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 동북지역 국민당 제압하려 평양의 김일성을 만나다

2014. 3. 17.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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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김명호 교수의 북-중 교류 60년 ⑥ 중공의 신임얻은 조선인들

1989년 여름, 중국은 신중국 선포 40주년을 앞두고 영화 <개국대전>(開國大典)을 선보였다. 당시 중국을 대표하던 명연기자들의 연기도 일품이었지만, 기록물을 보는 것처럼 사실에 충실하고 재미도 있는 영화였다. 특히 장제스의 업적을 폄하하지 않은 점이 인상 깊었다. "누가 뭐래도 장제스는 영웅이다. 비장미가 넘친다"며 몇번을 봐도 지루하지 않다는 사람이 많았다.

2009년 가을에도 60주년을 기념하는 영화를 만들었다. 제목은 <건국대업>(建國大業). 그간 경제적 성장과 국제사회에서 상승된 지위를 그대로 과시하는 영화였다. 온갖 걸 다 드러내려 하다 보니 등장인물도 많고 내용도 복잡했다. 20년 전에 봤던 <개국대전>에 비해 빠져도 한참 빠지는 영화였지만 한반도에 관한 마오쩌둥의 짧은 대사 한마디가 나오는 장면이 눈길을 끌었다.

영화 속 이 장면은 동북 3성과 화북에서 국민당군에게 승리를 거둔 중공이 양쯔강 도하를 준비하고 있을 때 등장한다. 도하를 반대하는 스탈린의 전문을 읽은 마오쩌둥이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치며 벌컥 소리를 질러댔다. "스탈린은 중국이 조선인 줄 아느냐. 양쯔강이 38선이냐!"

기록을 중요시 여기는 민족이지만, 그 어느 문헌에도 마오쩌둥이 이런 말을 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이 말은 시사하는 바가 컸다. 장제스를 버리기 싫어하던 스탈린의 의중을 꿰뚫어본 마오쩌둥이 미국과 소련이 양쯔강을 경계로 중국을 한반도처럼 양분하려 한다고 확신했다는 의미였다.

실제로 스탈린은 중국의 지도자들 중에서 장제스를 가장 높이 평가했다. 일본이 패망하자마자 장제스의 국민정부와 중-소 우호조약을 체결할 정도였다. 마오쩌둥에 대해서는 "어떤 사람인지 정체가 불분명하다. 마르크스주의자인지, 아니면 중화민족주의자인지, 농민폭동 지도자인지 알 길이 없다"며 헷갈려했다. 중국인들이 국부로 떠받드는 쑨원은 후원금이나 걷으러 다니던 사람이라며 치지도 않았다.

1945년 8월15일 일본이 패망하자 미·소 두 열강은 한반도를 분할했다. 49년 4월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과 인민군 정치부 주임을 겸했던 김일(박덕삼)이 조선노동당 대표 자격으로 베이징을 방문했다. 마오쩌둥이 당 중앙기관과 인민해방군 총부를 이끌고 베이징에 입성한 지 한달도 채 안 됐을 때였다. 1931년 21살 때 연변 반제동맹에 참가한 이래 동북항일연군의 중요 보직을 거치며 15년간 일본과 무장투쟁을 벌여온 김일을 마오쩌둥은 환대했다.

마오쩌둥과 마주한 김일은 조선노동당 명의로 작성한 서신을 내밀었다. 꿀리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중국 인민해방군에 소속된 조선인 사단을 조선 정부에 전속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마오쩌둥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즉석에서 허락하며 부연설명까지 했다. 그 기록이 남아 있다.

"우리 인민해방군에는 조선인으로 구성된 3개 사단이 있다. 현재 2개 사단은 동북의 선양(瀋陽)과 창춘(長春)에 주둔중이다. 나머지 1개 사단은 아직도 남쪽에서 국민당군과 교전중이다. 동북에 있는 2개 사단은 요구하는 시점에 맞춰 장비와 함께 조선으로 보내겠다. 다른 사단은 전투가 끝나야 남쪽에서 불러 올릴 수 있다.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는다. 아무리 길어도 1개월 뒤면 가능하다. 남쪽에 있는 사단은 정규군이 아니기 때문에 보충훈련이 필요하다. 그것도 우리가 시키겠다."

마오쩌둥이 북한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한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다른 거라면 적당히 떼어먹을 수도 있었지만, 피(血)에는 공짜가 없었다. 얘기는 거슬러 올라간다.

마오쩌둥이 중국 인민해방군의3개 사단을 북한에 넘겨준 것은동북지역서 중공과 함께 싸웠던항일연군 내 조선인들 때문이다연군 2방면군을 이끌던 김일성은조선인 출신 간도특설대와 싸우다소련으로 건너가 최용건·김책과조선인의 단결·통일을 주장했다일본 항복 뒤 국공내전 기운 돌자국민당은 동북지역에 진을 쳤고이에 놀란 중공은 김일성을 찾았다

1935년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동북의 항일세력들은 연합을 모색하다 '동북항일민주연군'을 출범시켰다. 도끼와 곡괭이를 비롯해 각양각색의 무기로 무장한 20여만의 대오 중에는 만주 벌판과 밀림 속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선혈을 뿌린 조선 출신 지휘관이 유난히 많았다.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나 길림성 반석(磐石)까지 와서 항일유격대를 만들고 지휘했던 동북항일연군 1군 참모장 이홍광(李紅光)을 비롯해 경남 합천 출신 박한종(朴翰宗)과 경북 안동 출신 유만희(柳萬熙), 경북 선산 출신 허형식(許亨植) 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 외에도 황옥청(黃玉淸), 마덕산(馬德山), 서해광(徐光海), 장흥덕(張興德), 오옥광(吳玉光) 등 일일이 셀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출신 지역도 경기도, 경상도, 함경도, 평안도 등 한반도 전역을 망라했다.

