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장호연의 1988년 개막전 노히트 노런

한국아이닷컴 이창호 기자 2014. 3. 26.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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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발 대결에서 눈물 흘린 윤학길과 롯데 타자들의 그날

그날, 부산 사직구장에는 빈병과 깡통이 시도 때도 없이 날아들었다. 거친 욕설이 끊이지 않았다.

1988년 4월2일, 한국야구위원회(KBO) 공식 기록지에는 '4회, 7회, 8회, 9회 각각 약간의 빈병과 깡통이 장내로 투입됨'이라고 정만호 기록원이 짧게 적어 놓았지만 이닝이 거듭될수록 분위기는 더욱 험악해졌다.

안타를 단 1개도 때려내지 못하고 참패하는 모습을 부산의 광적인 팬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낮술에 취해 1루와 3루 쪽 그물망에 올라타 롯데 선수들을 향해 육두문자를 남발하는 것이 오히려 천만다행.

경기 도중 롯데 타선의 무기력에 대해 항의하려고 던진 빈병이나 깡통을 정리하느라 심판은 물론 구단 관계자들이 애를 먹었다.

그날, 부산 사직구장에선 OB 장호연이 프로야구 사상 최초의 개막전 노히트노런을 일궈냈고, '고독한 황태자' 윤학길은 패전 투수로서 고개를 떨궜다.

윤학길은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개막전은 어느 투수에게나 부담스럽다. 나 역시 그랬다. (최)동원이 형이 나갈 수 없는 상황이라 어우홍 감독께서 일찌감치 OB와의 홈 개막전 선발로 나를 낙점했다."

1988년 4월2일 토요일, 부산 사직구장에는 롯데와 OB의 개막전을 맞아 구름 관중이 몰려들었다. 오후 2시 황석중 주심이 '플레이 볼'을 선언할 때 이미 만원 관중의 환호성이 사직골을 뒤덮고 있었다.

관중 공식 기록은 2만 7,334명. 경기 시작 전부터 "롯데~"를 연호하는 팬들의 함성이 뜨거웠다.

어우홍 롯데 감독은 1번 지명타자 홍문종, 2번 2루수 박영태, 3번 3루수 한영준, 4번 좌익수 김용철, 5번 1루수 김민호, 6번 우익수 유두열, 7번 유격수 정영기, 8번 포수 김용운, 9번 중견수 김재상을 선발 라인업으로 꾸몄다. 1962년생인 한영준의 타선의 막내였다.

"당시 롯데 타선엔 고참급 선수들이 많았다. 내가 3점 이상 내주면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내가 버티는 동안 우리 타자들이 쉽게 (장)호연이 형의 공을 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선발 윤학길은 1회초 자신의 송구 실책이 빌미가 돼 1점을 내줬지만 타자들을 믿었다.

아뿔싸. 너무 만만하게 본 탓일까. 1회가 지나면서 이상한 흐름이 이어졌다.

OB 선발 장호연은 1회말 많이 흔들렸다. 1번 홍문종에게 스트레이트 볼넷을 내줬고, 2번 박영태는 볼카운트 1볼 2스트라이크에서 4구째 몸에 맞는 공을 던졌다. 무사 1, 2루.

살랑살랑 던지는 장호연의 공은 롯데 타자들의 입맛을 돋우는 '마약' 같았다. 마구 덤벼들게 만들었다. 3번 한영준의 투수 땅볼은 유격수와 1루수로 이어지는 병살타가 됐고, 2사 3루에서 4번 김용철이 때린 타구 역시 유격수 땅볼로 처리됐다.

장호연이 1회에 던진 공은 모두 18개. 이날 가장 많은 공을 던졌다. 나머지 8이닝은 시속 110km대의 슬로 커브를 '아리랑 볼'처럼 간간이 섞어가며 총 81개의 공으로 막아냈다.

장호연의 기운이 이어지는 것일까. 두산에선 지난해 유희관이 혜성처럼 나타나 '느림의 미학'을 보였다는 찬사를 받았다. 장호연은 지금 유희관보다 더 느물느물한 투수다.

"(장)호연이 형은 길게 던질 수 있는 투수가 아니었다. 변화구가 아주 좋았지만 이닝이 거듭되면 우리 타자들이 충분히 쳐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묘하게 꼬였다. 초구에 방망이가 나가는 경우가 많았고, 3구 이내에 승부를 걸려고 했다."

장호연의 공은 춤을 췄다. 2회말 5번 김민호가 초구를 공략하다 3루 파울 플라이로 아웃되는 등 4차례나 첫 번째 공을 때리려다 범타로 물러났다. 롯데 타자들은 총 14차례나 3구 이내에 승부하다 허무하게 벤치로 돌아서며 장호연을 도와줬다.

