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코우치 유이치로 日 후지겐 회장, 씨 뿌리고 젖소 키우던 농부..외양간 개조한 공장서 세계 1위 기타 회사 일구다

입력 2014. 3. 21. 07:01 수정 2014. 3. 21.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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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키지 않은 일도 최고가 되라

대학 포기하고 마지못해 농사 시작…관련서적 찾아 읽으며 농업 연구

원예·축산업으로 확장하며 대성공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라

기타 열풍 불자 제조업 뛰어들어 音의 원리 공부하며 최고제품 도전

세계시장 30% 이상 점유 회사로

회사 목표 달성은 직원의 몫

훌륭한 사람이 훌륭한 기타 만든다…직원 근무환경에 아낌없이 투자

적자 기록해도 급여는 업계 최고로

[ 강영연 기자 ]

1981년 세계적 기타 회사인 펜더는 위기에 빠졌다. 세계 1위라는 자만심에 취해 기술 개발을 소홀히 한 탓에 일본 업체에 품질에서 뒤처진 것이다. 결국 펜더는 생산공장을 닫고 이 회사에 기타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펜더의 기타를 생산하게 된 업체가 바로 후지겐이다. 1960년 외양간을 개조한 공장에서 시작한 후지겐은 20여년 만에 세계 1위 기타 회사로 발돋움했다. 지금도 세계 기타 시장의 30% 이상을 점유하며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이런 성공 뒤에는 후지겐 창업자이자 회장인 요코우치 유이치로가 있다. 그는 서양회사들이 독점하던 악기 시장에서 제품력 하나로 후지겐이 우뚝 설 수 있는 밑거름을 쌓았다.

○대학을 포기하고 성공한 농부로

일본 혼슈 나가노현에서 농부의 큰아들로 태어나 평범한 유년기를 보낸 요코우치는 스무 살이 되던 1947년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대학생이 되길 꿈꾸던 그에게 어머니가 가업을 이어 농사를 지으라고 한 것이었다. 간절한 부탁에 마지못해 허락했지만 요코우치는 농사를 짓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거름을 지고 읍내를 지나올 때는 누가 볼까 창피해 고개를 숙이고 다녔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난 후 읍내에서 고등학교 시절 선생님을 만난 그는 농사를 짓는 것이 싫다고 불만을 쏟아내고 말았다. 선생님은 위로 대신 기왕 농사를 시작했으면 최고가 되도록 노력해야지 한심하다며 버럭 화를 냈다. 요코우치 회장은 "신세한탄만 하며 살아온 세월이 부끄러웠다"며 "내키지 않는 일이라도 최고가 되는 게 진짜 성공이라고 마음을 고쳐 먹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그날 이후 최고의 농부가 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적극적으로 농사일에 나섰다. 재배하는 농산물마다 관련 서적을 찾아 읽으며 작물의 특징, 씨 뿌리는 방법, 비료 주는 방법 등을 배웠고 좋은 씨앗을 구하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다. 일반적으로 가지는 한 포기에 30개가 달리는데 그가 재배한 가지에서는 100개 이상을 수확할 정도였다.

농산물만 수확해서는 수익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고 젖소 사업에도 진출했다. 해외 서적까지 찾아보면서 연구한 끝에 직접 두유를 만들어 소에게 먹였다. 효과는 분명했다. 당시 일본에서 사육되는 젖소는 하루 평균 18리터의 우유를 생산했지만 요코우치의 젖소는 그 두 배를 생산했다.

원예 농업도 시작했다.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는 꽃은 백합으로 1년 내내 수요가 있었지만 6, 7월에만 꽃이 피워 겨울에는 구할 수 없었다. 요코우치 회장은 강 상류 산속 동굴 안에 바람구멍과 얼음방을 만들고 그 옆에는 난방을 할 수 있는 비닐하우스를 설치했다. 겨울과 여름을 모두 나야 꽃을 피우는 백합의 특성에 따른 것이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한겨울 피어난 백합은 없어서 못팔 정도였다. 마지못해 시작했던 농사지만 1년에 100만엔(약 1000만원) 이상을 벌어들이는 성공한 농부가 됐다. 당시 평균 대졸 초임 연봉은 10만엔도 되지 않았다.

