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떠오르자 엄마들이 쓰러졌다

2014. 4. 26. 17:2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한겨레] [세월호 침몰 참사] 르포

진도체육관에서 보낸 열흘

476명의 탑승자 중에 174명만 침몰해가는 배에서 구조됐다. 수학여행을 떠난 한 학교 한 학년의 대다수가 숨지거나 실종됐다. 새벽녘 진도체육관에서 만난 실종 학생의 아버지는 "말 잘 듣게 키운 내 잘못"이라며 서럽게 울었다. 한낮의 태양 아래로 나선 한 어머니는 "내 새끼 얼굴을 보고 싶을 뿐"이라고 소리쳤다. 지켜보는 사람도 대형 참사 앞에 말을 잃었다. 진도체육관의 시계는 4월16일에 멈춰 있다.

"갑자기 배가 한쪽으로 기울었어요. 저도 자판기에 깔려 있다가 핸드폰도 못 보고 나왔어요. 지금 여기 애들이 별로 없어서 막 울어요."

지난 16일 오전 11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간,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여학생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방금 막 세월호에서 구조된 안산 단원고 2학년 손아무개양이었다. 손양과의 대화는 짧게 끝났다. 사고 지역 인근 진도군 조도면 서거차도 거차출장소로 전화를 걸었는데, 전화를 받은 직원 홍희정(38)씨가 구조된 학생 한명을 급하게 바꿔준 것이다. 손양에게서 다시 전화를 건네받은 홍씨가 말했다. 홍씨는 울고 있었다.

"이마가 부어 있고 신발을 안 신은 애가 많아요. 바다에 빠졌다 나와 달달 떨고 있어 담요랑 이불이 필요해요. 못 나온 애들도 있나 봐요."

목소리에서 긴박함이 느껴졌다. 구조된 아이들은 홍씨와 또다른 마을 주민의 집으로 갔다고 했다. 여학생 30명, 남학생 11명 모두 41명이었다. 선생님은 없었다. 학생들을 구조하던 서거차도 마을 이장 허학무(60)씨는 "제주도로 가는 배는 병풍도 북쪽으로 가는데, 이 배는 이상하게 남쪽으로 왔다. 수십년을 다녔지만 여긴 암초가 없는데 방송에서 암초에 걸렸다고 한다"고 했다. 같은 시간 티브이(TV)에 '세월호 전원 구조'라는 자막이 떴다. 감이 좋지 않았다.

오보였다. 늦은 오후에서야 280여명(정확한 탑승객·실종자 수 집계 이뤄지지 않음)의 실종이 공식 확인됐다. 진도체육관에서 만난 학부모들은 이 순간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학부모들이 학교로부터 '단원고 학생 324명 전원 무사히 구조 완료되었습니다'라는 문자를 받은 건 오전 11시6분. 박수를 치며 환호한 지 5시간도 지나지 않아 부모의 마음이 지옥으로 떨어졌다. 그때부터 전국민의 눈이 진도에 닿았다.

'전원구조' 오보로 밝혀지자부모 마음 지옥으로 떨어졌다계단에 걸터앉아 우는 이들뒤엉킨 곡소리"왜 구조하지 않는 겁니까?우리 다 팽목항으로 갑시다"

17일 새벽 5시 진도체육관은 깨어 있었다. 방송사 중계차들이 늘어선 입구에는 잠 못 이루는 가족들이 서성였다. 정문 앞에는 하얀 전지에 매직으로 쓴 구조자들의 이름과 이송 병원이 보였다. 명단에 쓰였던 이름이 틀렸는지 매직으로 그어 고쳐진 이름도 있었다. 새벽부터 소식을 전하는 방송 뉴스 속 앵커의 격앙된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계단에 걸터앉아 우는 이들의 곡소리가 뒤엉켰다. 금방이라도 큰불이 되어 일어날 것만 같은 초조함이 느껴졌다.

