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노동·성폭행.. 산에 무덤이 하나씩 늘어났어요" 한종선씨 외로운 투쟁

정승임기자 입력 2014. 3. 26. 03:39 수정 2014. 3. 26. 0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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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은 축소·은폐

"매일 새벽 4시 기상, 소금 뿌린 김치와 썩은 냄새가 나는 전어젓이 전부인 식단, 매일 반복된 구타도 모자라 눈 앞에서 누나가 성폭행 당하는 걸 보기도 했어요. 배가 고파 화단에서 지네를 잡아먹거나 쥐를 먹는 경우도 있었고요."

아홉살이던 1984년, 누나와 함께 형제복지원에 수용된 한종선(39)씨의 생활은 지옥과도 같았다. 어른들은 매일 10시간 이상 중노동을 해야 했고 상습적 구타로 불구가 되거나 목숨을 잃는 경우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인근 산에 무덤이 새로 생겨났다"는 게 한씨의 기억이다.

1975~1987년 거리를 떠돌던 부랑자와 취객 등 일반시민, 어린이 1만8,500여명을 강제 수용하고, 노역과 폭행을 일삼아 513명을 숨지게 한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한때 3,500명까지 수용, 전국 최대 부랑아 시설이었던 형제복지원에서 벌어진 잔혹한 실상은 1987년 초 세상에 알려졌지만 본격적인 진상규명의 길이 열리기까지 27년이 걸렸다. 늦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울주 강제노역장에서 수용자 35명이 집단 탈출해 검찰 수사가 이뤄지고, 당시 야당인 신민당이 진상조사까지 벌였지만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정치적 위기에 몰린 전두환 정권은 내무부, 검찰, 부산시에 압력을 가해 사건을 은폐ㆍ축소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박인근 형제복지원장의 구속 소식을 듣고 "박 원장 같은 사람 덕분에 거리에 거지도 없고 좋지 않소"라며 오히려 그를 칭찬할 정도였다.

2005년 참여정부 때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출범하면서 두 번째 진상규명 기회가 찾아왔지만 피해자 상당수가 저학력자이거나 구타로 정신이상자가 돼 진정을 할 수 없었다. 위원회 역시 형제복지원 사태를 과거사로 보지 않았다. 여준민 형제복지원 사건진상 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 사무국장은 "이명박 정부 들어 예산 문제 등을 이유로 진실화해위원회가 해체되면서 진실규명의 기회를 또 놓쳤다"고 말했다.

이후 한종선씨가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피해 기록을 담은 책 <살아남은 아이>를 내면서 상황이 조금씩 바뀌었다. 지난해 말 대책위가 피해자들의 인권침해 상황을 국가차원에서 조사하도록 안전행정부 장관을 상대로 국가인권위원회에 집단진정을 제기했으나 인권위는 1년 내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는 이유로 각하 결정을 내렸다. 한편 지난 21일엔 형제복지원 출신 무연고 시신 38구가 1987~1988년 부산시립공원묘지에 가매장됐다는 자료가 발견돼 사건이 알려진 이후에도 사망자가 발생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정승임기자 chon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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