○최고의 기타를 만들어라

서른두 살이 되던 1959년 요코우치 회장에게는 또 한번의 전환점이 찾아왔다. 그는 도쿄대 농학부 교수가 젊은 영농인들을 대상으로 연 강연회에 참석했다. 농업에 대한 지식을 쌓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담당 교수는 공업화 시대를 강조하며 지금이라도 도시로 나가 일하라고 조언했다. 요코우치 회장은 "처음에는 농업을 무시하는 태도에 화가 났지만 점점 그 의견에 매료됐다"며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고자 하는 열정을 갖게 됐다"고 회고했다.

다음해 요코우치는 외양간을 개조한 건물에서 10명의 직원과 함께 바이올린 공장을 열었다. 클래식 음악을 좋아한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막상 회사를 열고 시장조사를 해보니 상황이 좋지 않았다. 바이올린 시장은 성장이 더뎠다.

반면 비틀스가 인기를 끌면서 젊은이들이 기타를 치기 시작해 기타는 없어서 못팔 정도였다. 요코우치는 기타를 생산하기로 결정했다. 유명 브랜드의 기타를 사서 분해하고 시제품을 만들었다. 바이올린 전문가들이 만든 기타였지만 제품은 제법 괜찮은 평가를 받았다. 시제품으로 만들던 기타가 그해 목공진흥협회 전람회에서 일등상을 받기도 했다. 악기상들도 주문을 망설이지 않았다.

시련은 금방 찾아왔다. 1차로 주문받은 기타를 출하한 지 얼마 안돼 1000대가 넘는 제품이 반품된 것이다. 음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음악을 전문적으로 배운 적 없는 요코우치가 최종 검수를 한 것이 문제였다. 반품된 기타를 모두 태웠다. 요코우치 회장은 시련을 보다 좋은 기타를 만드는 계기로 삼았다.

요코우치 회장은 도쿄대 음대를 무작정 찾아 음의 원리와 방법을 공부해 정확한 음을 내는 기타를 만들어 재기했다. 멈추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갔다. 1964년 요코우치 회장은 영어 한마디도 못하면서 기타 8대를 짊어지고 500달러도 안 되는 돈을 들고 미국으로 떠났다. 전화번호부에서 악기상들의 번호를 찾아 무작정 전화를 했다. 하루 한 끼 햄버거를 먹으며 뉴욕, 시카고 등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20만달러 규모의 계약을 따냈다. 미국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전 세계 45개국에 사무소를 세웠다.

○회사를 키우려면 직원들을 키워라

요코우치 회장은 회사를 최고로 만들기 위해선 직원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1969년 환율 변동과 신규 사업 실패로 4000만엔의 적자를 기록했지만 직원들 급여는 오히려 인상했다. 경쟁 업체들의 연령별 급여를 모두 조사해 각 연령별 최고 급여를 책정했다. 공장 생산 시스템도 전면 자동화해 쾌적한 작업 환경을 조성했다. 직원들의 복지를 위해 식당, 보건시설 등을 포함한 후생관도 새로 지었다. 그는 "직원들에게 보람을 주는 회사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직원들이 스스로 기업문화를 만들어갈 수 있게 위원회 제도도 도입했다. 인사위원회는 세계에서 가장 기분 좋은 인사를 하는 방법을 궁리하고 실천했다. 에티켓위원회에서는 배달 음식을 시켜 먹고 나서는 설거지를 해서 내놓자는 원칙을 정하기도 했다. 10여개가 넘는 위원회는 직원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힘이 됐다. 위원회에서 스스로 규칙을 정하고 따르면서 직원들은 개개인이 모두 후지겐을 대표한다고 생각하게 됐기 때문이다.

요코우치 회장은 "세계 최고의 기타를 만들라고 아무리 외쳐도 그 목표를 달성하는 사람은 내가 아닌 직원들"이라며 "훌륭한 사람을 만들면 그들이 훌륭한 기타를 만든다"고 말했다. 그는 "창업 초기에는 경영자의 리더십이 중요하지만 이후 회사 발전은 직원들의 능력에 좌우된다"며 "리더는 방향을 정할 뿐"이라고 덧붙였다.

강영연 기자 yyk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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