1939년 10월 7만5천명을 투입한 일본군의 대규모 소탕작전이 시작되자 5군 지휘관 저우바오중(周保中)과 6군의 리자오린(李兆麟)은 장기투쟁을 견지하기 위해 소련 경내로 철수할 준비를 했다. 이 와중에도 김일성의 제2방면군은 안투(安圖), 옌지(延吉), 둔화(敦化) 일대에서 일본군과 유격전을 펼쳤다. 특히 40년 3월25일 허룽(和龍) 전투에서는 토벌대 200여명을 몰살시키고 기관총 여섯정과 소총 100여개를 노획해 재무장에 성공했다.

해가 바뀐 뒤에도 제2방면군은 일본군에 대한 공격을 늦추지 않았다. 허점만 보이면 산에서 내려와 부락과 기차역을 습격해 일본인 장교 두 명을 사살하는 등 전과를 올렸다. 일본 관동군은 만주군 중에서 조선 출신들로만 구성된 특설대를 편성해 제2방면군만 전담케 했지만 전과는 신통치 않았다. 11월이 되자 전세가 악화됐다. 김일성은 16명의 유격대원을 이끌고 훈춘(琿春)과 왕칭(汪淸)을 거쳐 중-소 국경을 넘었다. 29살 때였다.

김일성은 타고난 정치가였다. 소련 경내에서 열린 동북항일연군회의에 남만지역 대표로 참석하기 직전, 북만지역에서 활동하다 건너온 김책(金策)과 최석천(崔石泉·최용건)을 설득해 조선인들의 단결과 통일을 실현시켰다. 회의에 참석해서는 "동북항일연군의 독립과 자주원칙을 견지하자"는 저우바오중의 주장을 지지했다.

평북 용천에서 김일성보다 12년 먼저 태어난 최용건은 중국인이나 다름없었다.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이 평북 정주에 세운 오산학교를 마치고, 중국 윈난(雲南)성 쿤밍(昆明)에 있는 윈난 강무당(講武堂)과 광둥성 광저우의 황푸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1차 국공합작의 산물인 북벌전쟁에 참전했고, 저우언라이와 주더, 허룽 등이 난창(南昌)에서 일으킨 무장폭동에도 참가한 군사전문가였다. 베트남의 보응우옌잡, 중국의 주더와 함께 윈난 강무당이 배출한 세 명의 군사가 중 한 사람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김책도 마찬가지였다. 1930년 11월, 27살 때 하얼빈의 일본 영사관을 습격해 7년형을 선고받아 명성을 떨친 이래, 중공 지하조직의 도움으로 풀려나자 항일투쟁에 뛰어든 전형적인 무장투쟁의 신봉자였다. 나이는 김일성보다 여덟살 위였다.

김책과 최용건은 동북시절 같은 항일연군이긴 했지만 워낙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 보니 김일성을 만날 기회는 없었다. 소련에서 김일성을 만나자 문중의 종손처럼 애지중지했던 것 같다고 말하는 분이 있다. 탁견이라는 생각이 든다.

소련에 둥지를 튼 동북항일연군은 코민테른의 동의를 거쳐 국제여단(88여단)을 창설했다. 여단장은 저우바오중, 부여단장과 정치위원은 리자오린이었다. 국제여단에도 동북항일연군 출신 조선인이 많았다. 최용건은 여단 참모장과 중공의 동북지구당 서기를 겸했다.

국제여단의 조선인들은 행운아였다. 동북에 남아 있던 항일연군의 지휘관들은 중국인이나 조선인 할 것 없이 일본군의 토벌에 의해 거의 전사했다. 1955년 중국이 계급장을 수여할 때 받은 이는 소장 두 명이 고작일 정도였다. 동북의 항일투쟁 기간이 내륙보다 길었고, 동북과 소련의 밀접한 관계를 우려한 탓도 있었지만 생존자가 워낙 드물었기 때문이다. 김일성이 중국에 남아 있었다면, 중장 정도는 충분했다는 기록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1945년 8월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했다. 국제여단의 조선 출신 간부들은 두 갈래로 나뉘어 소련을 떠났다. 일부는 소련 적군을 따라 한반도의 38선 이북으로 향했다. 강신태(姜信泰·강건)와 박락권(朴洛權), 최광(崔光) 등은 동북의 조선인 밀집지역에서 조직을 재편하고, 중공의 팔로군과 함께 동북과 중국 전역을 국민당 통치에서 해방시키겠다며 동북으로 들어갔다.

승전국이 된 중국에는 그간 잠복해 있던 내전의 전운이 감돌았다. 전시 수도 충칭에서 장제스와 마오쩌둥이 담판을 벌였다. 10월10일 정치협상회의를 열어 국내 문제를 해결하기로 한 합의서에 서명했지만 두 사람 모두 합의서 따위는 종잇조각에 불과했다. 장제스는 국민당 정예부대를 동북으로 진주시킨 뒤였고, 마오쩌둥도 한발 앞서 팔로군과 신사군을 동북으로 몰래 들여보낸 다음이었다.

1945년 9월 말 장제스와 회담하던 마오쩌둥이 중공 중앙위원 천윈(陳雲)을 충칭으로 불러 지시했다. "동북으로 가라. 근거지를 만들어라."

천신만고 끝에 평양을 경유해 동북에 도착한 천윈은 국민당군의 기세에 놀랐다. 소련도 천윈과 팔로군을 냉대했다. 다시 평양으로 향한 천윈은 김일성을 찾았다.

김명호 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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