두손 모아 간절히 기도했지만…

집이 있는 사람들도 가족을 잃어버리면 난민이 된다. 사람들은 체육관 바닥 얇은 은박지 위에 앉아 이불 하나 덮었다. 누군가는 양손을 모으고 간절히 기도를 올렸다. 실신해 간이침대 위에서 링거를 맞았다. 일터에서 급히 달려왔는지 양복과 구두 차림인 남성도 많이 보였다. 밤새 울고 악을 썼을 몇몇 가족과 취재진은 벽에 기대 잠들어 있었다. 혹시나 실종자에게서 연락이 올까 휴대전화를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무료충전' 봉사 중인 통신사 부스에 가족의 휴대전화가 가득했다.

"밤새 아무 소식도 없을 수 있나요? 날이 밝았는데 왜 구조하지 않는 겁니까? 우리 다 팽목항으로 갑시다!"

충혈된 눈에서 읽은 에너지는 '분노'였다. 무대 위에서 마이크를 잡고 말하는 이는, 배를 빌려 타고 수색 현장에 다녀왔다는 실종자의 가족이었다. 여러 가족들이 그의 말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2~3살 된 아이를 한 손으로 안은 남성이 부인으로 보이는 여성과 구호품으로 나눠준 이불가방끈을 하나씩 나눠 들고 행렬에 동참했다. 팽목항으로 가는 대형 버스 두대와 자가용들이 꼬리를 물고 체육관을 빠져나갔다. 물어보니 밤새 이런 상황이 반복됐다고 했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중앙 통로를 오가던 강아무개(54)씨도 그중 한명이었다. 그의 아들은 단원고 2학년이었다. 그는 기자 옆에 앉아 크게 한숨을 쉬었다. "밤새 잠 못 드는 부모들이 현장을 다녀오고만 있어. 그런데 가보니 어둠뿐인걸. 구조한다더니 큰 배만 뱅뱅 돌고 있단 말이지. 아니야, 너무 아니야. 정치인, 기자 다 내려와도 (정작 구조하러) 나서는 사람이 없어." 파란색이 들어간 안경 너머로 강씨가 눈물이 번진 눈을 끔벅이며 말했다.

사연 없는 가족이 없었다. 하나뿐인 손자가 실종 상태라는 최아무개(78)씨는 쓰러진 며느리 곁에 앉아 있었다. "손자 어릴 때 내가 하나 더 낳으라고 했는데…. 상다리도 3개인 이유는 쓰러지지 말라는 건데 3명 낳을 수 없으면 둘이라도 낳으라고 했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슬픔을 술로 달래려 했는지 술을 마신 한 아버지는 단원고 2학년에 다니던 셋째 딸 이름을 말하며 울었다. "셋째가 날 똑같이 닮았어요. 날 제일 많이 닮았다고 했던 딸이란 말입니다!"

분노가 향하는 곳은 정부와 학교, 언론이었다. 17일 낮 12시 서해지방경찰청 국장은 앞으로 실시간 구조 상황을 보고하겠다고 가족들 앞에서 머리를 조아렸다. 한 남성은 수색상황 발표를 하던 해양수산부 국장의 멱살을 잡았다. 무대에 있는 물건을 국장에게 던지려다 참았다. 무대 아래 가족들마저 놀라 소리를 질렀다. 안전행정부 장관이 찾아와도 가족들은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교육부 장관에게는 물병을 던졌다. 그날 오후 진도체육관을 찾은 박근혜 대통령 앞에서도 그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몇몇 가족은 박 대통령에게 "(구조 투입) 명령을 내려달라. 대통령이 말하면 다 들어주는 것 아니냐"고 외쳤다. 박 대통령이 다녀간 뒤 "그래도 대통령이 와서 이나마 움직이는 것"이라는 말이 가족들로부터 흘러나왔다.

실종 상태인 단원고 박성호군 어머니 정혜숙(46)씨도 20일 청와대로 가는 학부모 대열 맨 앞에 서 있었다. 그날은 부활절이었다. 박군은 예비 신학생이었다. "자식을 보러 가겠다는데 왜 길을 막냐"며 고함을 질렀던 정씨는 다시 체육관으로 돌아왔다. 체육관 옆에 마련된 천막 성당을 다니고 있다는 정씨가 말했다.