롯데 타자들의 성급한 공격이 장호연의 투구수 절약을 도왔다. 노히트노런의 빌미를 됐다.

장호연은 9이닝 동안 28명의 롯데 타자를 상대로 총 99개의 공을 던져 볼넷 2개와 몸에 맞는 공 1개를 내준 것이 전부. 4-0 승리. 삼진은 단 1개도 잡지 못한 '이상한' 노히트노런을 완성했다.

윤학길은 전형적인 완투형 투수. 이날 1회초 OB 1번 지명타자 박노준의 투수 땅볼을 1루에 악송구한 것이 빌미가 돼 첫 실점을 했지만 힘 있는 투구로 7회초 1사 2, 3루까지 씩씩하게 마운드를 지켰다.

그리고 마운드를 왼손 안창완에게 넘겼다. 결국 6.1이닝 동안 99개의 공을 던지면서 4사구 1개도 없이 10안타로 4실점(3자책)하며 패전투수가 됐다.

김성근 OB 감독은 개막전 선발로 1번 지명타자 박노준, 2번 2루수 김광수, 3번 1루수 신경식, 4번 좌익수 양세종, 5번 중견수 박종훈, 6번 우익수 김광림, 7번 3루수 구천서, 8번 유격수 유지훤, 9번 포수 김경문을 내세웠다.

양세종은 1회초 1사 1, 3루에서 우전적시타를 날려 승리 타점, 투수 실책으로 진루한 뒤 2루 도루를 성공시키며 득점 기회를 이어간 박노준은 결승점의 주인공이 됐다.

장호연은 '개막전의 사나이', 윤학길은 '고독한 황태자'다.

1982년 출범한 프로야구는 올해로 33년째를 맞는다. 시즌 개막을 이야기할 때마다 장호연은 빠질 수 없는 인물로 프로야구사에 남아 있다.

1983년 MBC와의 잠실 개막전 때 신인 최초로 완봉승을 올렸고, 1988년 롯데와의 부산 개막전 때는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는 등 개막전 최다인 9차례나 선발로 나가 6승2패로 통산 최다승 투수라는 영광을 맛봤기 때문이다.

특히 1985년부터 1990년까지 6년 연속 개막전 선발로 나섰으니 '짱꼴라'라는 별명처럼 속을 알 수 없는 '강심장 투수'로 남아 있다.

충암고, 동국대를 거쳐 OB에 입단한 장호연은 타자를 압도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비시즌이면 스키를 즐기고, 구단에서 제공한 '정종 목욕'으로 피로를 푸는 특이한 선수였다.

윤학길은 통산 4차례 개막전 선발로 등판했다. 2승1패. 1989년 삼성, 1992년 OB과의 부산 개막전에서 모두 완투승을 거뒀다. 유일한 패배는 장호연에게 당한 것이다.

1988년 홈 개막전 패전투수의 멍에를 썼지만 4년 뒤 1992년 다시 OB와 맞붙은 홈 개막전 때 장호연과 '복수 혈전'을 펼쳐 아픔을 씻어냈다. 완투 대결을 펼친 끝에 4-3 승리를 이끌어냈다.

이날 윤학길의 복수극을 현장에서 목격한 부산 팬들은 1만 4,963명에 불과했다. 4년 전보다 무려 1만여 명이나 줄었다.

윤학길은 연세대 3년 선배인 최동원의 그늘에 가려 있었다. 최동원이 '황제'였다. 권좌에 오을 수 있는 기량과 성적을 만들어도 '황태자'일 수밖에 없었다. 고독했다.

부산상고, 연세대, 상무를 거쳐 1986년 롯데에 입단한 윤학길은 프로 2년째부터 실질적인 에이스 역할을 해냈다.

최동원은 1987년 4월4일 부산 사직구장에서 열린 청보와의 홈 개막전에 선발로 나가 김봉근과 선발 대결을 펼쳤지만 1-3으로 완투패를 기록했다.

1984년 기적 같은 한국시리즈 우승을 연출하는데 일등공신이었던 '최고의 스타'도 세월 앞에선 '장사'가 아니었다. 내리막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1988년 홈 개막전 선발로 윤학길을 선택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강태홍 부산시장의 시구로 함께 오후 2시 1분에 시작된 1988년 롯데의 홈 개막전은 2시간 31분이 흐른 오후 4시 32분 장호연의 노히트노런으로 막을 내렸다.

'개막전의 사나이' 장호연은 시나브로 야구계를 떠났다. 윤학길은 롯데, 한화, LG, 넥센 등에서 코치 생활을 한 뒤 지금 천안북일고에서 투수 인스트럭터로 꿈나무들을 지도하고 있다.

기록은 남아 있다.

한국아이닷컴 이창호 기자 chang@hankook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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