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기] '황제노역', 네이밍의 마법은 통했다
[아시아경제 류정민 기자]'황제노역', 참으로 기막힌 표현이다. 언론에 그 이름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3월26일이다. 그 이름이 나올 때 승부는 이미 결정됐다. 이해하기 쉬운 굵고 짧은 한마디였기 때문이다. 효과는 곧바로 이어졌다.
검찰은 3월26일 밤 '황제노역' 논란의 주인공인 허재호 대주그룹 전 회장의 노역을 강제로 중단했다. 대법원은 3월28일 전국수석부장회의까지 열면서 긴급하게 대책을 마련했다. '황제노역' 판결의 주체인 장병우 광주지방법원장은 3월29일 법원행정처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때로는 지나치게 신중하다는 평가까지 받는 사법부가 발 빠르게 대처한 이유는 무엇일까. 황제노역을 둘러싼 여론의 흐름이 심상치 않다는 점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사법부 신뢰가 추락하는 상황에서 긴급 진화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발빠른 대처로 이어졌다.
허재호 전 회장의 노역을 둘러싼 사건은 처음부터 여론의 관심을 집중시킨 사안이었을까.
'벌금을 내지 않을 경우 1일 5억원으로 환산해 노역형에 처하도록 한다'는 판결이 처음으로 나온 시기는 2010년 2월이다. 광주고법은 허재호 전 회장에 대한 2심에서 이러한 내용을 담아 판결했다.
당시 판결 주체가 장병우 현 광주지방법원장이다. 장병우 광주지방법원장은 4년이 지나서야 당시 판결 때문에 물러나게 됐다. 그동안 조용하게(?) 잘 지냈다. 최근 광주지방법원장으로 임명될 정도로 입지도 탄탄했다.
하지만 허재호 전 회장이 한국에 돌아온 3월22일 이후 불과 일주일 사이에 많은 것이 바뀌었다. 허재호 전 회장 사건이 어떻게 국민 관심의 초점이 됐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허재호 전 회장 사건은 환형유치제도의 문제점에서 기인한다. 노역을 통해 벌금을 대신하는 '환형유치'는 일당의 상한선이 없고, 법관 재량에 따라 일당이 결정된다는 문제점이 있다.
그러나 환형유치는 일단 말부터 어렵다.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는 환형유치 하나가 아니었다.
'향판(鄕判·지역법관)' 논란이 불거졌다. 검사의 '선고유예' 요청을 둘러싼 타당성 논란도 이어졌다. 허재호 전 회장 사건을 파악하려면 '환형유치' '향판' '선고유예' 등 어려운 말을 이해해야 한다.
직접 사전을 찾아보면서 말뜻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언론이 보도를 쏟아내도 국민 입장에서는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남들에게 뭐라고 설명하기는 어려운 상태였다.
어쩌면 잠깐의 이슈였다가 관심의 대상에서 멀어졌을지 모를 허재호 전 회장의 환형유치 논란을 국민 관심의 초점으로 만든 것은 '황제노역'이라는 기막힌 네이밍(naming)에 있다.
네이밍은 있는 그대로 해석하면 '이름 짓기' 정도가 될 수 있지만, 정치와 경제, 사회 등 곳곳에서 '마법'과 같은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네이밍 승부가 판세를 가르는 이유는 프레임(생각의 틀)의 물줄기 자체를 특정한 방향으로 이끄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황제노역이라는 용어가 언론에 등장하고, 대다수 언론이 이를 따라 쓰는 순간 사법부가 '백기'를 드는 결과는 이미 예정됐다는 얘기다.
환형유치, 향판, 선고유예 등 어려운 용어를 이해할 필요 없이 '황제노역'이라는 단어에 모든 것이 설명이 돼 있다. 허재호 전 회장은 특혜를 받은 것이고, 사법부는 특혜를 베풀었다는 뜻이 담겨 있다.
언론은 황제노역이라는 기사 제목을 경쟁적으로 뽑으며 보도 경쟁을 이어갔다. 황제노역을 가능하게 했던 결정 주체들의 비리 의혹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장병우 광주지방법원장이 사직서를 제출하게 된 원인 중 하나였던 아파트 거래 의혹도 이 과정에서 나왔다.
네이밍의 마법은 그 위력 못지않게 폐해도 있다. 차분한 논쟁과 토론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결과를 특정 방향으로 이끌 때도 있기 때문이다.
판사가 지역에서 오래 근무하는 것을 허용하는 향판제도는 '황제노역' 판결의 원인을 제공한 주범으로 몰렸지만 '나쁜제도'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법관의 잦은 전보 인사에 따른 재판 차질 해소 등 향판(지역법관) 제도의 장점도 있기 때문이다.
향판의 장점은 무엇이고, 단점은 무엇인지, 결과적으로 발전적 개선방안은 무엇인지 차분한 공론화가 필요하지만 섣불리 결론이 정해진 측면이 있다.
대법원이 마련한 환형유치제도 개선안 역시 일선 법관의 충분한 의견 수렴과 공감대 형성 이후 마련됐는지 의문이다. 네이밍의 마법은 막강한 힘을 발휘하지만 올바른 결론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류정민 기자 jmryu@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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