"한달 전에 성호에게 물었어요. 하느님이 부르시면 어떤 결정을 할 거야라고. 애가 잠시 생각하더니 '뜻대로 할게요, 엄마' 그래요. 그 말 들어서 다행이지 싶어요. 전 우리 아들이 부활절에 부활했다고 믿어요."

정씨의 말을 들으면서 가족들이 느끼는 분노의 실체가 사실은, 이 고통이 너무 괴롭다고 세상에 화 한번 내보고 싶었던 애끊는 모정은 아니었을까 생 각했다.

"아이들은 다 물속에 있는데 교감은 살았다며. 정부와 같이 이야기해줘야지 왜 한마디도 없냐. 당신은 교장 자격도 없어!"

17일 밤 10시 부모들은 본부석에 앉아 있던 단원고 교장을 불러 일으켰다. 교장 선생님과 사고 수습을 위해 내려온 단원고 1학년, 3학년 교사들이 단상 위로 밀어 올려졌다. 선생님들은 무릎을 꿇었다. 다음날 강아무개 교감 선생님이 체육관 옆 공설운동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이 체육관에 전해졌다. 사람들 얼굴에서 죽음이 가깝게 느껴졌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가족들은 희망과 절망 사이를 오고 갔다. 실종자인 단원고 교사의 부인이 카드 결제 문자가 왔다고 본부석으로 달려왔다. 결제 시간은 17일 오후 5시48분. 남편이 구조 요청을 하기 위해 앱을 결제한 것 같다고 했다. 또다른 가족은 지인의 지인이라는 민간 잠수부가 보낸 카카오톡 메시지를 믿었다. 가족은 생존자가 배 안에 많이 있다고 이해했다.

체육관 찾은 박대통령에게"구조 명령 내려주세요"'배안에 생존' 조작 메시지에도불신은 한동안 이어졌다"정부가 누구도 믿을 수 없게 해"진도는 4월16일에 멈춰있다

카메라 셔터소리에도 큰 소동

기자들이 모여들어 발신자를 확인할 수 없는 카카오톡 메시지가 있다는 보도를 할 수 없다고 말하자, 그는 언론 통제가 심해 진실이 보도되지 않는다며 화를 냈다. 경찰이 페이스북과 카카오톡 메시지 확인 결과 조작된 것이라고 발표한 뒤에도 불신은 한동안 이어졌다. 수첩을 든 어떤 기자는 수첩을 뺏겼다. 카메라 셔터 소리라도 나면 취재진과 가족 간의 큰 소동이 벌어졌다. 가족 대표단은 정부 발표와 가족의 슬픔만 받아적는 기자들과는 대화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기다리던 생존자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시신 신원확인을 위한 유전자 검사가 시작됐다. 사고 4일째인 19일 오전, 진도체육관 3번 게이트 앞에 마련한 천막에 어머니들이 길게 줄을 섰다. '어머니가 가장 정확합니다'라는 해경의 설명에 어머니들이 일어섰다. 면봉으로 입안을 긁어내고 나오는 어머니들의 표정은 복잡했다. 시신을 빨리 찾을 수 있다는 기대감에 달려왔지만 이런 것까지 해야 하는지 묻고 있는 듯 보였다.

물살이 느려진 22일 이후 많은 시신이 수습되기 시작하자 체육관은 다시 술렁였다. 박근혜 대통령이 다녀간 뒤 설치된 200인치 텔레비전에 인양된 시신의 인상착의가 공개됐다. "○○이 맞아"라며 어머니는 주저앉았다. 누워 있던 아버지가 황급히 짐을 챙겼다. 체육관 철문 밖으로 나가서야 어머니는 서럽게 울었다. 미확인 시신 '40번'의 가족도 절규했다. 40번 시신은 이틀 동안 가족을 만나지 못하다 디엔에이 결과가 나오고서야 가족 품에 안겼다. 가족들은 아버지가 직접 팽목항에서 시신을 살펴봤지만 알아보지 못했다며 비통해했다. 날이 지날수록 시신이 훼손되고 있는데, 왜 빨리 '구조'하지 못하냐는 분노가 다시 끓어올랐다.

