설을 시작했다. 거친 말을 내뱉고 정부에 대한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청중은 그걸 좋아했다. 하지만 그날 밤 구자라트 RSS 본부의 고위 간부들은 모디의 낮에 있었던 행동을 질책했다. 지하 활동을 해야 하는 간부가 공개 석상에 나오는 건 치명적인 잘못이라고 했다. 거기에 가서도, 그런 말을 해서도 안 됐다고 했다. 집회가 실패로 돌아간다 해도 좋다. 하지만 규율과 복종은 모든 것보다 중요하다는 말을 모디는 들었다." 절제하고, 개인보다 조직을 중시하는 RSS의 문화는 모디의 성격과 맞지 않았다.

RSS와, RSS가 만든 정당인 BJP에서 모디의 선배인 샹카르싱 바겔라(구자라트 주정부 장관 역임·모디의 경쟁자)는 모디가 젊은 시절 조직에 짜증을 냈다고 회고한다. "모디는 아침에 늦잠을 자고 일일 샤카를 거르기 일쑤였다. 조직의 다른 사람들과 일을 다르게 처리하곤 했다. 다른 사람들이 긴소매의 쿠르타를 입으면 반소매를 입었다. 우리가 카키색 반바지를 입으면 그는 흰색 반바지를 입었다. RSS 최고지도자 골왈칼(Golwalkar)이 방문했을 때 모디를 공개 석상에서 꾸짖은 적이 있다. 그가 턱수염을 깨끗이 깎지 않고 짧게 다듬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디는 조직전문가로서 명성을 쌓아갔다. 지도자들은 그에게 일을 맡기면 일이 된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인디라 간디 정부의 비상계엄 정국에서 RSS는 비밀리에 간행물을 출판해야 했을 때 임무가 구자라트에 부여된 적이 있었다. 나렌드라 모디는 수개의 언어로 된 팸플릿 수백만 부를 인쇄해서 안전하고 비밀리에 RSS의 전국 조직에 발송했다. RSS의 또 다른 외곽조직인 VHP(Vishwa Hindu Parishad)가 전국조직 집회를 구자라트에서 열었을 때 모디는 행사 기획과 진행을 책임졌다. 수년 후 모디는 조직전문가와 일꾼으로서의 구자라트 RSS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모디는 다시 마하라슈트라주 낙푸르의 RSS 본부로 갔다. 모디는 이곳에서 두 개의 추가 과정을 이수했다. 야심적인 그는 2단계, 3단계 교육과정을 이수하지 않고는 BJP로 옮겨갈 수 없거나 지도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1978년, 비상사태가 끝나고 1년이 지난 시점에서 모디는 구자라트의 6개 디스트릭트(district)를 책임지는 RSS의 고위 간부가 되었다. 3년 후 31살이던 그는 다시 승진, RSS와, RSS가 만든 정당인 BJP를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부여받았다. 이제 그는 정치적 야심을 펼 수 있는 정당인으로서 삶을 시작하게 된다. 인도의 주요 정당 BJP가 그의 새로운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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