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게 말해요 "참고 살아라"

2014. 3. 18.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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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황이라의 스머프 통신] 성추행당한 일 소문난 뒤 다른 공장으로 발령,결국 무단결근으로 해고된 여성 노동자"남들은 왜 참았냐 묻지만 뒤늦게 말하고 돌아온 것

은 해고뿐"

국내 굴지의 대기업 하청업체에서 근무하던 여성 노동자가 해고되었다. 해고 사유는 7일간의 무단결근 및 업무명령 불복종이었다. 사유만 놓고 보면 해고 사유를 충족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회사가 주장하는 해고 사유의 이면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계약직, 수습 그리고 여성

이 여성 노동자는 처음 입사하고 3개월간의 수습 과정을 거쳤고, 이 기간 동안 한 항공사 정규직 직원에게 기술교육을 받았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남성 정규직 직원에게 상습적으로 성희롱과 성추행을 당했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움에 모른 척했고, 다음에는 조심스럽게 "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몸을 피하는 것으로 저항했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경찰은 그때라도 상부에 보고하든지, 왜 신고를 하지 않았냐고 하더라고요. 근데…." 그녀는 긴 한숨과 눈물에 더 말을 잇지 않았지만, 나는 그녀의 숨겨진 뒷말을 알 것 같았다. 그녀는 하청업체의 계약직 노동자였고, 더군다나 수습 기간 중이었다. 그리고 여성이었다.

실제 그녀의 걱정은 얼마 뒤 현실로 나타났다. 수습 기간만 끝나면 그 사람들을 만날 일도 없을 테고 그러면 그런 일을 겪지 않아도 될 거라는 생각에 참고 또 참으며 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전체 직원이 모여 함께 휴식 시간을 갖는 자리에서 또다시 성추행이 발생했다. 그 광경을 목격한 같은 하청회사 소속 남성 직원이 그 정규직 남성 직원에게 항의하는 과정에서 작은 몸싸움이 있었고, 그 소식은 삽시간에 직원들 사이로 퍼져나갔다.

그날 오후, 그녀는 하청업체 이사로부터 "다른 공장으로 가라"는 통보를 받았다. 성추행 사건은 어떻게 되는 건지, 왜 내가 다른 공장에 가야 하는지, 어디로 가라는 소리인지 그녀의 숱한 물음에도 이사는 마치 "다른 공장으로 가라"는 말만 녹음된 로봇처럼 그 말만 되풀이했다. 당연히 억울하다는 그녀의 호소는 쓰레기통에 구겨진 일회용 종이컵처럼 처박혀버렸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다른 공장으로 가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녀는 공장에서 작업복을 입은 채 쫓겨나기도 하고 수차례 이사실로 불려가기도 하다가, 결국 그녀를 둘러싼 근거 없는 소문과 이야기만 남긴 채 해고를 당했다. 그녀가 원한 것은 회사의 제대로 된 사실 조사와 그에 따른 당사자의 사과였지만, 회사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다. 회사는 "조용히 나가달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계약도 못 받고 너 하나 때문에 전체 직원이 짐 싸서 가야 한다. 혼자 조용히 나가면 다 해결될 일이다"라고 말했단다. 이것이 회사의 진심이었던 것이다.

의지했던 사람조차 외면할 때

"모르는 사람들은 하기 쉬운 말로 왜 그동안 참았냐고 해요. 근데 보세요. 뒤늦게라도 이렇게 말해봤지만 돌아오는 건 결국 해고예요. 그리고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고요. 학교 다니는 딸이 하나 있는데, 딸한테 얘기했어요. 앞으로는 부당한 일이나 조금 손해 보는 일이 있더라도 그냥 참고 살라고요."

그 상담을 하고 한 달여가 흐른 뒤, 대학교 내 용역업체에서 근무한다는 남자를 만났다. 남자는 몇 달 전 같은 소속의 하청업체 여성 직원이 대학교 정규직 직원에게 성추행을 당해왔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자신까지 그 사실을 알게 되어 현재는 행위가 중단되었지만, 지금이라도 뭔가를 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아마 해고된 그 하청 여성 노동자를 만나지 않았다면 당장에 고소라도 해야 한다고 주장했겠지만, 여성 노동자가 이후에 겪는 과정을 보면서 당사자가 감내해야 할 것이 너무 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망설이게 됐다. 다만 그 여성분도 같은 마음이라면, 직접 다시 한번 찾아달라는 말만 했다.

자신의 작은 권리마저 포기하지 않는 것, 그리고 자신의 권리를 지키는 것이 동시에 타인의 권리 또한 지키는 것이고 우리 사회가 조금씩 변해갈 수 있는 힘이라고 믿었던 나지만, 가끔 '현실'이라는 벽에 부딪히게 된다.

그 일에는 또 다른 불이익이 따르기도 하고, 불량한 시선들이 머물기도 하고, 의지했던 사람들에게조차 외면받기도 한다. 그런 것들이 두려운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환경을 받아들이고, 적당히 포기하고 안주하며 살고자 한다. 그래서 종종 상담하다보면 "누가 그걸 몰라서 안 하나" "현실적으로 너무 어려운 거 아니냐" "민주노총에서 대신 좀 해주면 안 되나" 이런 불만 섞인 하소연을 듣기도 한다.

얼마 전 < 노예 12년 > 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영화를 보는 동안은 내가 자유인이라는 사실에 새삼 감사했고, 영화가 끝나고 나서는 한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것이 진정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 인간을 노예는 만드는 것은

부유한 환경의 자유인에서 어느 날 갑자기 노예로 전락해버린 솔로몬 노섭이 처음에는 자신이 노예가 아니라고 맞서 싸우기도 하고 도망칠 기회를 엿보기도 하지만, 그럴 때마다 이어지는 무차별적 폭력과 생명의 위협은 그를 점점 노예의 삶에 안주하도록 했다. 하지만 솔로몬은 자유인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끝내 버리지 않았고, 결국 사랑하는 가족들 곁으로 돌아간다.

솔로몬은 자신의 편지를 우편함에 넣어주는 조력자를 만나는 약간의 행운이 있었지만, 무엇보다 자유인으로서 의지,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 행복에 대한 희망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만약 솔로몬 노섭이었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영화가 끝나고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고민했지만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부당함과 부조리에 맞서는 일, 진실을 밝히는 일, 정의를 찾아가는 길, 그 과정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솔로문 노섭이 그랬듯, 나도 우리 모두도 인간이기에 그 또한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황이라 민주노총 부산본부 상담부장

*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

이 85호 크레인에 올라가 농성을 벌일 당시 황이라씨는 하늘과 땅을 잇는 메신저 역할을 했습니다. 그의 노동칼럼 '스머프 통신'은 제903호(2012년 3월26일치)부터 제951호(2013년 3월11일치)까지 연재됐습니다. 한진중공업의 파란 작업복을 입은 노동자들은 멀리서 보면 스머프처럼 보입니다. 황이라씨는 스머프처럼 작지만 아름다운 존재인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칼럼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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