사고 발생 초기 대응을 제대로 못한 정부는 역할을 포기한 지 오래였다. 가족의 뜻대로 움직였다. 위기 관리 매뉴얼의 작동이나 행정력의 운영은 애초에 없었던 걸까. 학교 선생님과 공무원들도 학부모의 화를 받아내기 급급했다. 죄인은 많은데 책임지고 판단하는 사람이 없었다. 분노와 자괴감이라는 양극단만 존재했다. 그 사이를 정치인, 경찰 정보원, 브로커 등이 파고들었다. 안산이 지역구인 새누리당 박순자 전 국회의원은 사고 초기 학부모 대표와 정부 사이의 중재자 구실을 했다. 새정치민주연합 소속의 송정근씨가 임시 학부모 대표로 나서기도 했다. 경찰 정보원들은 카카오톡으로 실시간 학부모 회의를 전송했다. 23일 자신을 '육경'(육상경찰)이라고 밝힌 한 정보원의 카카오톡 창에 뜬 이름은 '체육관14'였다. 같은 날 오후 알몸의 남성이 학부모들이 앉아 있는 체육관 중앙 통로를 뛰어가는 일까지 벌어졌다. 모든 것은 가족들이 감당할 몫이었다.

25일 오전 가족들은 체육관에서 많이 빠져나갔다. 어느새 실종자 수가 사망자 수보다 줄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팽목항 시신안치소를 오가는 가족들의 얼굴이 검게 그을렀다. 화장실에서 머리를 감고 구호품으로 주는 운동복을 입은 이들 사이로 의료진이 소독약을 들고 오고 간다. 아직 시신을 찾지 못한 가족들은 해경의 요청대로 치과치료 결과나 휴대전화 같은 소지품을 상세히 적어 제출했다. 자원봉사자 박경숙(53)씨는 "이제 부모는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다"고 했다.

체육관 넘어선 분노와 슬픔

분노와 슬픔은 체육관을 넘어서고 있다. 가족들은 어떻게 이 슬픔을 애도해야 할까. 체육관 옆 천막에서 의료봉사를 한 서울의대·서울대병원 의료지원단의 김석주 교수(정신과)의 말이다.

"아이를 생각할 때 마지막 기억이 세월호가 되어서는 곤란해요. 눈물을 흘리면서도 아이가 자라면서 장난치고 웃고 놀던 기억을 할 수 있어야 해요. 그런데 이번 사건이 애도의 기회마저 빼앗았을까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에요. 이런 사고를 당하면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되는 건 당연한 건데 정부가 그 믿음에 확신을 줬어요. 실시간으로 속보를 내보내는 언론이 전국민에게 그 믿음을 전했고요. 어떻게 하냐고요? 모든 상황이 종료되는 것뿐 방법이 없어요. 지금 가족들은 쇼크 상태죠. 비이성적인 행동을 할 수밖에요. 같은 아픔을 느끼는 가족들끼리도 싸우는 건 당연해요. 지금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옆에서 울어주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자연의 모든 것들이 실종자들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일까. 진도의 4월은 여린 잎을 틔우는 나무와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였다. 열흘 전 쌀랑했던 봄바람이 어느새 여름을 담고 왔지만, 진도는 여전히 4월16일에 머물러 있다. 오늘도 조용한 섬에 어울리지 않게 수많은 차량이 쌩쌩 달린다. 하늘거리는 유채꽃 한번 마음 편히 바라보는 이 없다. 성난 얼굴로 진도체육관과 팽목항 사이를 바삐 오갈 뿐이다.

진도/최우리 기자 ecowoori@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오바마 앞에서 결재받듯… 박 대통령, 굴욕 사진김어준 "진도관제센터, 세월호와 교신 기록 편집 가능성""1년간 배 만들었다" 어느 구원파 신도의 고백언딘, 금양호 때 "선실 진입하려면 5억원 더 달라"[화보] 흰 국화꽃 한송이 당신께 드립니다…통곡의 분향소

공식 SNS [통하니][트위터][미투데이]| 구독신청 [한겨레신문][한겨레21]

Copyrights ⓒ 한겨레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한겨레는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Copyright © 한겨레.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